호러 장르는 종종 한 시대의 집단적인 공포를 반영한다.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로 불면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유재선 감독의 <잠>(2023)을 이러한 현대 사회의 알레고리로 읽는 것도 영화를 바라보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영화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톤으로 시작되고, 현수(이선균 扮)의 모든 기행은 불면증에서 시작된다. 또한 점심시간에도 일하기를 격려하는 수진(정유미 扮)의 PPT는 현대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는 좋은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서사가 진행될수록 잠이 공포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 남편에게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영화의 함의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임산부로 설정된 수진이다. 하지만 <잠>을 임신이 수반하는 우울감을 다루는 여성 영화라고 하기에는 역시나 부족한 감이 있다. 그렇다면 혹시 매체 연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연극배우의 고뇌를 다룬 것일까. 현실의 남편은 불면증 치료로 생계를 위협받는 위치에 있다. 아내는 “오빠는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연기를 잘한다”며 남편을 위로한다. 그러나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예술인 역시 부차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잠>은 공포 장르를 표방하면서도 정통적인 오컬트와는 거리가 멀다. 영화는 기행, 퇴마사의 등장, 악령의 퇴마와 같은 설정에서 과감히 벗어난다. 이토록 변칙적인 영화가 결론에 다다르며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극의 완성도를 높인 인상적인 연출과 아쉬운 부분을 되짚어 보자.
영화를 보며 두 장면의 세련미에 감탄했다. 토니 콜렛에 버금가는 정유미의 날 선 표정 연기나, <서스페리아>(1977)를 연상하는 마지막 장의 핏빛 조명도 아니다. 오히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애완견의 죽음이 밝혀지는 장면이었다. 금방이라도 무엇인가 튀어나올 듯한 긴장감 속에서 수진이 조심스럽게 냉장고 문을 연다. 공포 장르를 즐기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이후에 벌어질 장면을 손쉽게 예상할 수 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과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하는 줌인. 공포영화의 ‘공식’에 따르면 이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에 인물이 안도할 때 요란한 점프스케어가 스크린을 덮쳐야 한다.
이것이 유재선 감독의 첫 번째 변칙 플레이였다. 예상과 달리 애완견 ‘후추’가 정말로 남편에게 살해당했음이 밝혀진다. 카메라는 가여운 동물의 사체가 아닌 경악하는 수진의 표정을 향한다.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지만, 어떠한 구차한 뒷수습도 따르지 않는다. 오직 1장이 끝나고 2장이 시작된다는 타이틀이 모든 난장을 말끔히 봉합한다. 변칙적인 장르 운영이 전체적인 플롯의 구성뿐만이 아니라 개별적인 장면의 리듬에서도 두드러진다. 마지막 장에서 광기에 휩싸인 수진이 아랫집 이웃을 납치한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사전 전개도 없이 화장실에서 덜컥 인질의 모습이 드러난다. 빠른 전개로 인한 혼란이 진정되기도 전에 영화는 현수와 관객에게 대답을 강요하며 몰입을 극대화한다.
남편의 기행을 점차 확장해 가는 연출도 흥미롭다. 충격적인 1장의 죽음 직후 2장은 수진의 출산 장면으로 막을 올린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생명과 죽음의 교차는 강아지의 안위에 대한 공포를 효과적으로 아기에게 전이시킨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아이마저 해코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욕조에서 잠을 잔다. 문을 부술 듯 두들기던 남편이 거실에서 소변을 보고, 사운드 매치를 거치며 비가 내리는 다음 날로 연결된다. 밤에 한정되어 있던 공포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집안 전체를 덮친 것이다. 2장에서는 수진의 충혈된 눈이 클로즈업된 장면들이 여러 번 등장한다. 마지막 장에서 공포를 느끼는 주체가 역전되는 것을 고려한다면, 캐릭터와 서사의 전환을 위한 착실한 사전 준비로 여길 수 있다.
수면 클리닉에서 퇴원하고 오랜만에 귀가한 현수는 퇴마 의식의 장이 되어버린 집을 발견하게 된다. 과할 정도로 많은 부적과 붉디붉은 조명이 부부를 둘러싸고 있다. 다만 두 사람의 대립이 정점에 달하는 그 순간 아내가 느닷없이 발표를 진행하는 연출은 다소 아쉬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수진이 제시하는 논리적인 증거들은 기껏 쌓아 올린 템포에 방해가 되는 긴 설명처럼 느껴졌다. 수진이 그토록 주술적인 해결책에 집착하게 된 당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분명 그녀가 얻은 정보를 제시하는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프로젝터가 뿜어내는 밝은 빛은 공들여 빚어낸 붉은 비주얼을 해치고 말았다. 믿어야 하는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 사이에서 인간이 느끼는 혼란을 통해 극에 재미를 불어넣고 싶었다면, <곡성>(2016)이 그랬듯이 하이라이트에서 쉴 새 없이 몰아쳐야 했는지도 모른다. 뛰어난 리듬감과 속도감 있는 전개에도 프로젝터와 형광등의 밝은 빛이 결국 맥을 끊어버렸다.
그렇다고 마무리에 아쉬움만 남는 것은 아니다. 담백하지만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극을 완성해 낸 건 뛰어난 연출인 듯 보였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실제로 아랫집 할아버지의 원혼이 남편에게 깃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병의 완치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아내가 보고 싶어 한 것을 연기한 배우와 그것에 의해 구원받는 관객만이 남는다. 현수는 선택할 겨를도 없이 반강제적으로 연기 혼을 불태웠다.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연기는 명백한 허구이지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때로는 한 사람의 영혼을 치유한다. 사건들을 깔끔하게 끝맺으면서도 예술의 진실성이라는 흥미로운 화두를 던지는 좋은 마무리였다고 생각한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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