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슬플 때 꽃을 그린다. 지나가다 종종 꽃을 산다. 꽃을 사면 행복하고 꽃을 그리면 슬픔을 돌파한다. 작가의 카타르시스가 캔버스에 만개하고 관람자는 그 꽃향기에 젖는다. 다만 익숙한 꽃 모양이 아니다. 꽃이라고 하니 꽃이려니 한다.
캔버스에 펼쳐진 작가의 세계를 관람자가 이해하는 방식은 당연히 각각 다르고, 작가가 누구냐에 따라 관람자 이해 폭의 편차가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작가가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론이 수용자의 ‘통상’ 문법을 넘어설 때는 수용자 사이 이해의 편차가 더 커진다. 여기까지는 여러 문예사조의 부침과 다양한 작가를 통해 목격한 내용이다.
문제는 아예 ‘통상’의 문법을 넘어서겠다는 생각조차 없을 때이다. 작가와 수용자로, 즉 나와 너로 마주 서겠다는 기본 전제 없이 작품이 산출되면서, 즉 예술창작의 전제 없이 모종의 예술성을 실현할 때이다. 예술이라는 확증이 낯설게 이루어지면서 경험하지 못한 세계의 단편이 색다르게 제시될 때 그 형상에 무엇이 담기게 될까. 그때는 이렇게 말해야 할까. 화폭에 그저 무심히 던져진 무엇인가에서 관람자는 비의를 탐색할 뿐이라고.
양시영은, 이해하고 감상하기보다 화폭에서 비의의 흔적을 찾아야 하는 유형의 작가에 속한다. 양시영의 작품세계는 특별하다. 그러나 그 특별함은 그가 ‘통상’의 문법을 넘어서겠다는 생각조차 없는, 그래서 그 문법을 완전히 넘어서 버리는, 더 정확하게 그 문법에서 자유로운 작가이기에 가능하다. 그는 1인칭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예술가이다. 거의 모든 예술가는 1인칭의 굴레에서, 또 2인칭의 억압하에서 작업을 수행하지만, 양 작가는 3인칭으로 자신을 인식하며 작업한다.
양 작가를 따라다니는 수식어 중에 자폐가 있는데, 그 특성이 그의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림에 반영됐다. 발달장애를 겪은 그는 일찍이 그림에 소질을 보여 이제 촉망받는 청년 화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자신만의 폐쇄회로 안에서 성장을 거듭한 것이지만, ‘자신’이 ‘나’라는 1인칭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종류의 자의식이 그에겐 없다. 자신마저 3인칭으로 바로보는 인식의 프리즘은 세계를 다르게, 내 개인적 판단으로는 특별하게 보여준다. 자신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만 자신은 없는, 어떻게 보면 종교에서 말하는 가장 높은 단계의 깨달음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머물고, 가끔 그런 깨달음이 각성 없이 붓이 자동기술하듯 화폭에 누출된다. 양시영의 작품에서 언뜻언뜻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비의의 편린은 보일 듯 말 듯 캔버스 언저리를 맴돈다.
그런 점에서 양시영 작가는 신의 사랑을 받는 듯하다. 양 작가 또한 신을 사랑한다. 그의 ‘Jesus-my love’ 연작은 예배당이나 이콘에서 보지 못한 예수의 모습을 담았다. 2020년 최초 그림에서 예수는 맨발로 흐름인 듯 공간인 듯 미지의 곳에서 부유한다. 화폭은 예수의 두상이 자리한 노란색 부분과 그 아래로 나뉜다. 이원론은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이다. 예수는 내재하고 초월하며 우리 옆에 머문다. 보기에 따라 예수가 울먹이는 것 같다. 아닐 수도 있다. 맨살을 드러낸 작은 두 발은 가장 약한 이들과 함께 한 인간 예수의 특성을 보여준다.
2021년에 만든 두 번째 ‘Jesus-my love’는 상징적으로 바뀌었다. 맨살이 사라지고 전체가 십자가를 보여주려는 듯 도상 비슷한 것이 된다. 같은 해 만든 세 번째 ‘Jesus-my love’는 더 안정적이고 더 친근하다. 맨발이 다시 등장했으나 어쩐지 옆에 서 있는 느낌을 준다. 아마 손 모양이 달라지고 그림 속 노란색으로 표현된 위의 세계에 구름인 듯 경계인 듯 무언가 초월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지 싶다.
2022년에 만든 네 번째 ‘Jesus-my love’는 앞선 세 개와 차이가 뚜렷하다. 우선 상반신만 그렸다. ‘Jesus-my love’라는 글자가 그림에 들어왔다. 그만큼 사랑이 더 간절하다는 뜻일까. 성년이 된 작가의 성장통이 표출된 것일까. 의미가 직접 이미지 안에 뛰어들었다. 개라는 일상의 대상이 예수의 무릎께 자리하고 이분법 세계가 해소돼 저편 노란 지경이 없어지면서 아래위가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오른쪽 개의 입에 피가 묻어있는 게 이채롭다. 관람자는 그 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할 것이다.
네 개 예수 그림에서 예수가 모두 특정한 인종으로 확정돼 표시되지 않았다. 적어도 백인은 아니다. 기독교 교회에서 오랫동안 보여준 것과 달리 실제 예수는 백인이 아니었다는 게 정설이다. 아마 양 작가가 예수를 표현한 그림의 피부색과 닮았지 싶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는 30살을 갓 넘긴 청년인데, 요한복음에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8장 57절)라는 표현이 있는 걸로 보아 예수가 고생을 많이 해 늙어 보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얼핏 나이가 잘 구분되지 않는 양 작가의 예수가 실제로 그 주장을 반영한 것일까.
양 작가 작품에서 보이는 영성의 백미는 ‘명상하는 소’이다. 이 제목은 소가 웃을 만하지만, 인도여행 중에 그린 그림이라고 하니 수긍이 간다. 알다시피 힌두교를 믿는 인도는 소를 신성시한다. 늙고 쓸모없는 소마저 융숭하게 대접받는다. 배경은 사실적이지 않고, 서서히 초월적인 것으로 진전하는 변화를 색감으로 보여준다. 소의 입은 미소 짓는 것 같으나, 눈에는 눈물이 찔끔 묻어있다. 소의 눈물에 인간의 눈물과 같은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못할 것이 무엔가.
양시영의 작품 세계를 ‘아르 브뤼(Art Brut)’로 이해하기도 한다. ‘원생미술(原生美術)’로 번역되는 ‘아르 브뤼’는 세련되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형태의 미술을 말하며, 프랑스 화가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가 1945년에 창안한 용어다. ‘날 것 그대로’ ‘다듬지 않은’ ‘야만적인’ 등의 뜻을 갖는 ‘brut’는, 서구 전통의 ‘지(知)’의 배제나 그것에 길들여짐을 거부하는 것, 본능과 무의식에 호소하며 창조된 작품을 지칭했다. 아르 브뤼가 애초엔 반교양주의, 반문화, 반예술 태도를 보였다는 뜻이나 이후 새로운 지적 자극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양 작가의 작품을 ‘아르 브뤼’의 일종으로 보지 못할 이유가 없으나, 다른 해석 또한 유효하다고 본다. ‘아르 브뤼’에서 1인칭의 기능은 더 고구할 과제로 지금 결론을 내릴 사안이 아니지만, 직관적으로는 ‘아르 브뤼’에 어쩌면 예상보다 더 강한 1인칭이 작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된다. 1인칭이 부재한 양 작가의 작품 세계는 비(非)1인칭의 강력한 자아의 성에서 총안을 통해 집요하게 현실을 응시하여 그 성취를 비선형으로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예컨대 ‘Look at my flower’를 보라. 저 눈빛이야말로 내가 설명한 그 눈빛이다. 멀리서 성을 보면 눈빛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Flowers woman’이 그렇다. 꽃들 아래에 여인이 있는지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아래 고통이 있는지 기쁨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비(非)1인칭의 자아의 집요한 시선은 양시영의 창작의 원동력이다.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신이 주는 선물.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평론가로 영화·미술·문학·정치·춤·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크리티크M 발행인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