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있다는 것
쓰임, 현시대에 참 유용한 단어이다. 쓰임은 가치를 품고 있다.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쓸 수 있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우리는 빠른 변화의 시대를 겪고 있다. 우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변화는 속도를 더하고 우리 모두를 무능하거나 부적응자로 만든다. 쓰임은 또한 유용함을 포함하기도 한다. 시대. 방식이 달라지고 시간사용과 공간의 개념이 변화함에 따라 쓰임도 달라진다. 쓰임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과거의 쓸모 있던 것이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그 쓰임의 용도를 다르게 하고 있는 것도 있다.
쓸모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때와, 시기와 사용가능성, 즉 필요할 때(시간) 쓰여질 장소에 적합한(공간), 그리고 사용 가능한(방법이나 기술) 등이 그 하나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쓰여짐의 효율, 효과, 가치가 그 다른 측면이라 생각된다. 어떤 것을 가지고 어떤 때에 적합하게 사용하느냐의 문제가 그 쓰임의 가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쓰임에 대해 무척 중요한 의미를 두는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일상적으로 어떤 현상, 사물의 쓰임이나 용도에 비중을 둔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사람이나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곤 한다. ”쓰지도 못할 것“ ”쓸데없이“ “못쓸 사람” 등등 쓰임과 쓰지 못함을 엄격하게 구별 짓는다.
쓸모란 무엇일까? 자동차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일상생활에서 그 쓰임은 우리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효율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고가 나거나 고장 났을 때는 목숨을 위협하거나 혹은 필요 없는 고철에 불과하기도 하다. 이처럼 같은 사물이나 도구지만 상황이나 장소, 시기에 따라 아주 효율적인 쓰임을 가지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쓸모 없음에 대해 우리는 흔히 그 쓰임의 기능이나 역할을 다 했거나 나이 들음과 오래된, 낡은, 맞지 않은, 지나간 것, 용도를 다함, 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쓸모 있음을 본래의 가치로서가 아닌 도구적 가치로 인식하고 있음이 조금 안타깝게 생각된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렇게 구분하고 사용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일반적인 풍조 인 듯하다. 쓰임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문득 나는 얼마나 쓰임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점점 세월에, 새로운 문화에, 새로운 기술에 밀려나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인가? 나는 어디에 쓰임 바 되었고 지금은 어떠한가? 그리고 앞으로 나는 어디에 쓰일 수 있을까? 많은 생각들이 스쳐간다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쓰는 사람, 쓰임을 창출하는 사람에 따라 그 쓰임의 가치도 차이가 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며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으로 구분지고 편을 가르고 있는다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된다. 쓸모 없어도 곁에 있어서 좋고 쓸모 있음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역할로도 존재하고, 과거의 쓸모를 회상하는 기억으로도 필요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개인의 쓸모 있음과 없음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과 사물을 규정하고 평가하면서 다른 대한 가능성과 가치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얼마 전 여행길에 우연히 작은 전시장을 들리게 된 적이 있었다. 젊은 작가들이 만든 작품을 그곳에서 전시하고 판매도 할 수 있도록 의도된 전시장이었다. 어설픈 면도 있었지만 그곳에서 쓰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재미있는 전시를 보게 되었다. 쓸모가 없어진 물건들을 버리거나 처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술병은 술병으로의 역할을 다 하면 버리거나 깨버린다. 그 역할과 기능을 다했고 쓰임의 유효기간이 다 한 것이다. 그럼 그 빈 술병은 쓸모 없는 것, 중요하지 않는 것, 관심 밖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병에 새로운 개념과 가치를 부여하여 새롭게 쓰임을 부여하는 작품(?)을 보고 또 한번 작지만 울림이 있는 자극을 받게 되었다. 모두가 쓸모 없는 것이라 여기는 사물에 새로운 쓰임과 역할을 덧입힌 의외의 재미있는 발상이 쓰임에 대한 나의 편견에 새로운 쓰임의 방식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사용을 다한 술병을 열과 압력으로 눌러서 병이 아니 장식품, 접시, 혹은 사용자의 필요한 용도로 사용 가능하게 그 폭을 넓혀 놓은 것이다. ”병“이라는 기본의 흔적과 그 쓰임의 가능성을 가치화하여 새로운 쓰임을 부여해준 작품, 작은 생각의 전환이 큰 설레임을 가지게 해주었다.
지난해 해외여행에서 벼룩시장(flea market)을 갔던 일이 있었다. 과거, 현재의 용품과, 다양한 물건들이 정말 다채롭고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게 해주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아 보았다 그 중에서 내 눈길을 잡은 것 하나 역시 쓰임에 대한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한 작품(상품) 이었다. 시계의 재해석(?)으로 시계의 기능과 쓰임을 다한 못쓰는 시계로 새로운 기능과 쓰임을 부여한 것이었는데 시계를 규정 짓는 핵심적인 중요한 부분을 시계로서가 아닌 액세서리로 전환한 것이다. 쓰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개념을 해체, 통합하여 독특한 새로움으로 재 탄생할 수 있게되는 쓰임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 된 기회였다.
쓸모 있음과 없음의 기준은?
쓰임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인을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서 사용하는 주체가 합리적으로 사용 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쓰임”이라는 용도에 맞게 가치화하여 사용하기 적합한 상태(능력)로 내어 보이는 수통태로의 쓰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쓰임의 가치가 늘 내가 아닌 상대적인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고, 느끼고, 그렇다고 생각되는 쓰임의 개념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쓰임의 기준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자의적이고 임의적이며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 기준이나 가치는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고 변하며 모호하다. 쓰임에 대한 규정은 상식과 관행, 고정관념, 습관에 갇혀 그렇다고 정의를 내리는 것에 불과하기에 가치를 다했다고 여겨지는 것은 바로 쓸모가 없는 것이 된다. 나는 나로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쓰임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나 상대의 쓰임에 대한 기준에 의해 가치존재가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桩子)는 관점주의(Perspectivism) 적 측면에서 “모든 의견은 각자의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보편 타당한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무용지용(無用之用), 유용지무용(有用之無用),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과 쓸모 있음의 쓸모 없음, 즉 어느 상황이나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을 수 있지만 또 다른 상황이나 사람에게는 유용할 수 있고, 쓸모가 없다고 보여지는 것에도 그 쓰임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은 개인적인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 기념이며. 쓰임의 기준이나 가치는 뒤바뀔 수 있다..
쓰임의 창출, 예술의 창의
쓰임은 어떤 형상, 물건, 등에 어떤 개념을 두며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또 달라질 수 있다. 원래의 용도나, 쓰임을 다한 쓸모 없음에 새로운 개념을 부여하는 것, 그래서 새로운 가치로 쓰임 바 되는 것. 쓰임은 창출 될 수 있다.
이는 창작을 중요 요소로 하는 예술의 속성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일상의 현상이나 시각을 좀더 다양하게 인식하고 해석하여 작품을 통해 그 작가가 해석한 의미나 개념을 표현하고 시대의 현상과 공유하고자 하는 정서, 예술성의 추구라는 목적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것, 예술에도 절대적인 가치는 없다. 다만 향유하는 사람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인식 될 뿐이다. ,
예전에 예술은 무(無)에서 유(有)를 청조하는 것이라 배웠다. 창작, 창조의 개념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은 좀더 다르게 이해 해야 할 것 같다. 없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에 새로운 개념과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싣는 것, 그래서 새로운 쓸모를 갖추게 하는 것 그 또한 창작이고 창조로 여겨 진다. 사람의 신체, 인간의 능력, 사물의 용도 모두 그 개념에 포함될 수 있겠다.
쓸모 없을 지라도 나에게 쓸모 있는 나의 역사, 나의 작품, 나의 역할, 나의 세계에 개념과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 남에게 필요한 사람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한다. 다양한 쓸모를 창출해 내는 것, 이는 우리 모두가 예술가이고 동시에 예술 소비자의 역할로의 쓰임에 자연스럽게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하로동선(夏爐冬扇)은 여름의 화로, 겨울의 부채를 뜻하는 말로 쓸모 없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도 알다시피 여름에도 화로가 필요한 곳이 있고 겨울에도 부채가 필요한 곳은 있다. 세상에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것은 없다. 다만 그 쓰임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쓸모 있음의 쓰임은 알고 있지만 쓸모 없음의 쓰임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쓸모 없는 것에서 쓸모를 찾아내는 기쁨을 발견하고 이를 누리며 사는 세상으로 서로를 초대해 보는 는 것도 의미 있지 않겠는가!
글·이인숙
문화평론가, 교육학박사, 문화예술경영전공. 현재 청주대학교 영화영상학부 초빙교수로 재직하고있으면서 북경수도사범대학교 과덕대학 공연예술대학부학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 한국연기예술학회이사, 국제문화예술교육교류협회회장, 청주시 도시문화추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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