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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문화톡톡] 사람은 몇 명 죽여 봤나요 - "K-세계관의 붕괴와 맨몸 서바이벌"
[김민정의 문화톡톡] 사람은 몇 명 죽여 봤나요 - "K-세계관의 붕괴와 맨몸 서바이벌"
  • 김민정(문화평론가)
  • 승인 2023.12.04 12: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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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게임 시즌2] 공식 포스터
[피의 게임 시즌2] 공식 포스터

2025년 넷플릭스가 ‘넷플릭스 하우스’를 미국에 오픈한다고 해서 화제다. 넷플릭스 하우스는 <기묘한 이야기> <위쳐>와 같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복합 문화공간이다. 그중 <오징어게임>은 방탈출 게임과 같은 오프라인 체험 공간으로 기획될 예정이라고 한다. 자, 여기서 주목. <오징어 게임>은 세상의 많고 많은 콘텐츠 중에 왜 방탈출 게임이란 포맷으로 재탄생하는 것일까.

방탈출은 추리를 통해 방을 탈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방 안에서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 모든 플레이어는 주어진 상황 속 단서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한다. 게임 밖에서의 직업과 학력, 경제 수준 등 외적인 요인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못한다. 오로지 지금 여기의 ‘나’에만 의지해서 방을 탈출해야 한다.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공간에서 오직 ‘맨몸’으로 탈출해야 하는 서바이벌이 바로 방탈출 게임의 세계관이다. 현재 서울 홍대 및 강남을 중심으로 180개 이상의 방탈출카페가 Z세대의 열렬한 지지 속에 성업 중이다.

 

맨몸서바이벌과 인간의 생존 지능

‘맨주먹 세계관’의 최강자 배우 마동석이 주연을 맡은 영화 <범죄도시 3>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고, 두 명의 복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K-액션물’ <사냥개들>이 넷플릭스 TV 시리즈 부문 세계 1위에 등극하였다. 그리고 최정예 특수부대 출신 예비역들의 ‘밀리터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강철부대> 시즌 3은 미국 해군 특수부대 네이비씰을 투입해 ‘밀리터리 액션’ 세계관의 글로벌 확장을 이루어냈다. 2023년 올 한해 일어난 일이다. 과연 이것이 모두 우연의 일치일까.

2023년 웨이브 신규 유료가입 견인 콘텐츠 1위 자리를 차지한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피의 게임> 시즌 2는 상금 3억원을 두고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최후의 생존자가 되기 위해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는 ‘맨몸’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이다. 콘텐츠 공개과 함께 TV·OTT 콘텐츠를 통틀어 높은 화제성 지수를 기록하며 이탈리아,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등 9개 국가에 포맷을 판매하였다.

<피의 게임> 시즌 2에는 운동선수, IQ 156 멘사 회원, 수능만점자인 서울대 의대생, 전 UDT, 포커플레이어, 서바이벌 모델 프로그램 우승자 등 각양각색의 스펙을 가진 14명의 출연진이 나온다. 남부러운 것 없는 고스펙의 그들은 ‘맨몸’으로 고립된 공간에 놓이고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맨몸 서바이벌에서 중요한 것은 ‘생존 지능’이다. 생존 지능은 생존을 위해 경쟁자를 압도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의 총칭이다. 여기에는 경쟁과 배신, 음모와 계략, 심지어 무력도 포함된다. 지상파 방송에서는 보기 어려운 출연진들 간의 몸싸움도 등장한다. 전직 농구선수 출신 하승진과 전 UDT 출신 덱스의 갈등은 몸싸움으로 번지며 촬영 중단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물론, 시청자들의 반응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최근 <피의 게임>을 비롯한 다양한 OTT 서바이벌 예능이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으며 다수 제작되고 있다. <더 지니어스>를 시작으로 <대탈출>, <여고추리반> 등 추리 예능으로 독보적인 브랜드를 구축한 정종연 PD는 넷플릭스 오리시절 시리즈 <데블스 플랜>으로 글로벌 시청자에게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졌다. 프로그램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데블스 플랜>은 극강의 생존 지능을 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상금 2억 5000만원의 우승자 배우 하석진은 “의도한 연기로는 발견하지 못한 내 표정과 몸짓을 이번에 봤다”며 프로그램 자체가 “거대한 관찰 영상 자료”이자 “나란 인간의 교보재”라고 말했다. 인간 본성에 관한 존재론적 성찰과 더불어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인간 군상의 다양성을 목격할 수 있는 점이 바로 맨몸 서바이벌 세계관이 가진 강력한 매력 포인트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우리는 ‘맨몸’ 서바이벌에 열광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누군가의 ‘생존법’을 연구하듯 열심히 관찰하는 것일까. 마치 맨몸으로 무인도에 남겨진 사람처럼, 맨몸으로 광야에 버려진 사람들처럼 말이다.

 

K-세계관의 붕괴

<오징어 게임> <빈센조> <킹덤> <이태원 클라쓰> <D.P.>… 지난 몇 년 동안 글로벌 신한류를 이끈 K-드라마는 공통의 다섯 가지 공식을 공유한다. 첫째, 세계는 갑과 을의 수직적 관계를 토대로 형성된다. 둘째, 그 세계는 영원불변의 시스템이다. 셋째, 갑은 부정부패의 온상이자 악의 축으로서 사이코패스이거나 소시오패스다. 넷째, 을은 동정과 연민을 자아내는 슬프고 굴곡진 사연을 가진 사회적 소수자다. 다섯 번째, 드라마 주인공은 반드시 을이어야 한다. 현실에서는 갑이 갑이지만 드라마에서는 을이 현실의 을로서 드라마의 갑이 된다.

약육강식에 기반한 이와 같은 K-세계관은 갑과 을로 이루어진 견고한 계급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뼈대가 된다. 이때 세계관의 견고함과 맞물려 K-드라마가 가진 현실 전복적 상상력은 부의 불평등과 불공정이라는 전 세계인의 공통된 이슈를 통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함과 동시에 공감을 넘어 폭발적인 지지와 열띤 호응을 끌어낸다. 즉, 우리의 최종 목표는 ‘갑’이 되는 것이다. 합법과 불법의 영역을 넘나들며 어떻게 하서든 계급 피라미드의 정상을 차지하여 ‘갑’이 되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최상의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2023년 갑과 을로 이루어진 위계 서열이 명확한 계급 피라미드가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이분법적 세계의 정상을 바라보던 우리의 신념과 의지는 지금 붕괴 직전에 놓여 있다. 절대성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징후는 최근 방영 중이거나 방영한 드라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절대적’ 갑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갑의 세계 안에서도 계급이 나뉜다. 왕자들의 신박한 사교육 비법을 앞세워 조선 시대 'SKY 캐슬'로 불리며 큰 화제를 모은 퓨전 사극 <슈룹>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신분과 처지에 따라 계급이 달라지는 왕자들의 목숨 건 왕위 쟁탈전을 스릴 넘치게 그려낸다. 그들의 경쟁은 단순히 왕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생사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갑은 갑인 동시에 을이다. 갑도 누군가에게는 을이 될 수 있다. 병자호란을 다룬 사극 <연인>에서 왕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왕자를 청나라 볼모로 보내고, 왕자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 백성을 청나라 포로로 남겨둔 채 귀환한다. 왕과 왕자는 청나라로부터 목숨을 보전받기 위해 자기 자식을 버리고 자신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백성을 버린다. 이렇듯 갑과 을로 이루어진 이분법적인 세계는 고정불변의 세계가 아니다. 갑도 한순간에 을이 될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을 괴롭히던 ‘금수저’ 전재준도 자신이 사랑하는 김연진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남편 하도영이 전재준보다 상위 ‘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갑이 되었다고 해서 인생의 시련과 고난이 끝나는 게 아니다. <안나>와 <금수저>는 ‘갑이 된 을’의 성공과 몰락, 그들의 불안과 공포를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안나>는 이름과 학력 등 자신의 과거를 거짓으로 포장해 ‘가짜 금수저’로 사는 김유미의 두려움을 화려하지만 위태로운 그녀의 킬힐을 통해 폭로한다. <금수저>에서는 실제 금수저로 식사를 하는 행위가 을에서 갑이 되는 신분 상승의 수단이 되는데, 쉽게 쟁취한 신분인 만큼 쉽게 빼앗길 수 있다는 함정에 늘 노출되어 있다.

‘갑’의 상황이 그럴진대 ‘을’의 상황은 더욱 처절하고 참혹하다. 사람들은 제각각 개인 단독자로서 무한경쟁에 내몰리며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다. 개미지옥과 같은 계급 피라미드에서 우리는 비극적 운명을 짊어진 시시포스처럼 끊임없이 고통받고 위태롭게 흔들린다. 환생·빙의·회귀로 이어지는 최근 콘텐츠 트렌드인 멀티버스 시간 여행은 또 한 번의 기회가 아니라 끝나지 않는 저주와 같다.

 

역동적인 나라에서 불확실성이 높은 나라로

‘빨리빨리’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특유의 남다른 추진력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전쟁의 폐허에서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해냈다.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나라로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2023년 우리가 목격한 ‘불확실성’은 이전의 역동성과는 다르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움직임이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생산하기보다는 기존의 시스템과 구조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병적인 불안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소모적이고 체제 파괴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렇듯 대한민국이 직면한 어제의 역동성과 오늘의 불확실성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2023년 극강의 ‘생존 지능’이 요구되는 대한민국이란 이름의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는 법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적자생존(適者生存)이다. 적자생존의 세계관은 약육강식의 세계관과 구별된다. 강한 자가 위계 서열의 우위에 차지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강함’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 약육강식의 강함은 그것이 속한 영역이 육체든 두뇌든 자본이든 절대적 평가 기준에서의 영속성을 가진다. 하지만 적자생존이 의미하는 강함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고 즉흥적이다.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다.

‘맨몸’ 서바이벌에서 제시되는 문제 상황은 시와 비, 선과 악의 윤리적 당위성이 소멸되고, 과정과 결과, 성공과 실패의 서사적 개연성이 해체되어 모든 정형성이 제거된 논 스크립트 콘텐츠(Non-scripted Content)적 성격을 가진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문제 상황에 대한 기민한 상황판단과 유연한 사고, 그리고 발 빠른 대처 능력이다. 경쟁과 배신, 음모와 계략 즉, 예측할 수 없는 모든 변수가 허용되는 무한대의 카오스에 누가 ‘먼저’ 적응하고 누가 ‘잘’ 적응하느냐가 중요하다. 깊게 성찰하고 신중하게 사고할 시간은 없다. 우리의 일상은 한편의 ‘피의 게임’이고 모든 선택은 ‘데블스 플랜’을 기록하는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육체적으로 열등한 고대 인류가 야생의 생태계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비법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한다. 허구를 말하는 능력을 통한 공통의 신화 창조. 인간은 종교와 전설, 신화를 통해 집단으로 상상하고 협동할 수 있는 가치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인간 개인의 연약함을 보완할 수 있는 집단적 강인함을 창출해낸다. 2023년 지금 ‘맨몸’ 서바이벌 세계관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가는 공통의 창조 신화는 무엇일까. ‘맨몸’ 서바이벌 세계관이 요구하는 ‘생존 지능’은 2024년 내일의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룬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에서 생존자들은 낯선 타인을 자신의 공동체에 들이기 전에 세 가지 질문을 먼저 한다. 일종의 자격시험이다. 워커는 몇 명이나 죽여봤나요. 사람은 몇 명 죽여 봤나요. 왜 죽인 건가요. 이걸 왜 묻는 것인지,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드라마에는 답변 장면이 생략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답을 제시했느냐가 아니다. 질문 그 자체다. 자신이 누구를 어떻게 이기고 살아남은 사람인지 성찰해보는 그 짧은 순간이 우리에게 인간으로 돌아갈 시간을 주는 것이다.

생존이 아닌 ‘삶’의 감각.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대하는 태도고, 어제가 아니라 내일이다. 당신은 오늘의 생존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삶이 필요한 것인가. 오늘 당신이 살기로 한 그 삶이 누군가에게는 2023년 지금 여기를 기록한 ‘거대한 관찰 영상 자료’이자 ‘당신이란 인간의 교보재’가 될 것이다.

 

글·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과 문화, 창작과 비평을 넘나들며 다양한 글을 쓰고 있다.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과 르몽드문화평론가상, 그리고 2022년 중앙대 교육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드라마에 내 얼굴이 있다』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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