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 감독의 영화 <한산:용의 출현>(이하 <한산>(2022)은 거선(거북선)이 무게중심의 단점을 보완하고 재출전을 명 받듯, 전작 <명량>(2014) 보다 서사적으로 깔끔하다. 기록된 역사 안에서 정돈된 시선을 밀어붙이는 추진력 역시 놀랍다. <명량>의 이순신(최민식)이 불같은 성정의 사내였다면, <한산>에서는 치밀하고 계획적인 이순신(박해일)이다. 1597년 9월 16일 13척의 배로 133척 일본 배를 격파한 명량 해전과 1592년 7월 8일 완승을 거둔 한산도 대첩은 그 전투와 인물의 속성이 유사하다. 그도 그럴 것이 명량 해전은 죽음의 위기를 목전에 둔 이순신을 그리기 때문이다.
<한산>은 용의 출현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위엄이 돋보인다. <명량>이 정면 돌파를 하는 직선적인 대사와 상황들로 점철되었다면, <한산>은 형식의 절제미가 강조된다. 서사 위에 새겨진 강경함은 결말에 이르러 짜임새를 더욱 드러낸다. 영웅서사에서 벗어나 고뇌하는 인물을 재배치하고, 더욱이 빌런으로만 취급되던 적수들은 적대자(Antagonist)가 되어 동등한 위치가 된다. 기록된 역사의 원형을 섬세하게 가공한 이미지들은 내러티브의 구조와 맞물려 명징하게 드러난다.
악당 아닌 적대자로
일본 수군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시작하는 영화는 1592년 6월 부산포 왜군 본영으로 관객들을 인도한다. 조선 진영이 아닌 왜군 본영으로 향하는 서사 전개 방식에 상황을 파악할 때쯤, 어둠 속에 얼굴을 감춘 일본 수군의 수장 와키자카 야쓰하루(변요한)가 모습을 드러낸다. 한산대첩보다 40여 일 앞선 사천해전에서 살아남은 일본 수군은 와키자카에게 기억을 재구성해 들려주는데, 이와 같은 방식은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설화를 닮았다. 기록된 역사의 공백에서 찾은 감독의 정체성은 구멍난 배를 쳐다보는 와키자카의 시선이 되어 또 다른 시간의 장벽에 진입하게 한다. 그 벽을 뛰어넘어 마주한 곳에는 두려움에 떠는 일본 수군과 활시위를 당기는 이순신이 있다. 찢어진 시공간의 틈을 통해 진입한 캐릭터들은 현실에서 그 조각들을 근거로 선행된 사건들을 이어 붙인다. 접합하는 과정에서 생긴 표상과 실재는 충돌하고, 와키자카의 시선으로 포문을 연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순신에게 도착한다.
와키자카가 암흑 속에서 자신을 드러냈다면, 이순신은 촛불이 일렁이는 방의 한가운데 측면얼굴로 나타난다.(첫 등장은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이다.) 치밀하게 구성된 인물의 첫 등장신은 목적이 있어 빛으로 나온 이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중심에 선 이를 구분한다. <남한산성>(2017)의 최명길(이병헌), 김상헌(김윤석)과도 같은 우직한 신하와 같은 모습도 엿보인다. 인물과 카메라의 거리 또한 캐릭터의 입체감을 한 겹 덧씌운다. 긴 탁상에 홀로 앉아있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롱 숏으로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거리에 있다. 물론 카메라는 일정 부분 줌인을 하지만, 이상의 거리는 침범하지 않고 한 명의 장수가 되어 자리를 지키며 전라우수사 이억기(공명)가 이순신의 프레임에 등장함에 따라 카메라는 제자리를 내어준다.
하지만 와키자카의 경우는 다르다. 여러 장수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논의하는 그와 카메라의 거리는 가깝다. 이제 준하듯 카메라는 기다리지 않고, 360도를 돌면서 근거리에서 와키자카의 얼굴을 정면으로 클로즈업한다. 영화는 와키자카가 어리숙하고 멍청한 악당이 아니라, 이순신의 안타고니스트로서 전술에 능한 입체적인 캐릭터로 구현한다. <명량>에서의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에서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당해 무너져 내렸다면, <한산>은 대등한 힘겨루기를 보여준다.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본영을 바삐오가는 카메라의 눈은 두 캐릭터의 대립과 대칭을 보여주기에 탁월하다. 각자의 진영에서 배가 출항하기 이전의 시간부터 한산도 대첩이 발발하는 1592년 7월 8일까지 차츰 다가가는 전개 방식은 후반부에 등장하는 전투신의 스펙터클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충돌과 파장의 내러티브
빛과 어둠, 근거리와 원거리, 일본과 조선의 스파이, 육군과 수군처럼 서로 대칭하는 각각의 요소들은 장기판의 말들처럼 공수를 번갈아가며 변용된다. 서사는 이분법을 택하지 않고,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포개진다. 특히 견내량 시퀀스는 일본 수군의 시선에서 안개가 자욱해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보여주며, 50분 가량의 한산도 대첩으로 가는 시작을 연다. 조선 수군의 편에 선 항왜 준사(김성규)와 스님으로 둔갑한 일본 수군 사헤에(이서준)는 각각 출정 정보와 거선 설계도를 외부에서 밀반입한다. 때문에 상대 진영의 전술을 이미 파악한 이들은 ‘내려다 보는’ 신의 시선을 획득한다. 마치 장기판의 다음 말이 어떻게 움직일지 아는 상태에서 내려놓는 말처럼. 와키자카가 기다리는 적절한 때는 자신의 수하들이 대열을 이탈하며 삽시간에 무너지는 것이다.
견내량 시퀀스가 재밌는 이유는 두 진영의 목적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일본 수군은 버티는 자, 조선 수군은 유인하는 자의 역할이다. 관객 역시 두 진영의 입장을 이미 파악했기에 보는 자의 입장에 선다. 세 개의 교차하는 시선은 견내량에서 충돌을 일으킨다. 이 시퀀스에서는 사운드와 이미지의 어긋남이 돋보인다. 전투 장면에서 조선군의 말까지 자막 처리를 한 참신한 시도는 웅장한 소리에 힘을 실어준다. 특히 와타나베(박재민)과 원균(손현주)의 격투 신은 대열 이탈에서 파생한 돌발행동으로 거세진 외부음은 거선의 출현으로 뮤트되고, 프레임 내부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공간음은 용의 출현을 인지한 후에 대열을 재정비한다. 조선 수군의 학익진 대열 역시 거울쌍처럼 본래 자리를 찾아가니 비가시적인 것의 중요함이 강조되는 영역이다.
충돌에 의한 파장은 한산도 앞바다의 전투 시퀀스에 도달해 빛을 발한다. 견내량 유인에서 성공한 조선 수군은 측면을 적절히 사용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측면이 바로 거선의 단점이다. 하지만 거선의 설계도를 훔쳐간 것이 무색하게 단점을 새롭게 보완하고 돌아온 거선은 말 그대로 허점을 찌른다. 용의 머리를 숨겼다가 드러내는 방식은 <명량>에서 정면돌파를 선택했던 김한민 감독이 <한산>에서 택한 서사 우회 전략과 동일해 보인다.
허구와 실재의 경계
완승이 결정된 한산도 대첩은 다소 뻔하게 그려질 수 있었으나, 김한민 감독은 역사의 공백을 상상으로 재구성한다. 불가피한 희생을 내세웠던 <명량>에서의 직설적인 시선은 조심스러워졌다. “의와 불의” 라는 싸워야 하는 명분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항왜 준사를 통해 경유하며, 내부자가 아닌 외부자의 시야를 통해 질문을 확장시킨다. 허구의 인물을 실제 인물과 결합하는 지점도 그러하다. 이들에게도 이순신과 와키자카처럼 ‘보는 자’의 시선을 내어주는 것. 한산도 대첩의 판세를 뒤바꾼 목자 김천손을 모티브로 한 관망꾼 임준영(옥택연)은 허구의 인물 기생 보름(김향기)와 함께 한다. 절벽에서 전투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사건의 중심부에서 함께 호흡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보름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와키자카 수군이 출정하는 정보 전달과 자신의 혀를 깨물며 지닌 고결함으로 스파이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한산도 대첩이 치러진 공간에서 준영과 보름으로 옮겨온 감독의 시선은 일종의 충돌로 꽤나 또렷하다. ‘지켜보는 이’의 자리를 기꺼이 실재와 허구의 경계면에 내어준 것이다.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다양한 요소들 중에서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절충안은 감독의 정체성을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드러내는 것과 비슷할지 모른다. 기록된 이야기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우회하는 방식으로. 때문에 12월 20일 개봉하는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 작품 <노량: 죽음의 바다>(2023)에서는 어떻게 뱃머리를 돌릴지. 배우 김윤석이 표현하는 이순신은 어떤 형상일지 주목해 보면 좋을 듯싶다.
글·이하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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