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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30년 만에 마이크 놓은 ‘청룡의 연인’ 김혜수의 영화 발자취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30년 만에 마이크 놓은 ‘청룡의 연인’ 김혜수의 영화 발자취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3.12.0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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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수' 스틸컷.
영화 '밀수' 스틸컷.

세밑이다. 영화계에서도 각종 시상식과 행사가 풍성하게 열린다. 최근에는 제44회 청룡영화상이 화제가 됐다. 올해 청룡영화상의 핫이슈는 누가 뭐래도 배우 김혜수였다. 무려 30년이나 지켜온 청룡영화상 사회자 자리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김혜수는 1993년 제14회 청룡영화상부터 MC를 맡았고, 1998년을 제외하고는 한 해도 빠짐없이 청룡영화상 사회자 자리를 지켰다.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진귀한 사례이다.

김혜수는 청룡영화상 사회자로서 영화인에 대한 존중과 찬사를 담은 멘트, 순간적인 재치로 위기를 넘기는 순발력 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영화인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특히 화려하고 개성적인 드레스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했다. 김혜수의 파격적인 패션은 매년 청룡영화상 수상자(작)와 함께 지면을 장식했다. 그래서 김혜수는 ‘청룡의 상징’, ‘청룡의 연인’으로 불렸다. 김혜수 자신이 “가끔은 청룡영화상을 제가 주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김혜수는 어디까지나 배우이다.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40년 가까이 활동했다. 특히 작품 외적인 분야에서 보여준 화려함과 달리 영화, 드라마에서는 대중적인 이미지를 파괴하는 역할로 많이 출연했다. 드라마, 코미디, 사극, 시대극, 미스터리, 액션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것도 특징이다. 김혜수만큼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김혜수는 어떤 영화에 출연했고, 영화 속에서 어떻게 변신하고, 그러면서 ‘김혜수다움’을 지켜왔을까. 10대 소녀 시절부터 시작된 김혜수의 영화 활동을 정리해본다.

 

영화 '깜보'.
영화 '깜보' 스틸컷.

♣ 데뷔작 <깜보>로 신인상...화려한 등장

김혜수는 원래 CF나 잡지 표지모델로 얼굴을 알렸다. 영화에는 열여섯 살 때 <깜보>(1986)로 데뷔했다. 가수를 꿈꾸는 불량소녀 나영 역할이었다. 김혜수는 데뷔작에서 주연급으로 발탁돼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 신인연기상을 받았다. <깜보>는 1만6천 명의 관객을 동원해 흥행에 실패했지만, 김혜수는 데뷔작에서 될성부른 떡잎임을 증명했다.

김혜수는 <깜보>에서부터 복합적인 이미지를 선보였다. 큼지막한 눈과 포동포동한 얼굴, 도톰한 입술, 매끈한 피부는 10대 소녀다운 이미지였다.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는 모습도 청순함과 순진무구함을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었다. 동시에 김혜수는 짙은 화장과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성숙한 여성미를 풍겼다.

두 번째 출연작 <수렁에서 건진 내 딸2>(1986)에서 김혜수는 친구들과 섬으로 떠나 거친 생활을 하는 가출 학생 역할을 맡았다. 이어 <그 마지막 겨울>(1988)에는 불우한 성장기를 보내고, 엘리트 사원과 결혼하고, 자신을 짝사랑한 남자로 인해 유산하고, 그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는 여인으로 출연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스틸 사진에 나타난 키스신 장면의 관능미는 압도적이다. 열여덟 살의 배우가 진한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멜로드라마 주인공을 연기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오세암>(1990)과 <잃어버린 너>(1991)에서 보여준 이미지는 또 다르다. 순수하고 소박한 처녀, 불우한 남매를 정성껏 보살피는 수녀, 전신불수가 된 첫 남자를 사랑하는 순애보의 주인공이다. 김혜수의 이러한 이미지는 초기 대표작 <첫사랑>(1993)으로 이어진다.

이명세 감독의 <첫사랑>은 김혜수가 화려한 꽃잎으로 피어난 영화이다. <첫사랑>에서 김혜수는 유부남인 연극반 지도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여대생 역을 맡아 상큼한 매력과 정감 넘치는 이미지를 선보였다. 김혜수는 <첫사랑>으로 청룡영화상 최연소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청룡영화상 사회자로 데뷔한 해에 여우주연상까지 거머쥔 것이다.

 

영화 '닥터 봉' 포스터.
영화 '닥터 봉' 포스터.
영화 '좋지 아니한가' 스틸컷.
영화 '좋지 아니한가' 스틸컷.

♣ 멜로, 코미디, 액션, 스릴러...장르의 여왕

김혜수의 연기 커리어는 멜로물로 시작해서 코미디, 미스터리/스릴러, 드라마로 변하면서 큰 흐름을 형성해 왔다. 김혜수는 데뷔 초 멜로물에 집중했다가 1990년대 중반부터 코미디, 미스터리, 스릴러, 사극, 액션물로 범위를 넓혀갔다. ‘장르 편식’과는 거리가 먼 전방위 활동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김혜수만큼 다양한 장르에 도전한 배우는 드물다. 여자배우 중에서는 단연 첫손에 꼽을 만하다. 이러한 필모그래피는 오랫동안 연기자로 활동했다고 해서 당연히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김혜수의 연기 열정과 도전의식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김혜수는 1995년을 기점으로 멜로물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 대신 드라마, 액션, 사극 등 여러 장르에서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눈에 띄는 장르는 코미디와 미스터리, 스릴러다. 이 시기에도 멜로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찜>(1998)이나 <모던 보이>(2008) 등에서 멜로 연기를 잠깐 선보였다.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눈에 띄는 사실이 있다. 김혜수는 보통 여자배우가 최고의 매력을 발산하는 시기인 20대 중반부터 코미디 영화에 집중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닥터 봉>(1995)을 비롯해 <미스터 콘돔>(1997), <신라의 달밤>(2001), <바람 피기 좋은 날>(2007), <좋지 아니한가>(2007), <이층의 악당>(2010) 등이 그러하다. 1995년부터 2010년까지 2년에 한 편꼴로 코미디 영화에 출연했다. 이 작품들은 드라마나 멜로를 기반으로 하면서 중간중간 가벼운 웃음을 전달하는 코미디물이다.

김혜수는 코미디 영화에서 소형 고물차를 모는 고집 세고 콧대 높은 노처녀 가요 작사가(<닥터 봉>), 고등학교 앞에서 분식집을 하는 왈가닥 처녀(<신라의 달밤>), 번개 머리에 운동복 차림으로 하품이나 찍찍 해대는 무명작가(<좋지 아니한가>)로 스크린을 활보한다. 김혜수가 드라마보다 영화에서 코미디 연기를 선보인 점도 독특하다.

 

영화 '얼굴 없는 미녀' 포스터.
영화 '얼굴 없는 미녀' 포스터.
영화 '차이나타운' 스틸컷.
영화 '차이나타운' 스틸컷.
영화 '관상' 스틸컷.
영화 '관상' 스틸컷.

김혜수는 미스터리, 공포, 스릴러 영화에서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닥터 K>(1999), <쓰리>(2002), <얼굴 없는 미녀>(2004), <분홍신>(2005)에 잇달아 출연하면서 색다른 이미지를 쌓아나갔다. 이들 영화에 나타난 김혜수의 이미지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파격적이다. 패션 화보에나 나올 법한 기이한 헤어스타일과 진한 화장, 엽기적인 이미지로 대중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인천 차이나타운 조직의 보스로 출연해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차이나타운>(2015)도 빼놓을 수 없다.

김혜수는 30대 후반부터 이야기가 뚜렷한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범죄물이든, 액션이든, 코미디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가벼운 터치로 관객에게 다가가는 영화보다 이야기의 밀도가 뛰어난 작품에 잇달아 출연하고 있다. <타짜>(2006)를 비롯해 <도둑들>(2012), <관상>(2013), <국가 부도의 날>(2018), <밀수>(2023) 등이 이에 해당한다.

김혜수의 작품 리스트에서 사극도 빼놓을 수 없다. 김혜수의 사극으로는 TV 드라마 <장희빈>(2002)과 <슈룹>(2022)이 대표작이다. 영화로는 <영원한 제국>(1995)과 <관상>(2013)을 꼽을 수 있다. 영화에 한정하면, 사극은 작품 숫자가 많지 않다. <관상>에서는 조선시대 한양 기생 연홍으로 나와 관능미를 선보였다. 신체의 노출보다 남자의 가슴을 흔드는 눈웃음으로 농익은 매력을 발산했다.

김혜수는 2000년대 이후에 흥행 스타로 자리 잡았다. 480만 명을 기록한 <신라의 달밤>(2001을 시작으로 흥행작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타짜>가 668만 명, <도둑들>(2012)이 1,298만 명, <관상>이 913만 명, <국가부도의 날>(2018)이 350만 명, <밀수>가 514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밀수>에서 김혜수는 조춘자 역할을 맡아 1970년대 패션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김혜수는 열네 살부터 식모살이를 한 조춘자가 생존을 위해 밀수까지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연기한다. 세파에 찌들어 거친 듯하면서도 어릴 적 단짝 진숙과의 우정을 지키는 모습을 선 굵은 연기로 보여주었다.

 

영화 '밀수' 포스터.
영화 '도둑들' 포스터.

♣ 섹시미? 패셔니스타? 영화에서는 찾지 마세요

김혜수가 영화에서 보여준 이미지는 다채롭다. 순정한 여인, 팜므 파탈, 당당하고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 비운의 여인 등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김혜수의 섹시미가 두드러진 작품이 드물다. <얼굴 없는 미녀>에서 전라 베드신을 선보였지만, 영화의 스토리나 주제의 측면에서 배우의 노출은 거의 주목받지 않았다. 김혜수의 출연작 중에서 신체의 노출이 관능미로 연결된 영화는 <타짜>가 거의 유일하다. 김혜수의 패셔니스타 이미지가 투영된 영화도 의외로 많지 않다. 영화 <모던 보이>와 <YMCA 야구단>에서 시대를 앞선 패션 감각을 보여준 정도이다.

<모던 보이>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김혜수는 비밀구락부 댄서 조난실로 출연하는데, 영화 초반에 당시 여성들과 차별화되는 세련된 양장을 입고 나와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깔끔한 단발머리에 붉게 칠한 입술이 인상적이다. 이로 인해 조난실은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 이해명을 사로잡는다. 일종의 팜므 파탈이다. <YMCA 야구단> 역시 신여성 민정림의 세련된 옷차림이 눈에 띄지만, 김혜수만의 매력이 개성적으로 드러나거나 압도적이지는 않다.

그러한 점에서 <도둑들>은 눈여겨봐야 할 만한 영화이다. <도둑들>에는 김혜수의 건강한 섹시미와 패셔니스타 이미지가 동시에 나타난다. 이때 건강한 섹시미가 신체 노출과 관련이 없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 한다. 즉 섹시미는 육체의 노출과 관련되어 언급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김혜수는 이런 통념을 가볍게 넘어선다. 특유의 패션 감각과 배우로서의 아우라를 통해 카리스마와 섹시미를 분출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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