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이야기의 마술사,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김없이 가족을 전면에 내세운다. 모든 아버지가 그렇듯, <어느 가족>의 오사무도 아들 쇼타에게 세상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좀도둑질’ 기술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마트에서 희한한 방식으로 ‘삶의 지혜’를 주고받던 부자는 추운 겨울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집으로 향한다. 그들은 유리병이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발걸음을 멈춘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베란다에서 밖을 기웃거리고 있다. 오사무가 크로켓을 권하자 여자아이는 군침을 삼킨다. 보기에 안쓰러웠는지 부자(父子)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다. 영문을 묻는 아내 노부요에게 오사무는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할머니 하츠에는 아이가 밀떡을 먹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식사에 동참시킨다. 유리라는 이름의 ‘주워온 여자아이’는 오사무, 노부요, 아키, 쇼타, 하츠에로 구성된 만비키 가족에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감독의 전략은 이 기묘한 가족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관객은 ‘만비키 가족(万引き家族)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만, 영화는 특별한 힌트를 주지 않는다. 고레에다는 서둘지 않고,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시나브로 가족 관계도를 펼쳐 보인다. 영화가 한참 진행되면 드디어 흩어져있던 퍼즐이 대부분 맞춰진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노부요는 내연관계였던 오사무와 함께 남편을 살해하지만, 정당방위로 풀려나고 둘은 이후 부부가 된다. 다른 여자와 눈이 맞은 전남편 때문에 오래전부터 혼자 살던 하츠에는 오사무 부부와 함께 살지만, 그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다.
오사무의 처제로 등장하는 아키는 부모의 냉대와 차별 때문에 집을 나와 ‘사야카’라는 친동생의 이름으로 성매매 업소에서 일한다. 하츠에는 아키를 죽은 남편의 손녀로 대하지만, 그들은 피가 섞이지 않은 사이라서 그런지 그녀는 성매매 업소에서 돈을 버는 아키를 제재하기는커녕 오히려 타락을 부추기는 듯 보인다. 빠친코에 빠진 부모가 아이를 주차장에 방치하자 오사무 부부는 아이를 데려다 키운다. 유리에 앞서, 주워온 아이였던 쇼타도 그렇게 만비키 가족의 일원이 된다.
관객은 가까스로 퍼즐을 맞추는 데 성공하지만, 이 가족의 기묘한 유대를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오사무 부부는 하츠에의 연금이 가계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와 함께 생활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불속을 파고드는 아키의 발이 차다는 사실만으로도 손녀의 심리 상태를 알아채는 다정한 조손 관계 속에서 더 이상 세상과 인간을 향한 하츠에의 분노는 찾아볼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의 관계가 돈, 복수심, 유괴라는 비도덕적 요인에서 출발했지만, 이 유사 가족은 현재 생활에 만족하며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정(正)으로 시작해 정(正)으로 끝나는 경우를 도덕적 삶의 표본으로 여긴다. 그리고 정(正)으로 시작해 부정(不正)으로 끝나는 일에 대해서는 동정의 여지를 두거나 이해하려 한다. 부정(不正)으로 시작해 부정(不正)으로 끝날 경우, 사필귀정이라는 비논리적 인과론을 들이댄다. 그러나 부정(不正)으로 시작해 정(正)으로 끝나는 모든 사태에 대해서는 일체 재고의 여지를 두지 않으려 한다. 만비키 가족은 사회나 국가로부터 행복과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사회가 만비키 가족에게 훔치지 못한 유일한 것은 그들이 함께한 시간이다. 이 시간 속에 진정한 가족의 의미가 꿈틀댄다.
고레에다의 표현대로라면 그들은 ‘훔쳐진’ 상태에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처지에서 ‘훔침’은 일종의 정당방위인 셈이다. 남편과 누렸 평범한 행복이 훔쳐진 하츠에는 남편 자식에게 돈을 뜯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키는 동생의 이름을 훔친다. 언제나 약자로 살아왔던 오사무는 훔치는 것에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쇼타에게 ‘기술’을 전수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사회는 언제나 부정(不正)으로 시작해 정(正)으로 귀결되는 상황에 대해 도덕과 엄격한 법의 잣대를 동원하여 제재를 가한다. 노부요를 심문하는 경찰은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다.”라고 그녀를 다그친다. 사회적 통념으로 보면 ‘유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노부요는, 고작 “사랑하면 때리지 않아.”라고 힘없이 대꾸할 수밖에 없다. 연이어 경찰은 “그렇다면 아이들은 당신을 어떻게 불렀나요?”라는 말로 노부요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글쎄요. 어떻게 불렀을까요?” 노부요는 이 순간 간신히 붙잡고 있던 저항의 끈을 놓아버린다.
부정(不正)으로 모든 일을 시작했다는 대전제에 만비키 가족은 변명할 기회마저 박탈당한다. 고레에다는 <세 번째 살인>에 관한 인터뷰를 하면서 “법정은 진실을 밝히는 데 관심이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오사무 부부를 심문하는 경찰들의 태도는 법정의 그것과 다를 바 없으며 이는 나아가 부정(不正)과 정(正)을 바라보는 사회 전체의 시선을 대변한다. 미디어는 “두 번의 어린아이 유괴, 앵벌이, 그리고 두 번의 시체 유기”라는 헤드라인을 통해 부정(不正)의 의도가 촉발한 결과만을 배포한다. 이렇게 굳어진 사회적 통념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대, 재생산된다. <어느 가족>은 가족의 의미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훔침 당해서 훔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위로하는 고레에다식 레퀴엠이다.
이 영화에서 고레에다가 진정 말하고 싶었던 것은 훔쳐진 아이들, 쇼타와 유리의 이야기가 아닐까. 다시 집으로 돌아간 유리는 예전의 유리가 아니다. 만비키 가족의 품에서 사랑을 경험한 유리는 엄마의 협박과 폭력에 거부 의사를 나타낼 수 있는 아이로 성장했다. 유리는 여전히 베란다에서 서성거리지만, 이제는 저 너머 거리를 바라보면서 새로운 꿈을 꾼다. 유리가 입은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던 노부요가 부재한 지금, 그 역할을 과연 사회가 할 수 있는지 영화는 마지막 쇼트를 통해 관객에게 질문한다.
오사무로부터 훔치는 기술을 배운 쇼타는 자연스럽게 유리에게 이를 전수한다. 그러나 쇼타는 어렴풋하게나마 훔친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만비키 가족의 붕괴는 가게 주인이 쇼타에게 “훔친 건 가져가. 대신 동생에겐 도둑질시키지 마.”라고 손짓으로 훈계하는 순간 시작된다. 박탈당한 자가 할 수 있는 대응 방식이 훔치는 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자각은 쇼타가 만비키 가족을 떠나 사회로 나아가게 만든다. 학교에 가본 적은 없지만, 쇼타는 아버지 오사무보다 똑똑하고 상황에 대한 이해도 훨씬 빠르다. 오사무는 자신에게 낚시 강의하는 쇼타를 보면서 아버지가 아닌, 아저씨가 될 결심을 한다. 더 이상 만비키 가족의 울타리에 가두기엔 훌쩍 커버린 아들을 그는 사회로 내보내려 하는 것이다. 부자의 이별 의식은 참으로 구슬프다. “나를 두고 도망가려 했냐?”라고 묻는 쇼타에게 오사무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오사무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이에 화답하듯 떠나는 버스 안에서 쇼타는 처음으로 ‘아버지’란 단어를 읊조린다. 영화는 가족의 의미를 묻는 사회드라마로 출발해 제법 먼 길을 돌아 성장드라마로 귀결된다.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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