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정치적 풍자 영화 또는 정치 영화?
스웨덴의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백인) 남성 부조리 3부작”은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2014)을 필두로 두 번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가져다 준 <더 스퀘어>(2017)와 <슬픔의 삼각형>(2022)으로 구성된다. 외스틀룬드의 3부작은 루저가 된 백인 남성을 주인공을 하여 그가 처한 상황을 통해 백인 선진 사회의 시스템의 부조리와 위선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로 분류된다. 흥미롭게도 3부작 가운데 황금종려상을 받지 않은 <포스 마쥬어>는 전반적으로 외스틀룬드의 최고작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반면에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2편의 영화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명백하게 갈리며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더 스퀘어>에 대한 국내 평론가들의 견해도 “이 시대 최고의 감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창의적인 개성을 가지고 있는 감독”의 작품이라는 극찬(이동진)과 “스크린 붕괴의 순간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 보이는 형편없는 영화라는 강력한 비판(허문영)처럼 상반된 평가로 갈린다. 특히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자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은 <슬픔의 삼각형>은 이러한 엇갈리는 평가로 더 많은 관심을 끄는 문제적 영화이다.
3부작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시각에서 비판적인 관점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해석이 정해진 풍자를 제공하는 구도에서 실패와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 다시 말해, “20세기 유럽 정치 풍자 영화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한 식상한 작풍”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한계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우스꽝스러운 시대에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영화”라 평하기에 손색이 없다는 극찬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외스틀룬드의 3부작이 정치적 풍자 영화가 아니라 그 이상의 영화를 만들려는 시도의 결과물임을 전제로 한다.
외스틀룬드는 <슬픔의 삼각형>에 대한 인터뷰에서 "난 이 영화가 ‘트로이의 목마’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영화 안에 잘 숨기고 미국에 그걸 전파하는 게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물론 이 영화 자체를 마르크스주의를 대변하는 트로이의 목마로 생각한다는 감독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사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크루즈 침몰 시퀀스의 배경으로 전개되는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격론은 마르크스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무의미한 외침의 음향 효과를 낼 뿐이다.
외스툴란드는 루이스 부뉴엘과 리나 베르트뮐러가 연상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질 들뢰즈가 위대한 자연주의 영화감독으로 선정한 부뉴엘 보다는 베르트뮐러의 <귀부인과 승무원>(1974)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 영화는 우회적이고 은유적이 아닌 직설적인 풍자의 방식으로 엔트로피로 치닫고 있는 파국적 상황을 파헤쳐 그 이면에 내재한 자본주의 사회의 퇴락과 파괴를 초래하는 폭력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부뉴엘의 영화처럼 부정적인 현상과 결과로서의 엔트로피를 벗어날 수 있는 열림과 탈주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정치영화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외스틀룬드는 단순한 정치적 풍자영화를 넘어서 미국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을 해체시킬 수 있는 정치적 전복성이 내재된 정치영화를 만들고자 한 것은 사실이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엔트로피의 결과만을 포착하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이 영화가 이용한 것은 바로 애비게일의 존재를 통한 성정치적 전복성이다.
“(백인) 남성 부조리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분류되는 이 영화의 후반부를 이끌어 가는 인물은 호화 크루즈의 청소 담당자, 애비게일이다. 무인도로 여겨진 섬에 표류하여 “여기선 내가 캡틴입니다. 자, 내가 누구라고요?”라고 단언하는 애비게일 역을 맡은 필리핀계 여배우 돌리 데 레온은 칸 영화제 기간 동안 여자 연기상 유력 후보로 언급되었고, 아카데미 후보 입성을 지지하는 평론가도 있을 정도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의 “생존회로”의 말단에 처한 “글로벌화의 하녀”로서의 애비게일의 등장은 루저로서 백인 남성, 칼(해리스 딕킨슨)이 겪는 부조리성을 강조하고 부각시키기 위한 타자의 역할로만 관심을 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 역할을 거부한 애비게일의 존재의 부각은 이 영화를 정치영화로 창조할 수 있는 강력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2. 백인 남성 부조리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잘 나가는 모델이자 인플루언서인 여자친구, 야야(샬비 딘) 덕분에 협찬을 받아 호화 크루즈에 승선한 칼이다. 그는 이 영화의 제목이자 오디션 심사위원에게 지적당한 ‘슬픔의 삼각형’을 미간에 띄고 있는 백인 남성 모델이다. 그가 야야와 함께 탄 호화 크루즈는 승객들에게 그 스타일과 규모에 있어서 최상의 수준의 격조를 갖춘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자본주의의 포스트모던 문화의 속물적인 물질주의를 경배하고 존속시키는 일종의 외설적인 신전 또는 최고급 유곽과 같은 곳이다. 그 크루즈는 극소수만 구매할 수 있는 최상위 위치재(positional goods)이자 성공과 쾌락의 기념물이자, 아비투스가 작동하는 계급의 위계적 피라미드 구조로 된 자본주의 사회의 닫힌 시스템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위계적 시스템이 작동하는 이 소우주는 결국 출구 없는 시간 속으로의 함몰로 엔트로피에 도달하게 되거나, 영화에서처럼 그 시스템 밖에서 출몰한 해적들의 수류탄 공격으로 갑자기 폭발한 화약고와 같이 파국으로의 진행이 순식간에 일어날 수도 있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은퇴한 무기사업가가 만들어 팔았던 수류탄의 공격으로 그의 성공의 축하 파티의 장이 바로 그의 죽음의 장이 되었다는 아이러니는 호화 크루즈의 화려한 파티와 외양 이면에 내재하고 있는 폭력적이며 야만적인 파국의 현실을 더욱 부각시킨다.
호화 크루즈 여행에 협찬으로 승선한 야야와 칼, 특히 백인 남성 루저 칼은 선상에서 다양한 인물들과 거기서 벌어지고 있는 웃픈 상황을 비교적 객관적 거리를 둔 관찰자의 입지를 취한다. 그러나 선상에서 그는 관찰자의 역할만을 하지는 않는다. ‘슬픔의 삼각형’을 미간에 띄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끄는 몸과 분위기를 가진 자유로운 영혼의 인부가 가시화되는 것을 제압하여 시스템의 관리 통제에 개입하기도 한다. 이 에피소드는 비가시적인 존재여야 할 인부가 갑판 위에서 그의 불편한 시선을 끌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부당 해고시켜 하선하게 만드는 상황을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원인을 제공한 칼 역시 그 시스템의 작동과 운영에 연루된 공모자임을 보여준다.
3부로 구성된 이 영화의 1부는 여자 모델의 3분의 1 수준의 수입을 갖는 남자 모델이 겪는 부당한 경제적 처우와 권력을 가진 업계 동성애자들에게 성상납을 해야 하는 치욕을 감당하는 등, 다른 세계와는 달리 젠더 위치가 전복된 상황의 부조리를, 즉 남성 모델이 겪는 모델계의 부조리를 다룬다. 잘 나가는 모델이지만 미래가 불안한 야야는 데이트 비용 부담에 문제를 제기하는 칼과 같은 찌질한 남자친구와의 미래보다는 누군가의 트로피 와이프가 되어 안정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야야의 남자친구 칼이 야야의 트로피 와이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젠더 역할의 전복을 백인 남성 칼이 겪는 부조리이자 모델계의 부조리로 그리는 이 영화는 젠더 역할의 전복 자체가 부조리한 현상임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야의 트로피 와이프로, 2부 호화 크루즈에 탑승한 갑부들, 아마도 야야에게 트로피 와이프가 될 기회를 줄 수 있는 승객들 틈에서, 그들의 호화 축하파티를 관찰하는 루저 칼에게 관객 또한 공감과 동일시보다는 거리를 두게 된다. 크루즈가 전복된 후 3부 무인도에서 애비게일의 트로피 와이프로 생존하는 칼에게는 거리만이 아니라 거부감을 느끼는 관객이 적지 않을 것이다. 관객의 이러한 거부감이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결정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잘 나가는 백인 여성 모델이자 인플루언서 야야의 트로피 와이프 역할을 하는 칼이 겪는 루저로서의 경험은 백인 남성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웃픈 상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백인 남성이 가장 하위 젠더 주체인 필리핀계 청소부 애비게일의 트로피 와이프 역할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이 감당하기가 힘든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불쾌한 젠더와 계급의 전복을 백인 남성 칼이 겪는 부조리를 강조하는 효과를 위한 과장된 블랙 유머로 받아들임으로써 역겨움을 상쇄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관객의 이러한 반응은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불편한 성정치적 메시지에 대한 거부감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 영화가 백인 남성의 부조리를 다루는 영화에서 정치영화의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젠더와 계급의 전복을 시도한 여자들의 존재와 역할에 달려 있다. 엔트로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정치적 전복성을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 즉 구원의 가능성은 바로 야야와 애비게일과 같은 여자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트로이의 목마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성정치적 전복성이라고 할 수 있다.
3. 자본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백인 남성의 격론: 아무런 의미 없는 ‘음향과 분노’
선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승객은 러시아계 거부 비료사업 CEO 드미트리(즐라트고 부리치)의 아내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여자 종업원에게 역할 바꾸기 놀이를 제안해서 벌어지는 웃픈 에피소드는 크루즈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오히려 반증한다. “우리는 다 동등한 존재”라며 모두가 함께 수영을 즐겨야 한다는 그녀의 제안에 직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바다에 줄줄이 뛰어드는 장면은 우리 세계가 정치적 언어로 위장하고 있는 평등주의에 내재된 위선과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국적과 이데올로기에 관계없이 구매력을 갖춘 고객들이라면 승선할 수 있는 호화 크루즈에서는, 서비스직 관리자 폴라(비키 베를린)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실제 관계 맺기가 아닌 지젝(Slavoj Žižek)이 말하는 “타자성이 결여된 타자와의 경험”으로 신자유주의시대의 “관대한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가 표방하는 관계 맺기에 그칠 뿐이다. 따라서 호화 크루즈는 물욕과 형편없이 추락한 교육과 지성의 수준이 지배하는 사회로 전락해버린 미국의 소우주를 보여주고 있다. 드미트리와 같은 승객들은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적나라한 공허감과 공격성을 과시 또는 힐링하기 위해 섹스와 음식, 술 등으로 감각적인 쾌락과 사치스러운 특권의 위안을 추구하는, 즉 자신의 사소한 욕구들을 만족시켜줌으로써 현실의 부조리한 모순들과 파국적 상황을 회피하는 포스트모던 인간들이다.
선장 주최 파티는 포스트모던 소비문화의 속물주의적 삶의 천박한 표면에 럭셔리로 윤을 내는 일종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파티를 사치와 호사로 윤을 낸 표면을 깨뜨려 그 이면을 채우고 있는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의식으로 전용한다. 폭풍우로 배가 흔들리는 가운데 파인 다이닝의 서빙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는 승객들이 분출하기 시작한 토사물로 범벅이 된 파티는 사용가치가 아닌 잉여의 가치인 욕망을 통해서 작동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생산해낸 사치와 과잉의 이면을 드러내 보이는 난장판으로 절정에 이른다. 청소부 애비게일과 그녀의 동료들이 아무리 열심히 청소를 해도 변기들에서 솟구치는 오물은 이제 더 이상 처리할 수가 없을 정도로 넘쳐흐른다. 구토를 하며 짐승처럼 바닥을 기는 승객들의 모습과 해적의 공격에 의한 배의 침몰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파괴와 폭발을 적나라하게 포착한 상징적 장면들이다.
자본주의 최상위 계급을 대변하는 인물인 이 배의 선장 토마스(우디 해럴슨)는 캐빈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으며 폴라와 항해사에게 전권을 이양하여 선장으로서의 역할을 거부한다.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자신을 고립시키기를 고집하는 사회주의자이다. 일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개최한 선장 주최 파티에서도 그는 햄버거를 먹으며 자기가 속한 계급의 아비투스를 거부한다. 반면에 애인과 아내를 동시에 당당하게 동반하고 배에 탄 러시아 사업가 드미트리는 자본주의자이다. 이 두 사람은 파티의 후반부부터 폭풍우로 배가 흔들리고 마침내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가운데도 이데올로기 논쟁을 계속한다. 경고 방송 대신 침몰하는 선상에 울려 퍼지는 만취한 두 남자가 마르크스와 레닌, 레이건과 마크 트웨인, 마거릿 대처와 케네디의 명언들을 서로 던지며 벌이는 격론은 상당히 진지한 내용처럼 들린다. 그러나 바보들이 지껄이는 ‘음향과 분노’로 가득 찬 아무런 맥락도 의미도 없는 침몰하는 배와 함께 사라질 헛소리일 뿐이다.
4. 애비게일, 야야와 칼: 욕망과 탈주의 삼각형
3부에서 크루즈의 자본주의 시스템 밖에 존재하는 무인도에 표류한 8명의 생존자들은 계급의 피라미드를 벗어나 생존을 목적으로 한 사용가치에 의해 작동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이 시스템은 자본주의 계급 피라미드가 전도된 다른 위계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무인도에서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음식이며, 낚시를 할 줄 아는 애비게일이 유일하게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생존자이다. 2부에서 애비게일이 야야와 칼의 객실을 청소하기 위해 들어와 섹스 중인 그들을 목격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을 구성하는 주체도 욕망의 대상도 아닌 서비스를 마친 뒤 사라지기로 된 타자, 하녀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사를 벌이는 두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애비게일의 무표정한 응시에서 욕망의 대상으로서 칼을 욕망하게 만드는 제3자, 매개자로서 야야가 불러일으키는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세 사람의 조우가 일어나는 그 장면은 애비게일 또한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의도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3부 무인도에서 생존을 책임질 수 있게 된 애비게일은 이제 스스로를 캡틴으로 부르며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자신의 입지를 인정받기를 강요한다. 애비게일은 이제 칼에게 성적 서비스를 요구하면서 야야와 칼의 관계에 개입하여 욕망의 삼각형을 완성한다.
애비게일의 캡틴으로의 수직 상승과 트로피 와이프로서 칼의 쟁취는 계층, 젠더, 인종, 모든 것을 뒤집는 “시네마틱 롤러코스터”를 탑승한 것 같은 짜릿한 흥분을 즐기던 관객이 감당하기에도 구토를 유발할 정도로 충격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은폐된 계급성을 선명히 드러낸 후 그것을 역전”시키기 위해 애비게일의 수직 상승이라는 “과장된 상황”으로 그러한 충격 효과를 노렸다는 해설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곡을 찌르는 지적은 아니다. 이 영화는 “계급에 종속된 인간의 본성”이 해방되어 만들어낸 카오스에 대한 신랄한 비판만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가 기존 유럽의 정치 풍자 영화의 차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면, 그것은 필리핀계 여자 청소부 애비게일의 수직 상승을 통해 계급 뿐 아니라 젠더와 인종의 관점에서 그 의미를 읽어내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꼴이 때론 섬뜩하고 때론 슬프다가도 대체로 역겹고 과장되며 우스꽝스럽다”라는 코멘트는 백인 남성 부조리를 다루는 영화에 등장한 애비게일이라는 위협적인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관객의 부정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심리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엔딩 또한 충격적이다. 애비게일에게 칼을 빼앗긴, 아니 그녀와 공유하게 된 야야는 그 섬으로부터 탈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기 위해 해변을 떠나 숲으로 떠나기로 결정한다. 애비게일 또한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서고, 잠시 후 불길한 예감에 칼도 두 여자를 찾아 뛰어 온다. 한참을 달려온 야야와 애비게일은 놀랍게도 크루즈보다 더 큰 규모의 휴양시설 입구를 발견한다. 이 섬은 무인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애비게일, 야야, 칼은 다시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진입하게 될 입구에서 탈주의 삼각형을 구성하게 된다.
이 영화는 오픈 엔딩으로 끝난다. 전력을 다해 뛰어 오는 칼, 새로운 기회와 미래를 꿈꾸고 있는 야야, 그리고 두려움과 눈물이 가득 찬 표정으로 야야의 등 뒤에서 돌을 들고 그녀의 머리를 내려치려고 하는 애비게일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애비게일이 야야를 돌로 내려칠지, 그전에 칼이 도착할지, 그들이 그 입구로 들어가는 것이 귀환이 아니라 탈주가 될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이 오픈 엔딩에서 분명한 것은 애비게일이 돌을 들고 결정적인 행동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결정권은 그녀가 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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