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서의 무용이 현대의 학구적(academic)인 대학에서 성장하고, 대학 출신의 무용수들이 좁은 진로를 뚫고 직업단체에 진입하였으나 그들이 하는 무용 작품은 여전히 어렵다. 다분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관점에서 상징의 매개를 찾아보며 공연을 감상하는 것이 일부 관객에게는 즐거움이 될 수 있으나, 대다수 관객에게는 곤혹스러움이 될 수 있다. 언어가 배제된 춤 공연에서 관객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관람 포인트는 무엇일까? 이미 대형화된 블록버스터(blockbuster) 영상을 통해 초현실적인 판타지(fantasy)를 경험한 관객들이 아날로그적인 극장 환경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디지털 환경에서 인지하던 것과 근사한 규모의 경험이거나 그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기대할 것이다.
속도와 변화에 민감한 현대 관객에게 무용 작품은 지나치게 관념적이거나 상징적인 접근이 많다.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에서 대상성을 명확하게 저격하여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춤의 의미부를 구성하는 내용과 형식에서도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확장해야 하고, 춤의 외적 형식과 기법에서도 변화를 꾀해야 한다. 최근 공연에서 보이는 유사 동작구[동작 프레이즈(phrase), 혹은 무절(舞節))의 과도한 나열이나 반복도 지양해야 한다.
최근 국·시립 급 무용단에서도 작품 접근 방식이 유사하여 무용가들은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예술 지향성이 다른 예술집단에서 공적자금을 가지고 제작한 작품이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어 무대에 올리는 것은 초기 작품의 평가가 아무리 좋았어도 문제로 지적된다. 국립단체에서 미니멀 아트의 양식적 차용으로 색채·형태·구성을 극히 단순화하여 춤이 갖는 본질로 환원해 지극한 세련미를 추구한 작품이 당시의 공연 판을 뒤흔든 바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의 작품이 다시 시립이나 도립 무용 단체에서 같은 형식의 시스템을 가동하여 반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단순한 형태의 정제된 춤을 반복에 의한 연속체로서 극장 전체를 구성하는 모노톤(monoton)의 외관이 아무리 세련되어도, 이러한 형식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대다수 관객이 있다는 점도 고려할 때, 직업무용단별로 유사 작품을 구성하는 일은 지양될 것이다.
문화 향유의 다양한 관점이 적용되어 직업무용단이 독자적인 개성을 갖는다면 관객들은 취사선택하는 호사를 누릴 것이고, 무용공연을 찾는 관객의 폭도 확장될 것이다. 이번 평문은 대중성을 지향한 직업무용단의 작품 <토끼탈출기>와 <나례>를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1. 인천광역시립무용단의 <Water Castle 토끼 탈출기>
인천광역시립무단의 예술감독 윤성주는 무용극에 강한 안무가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주로 장엄한 비극(悲劇)이 중심을 잡고, 웅장한 전개로 묵직한 인상을 심어주곤 하였다. 2012년부터 2015년 국립무용단의 예술감독으로 재직하며 내놓은 작품 <그대, 논개여(2012)>, <신들의 만찬(2013)>에서도 극화된 전개에 코러스의 몹씬(mob scene)을 통해 고조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고전에 기댄 텍스트의 단단함으로 서사는 개연성 있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작품 기저를 이루는 스타일은 2017년부터 인천시립무용단으로 자리를 옮겨서도 견고하게 지키고 있다. <제의>, <비가>, <만찬>, <만찬 진오귀> 등의 작품에서도 작품은 짙은 그녀만의 진지함으로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2023년 10월 27일과 28일 양일간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 작품 <Water Castle 토끼탈출기>에도 극적 서사가 명확한 작품으로 판소리 <수궁가>가 갖는 반복적 대립 구조를 잘 살려 진행하였다. 다만 다른 지점은 캐릭터(character)의 창조를 통해 해학과 풍자의 미적 특질이 유쾌하게 진행하였다는 점이다.
<Water Castle 토끼탈출기>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형성된 판소리 <수궁가>에 근간을 두고 있다. <수궁가>는 다양한 이칭(異稱)으로 서민의 향유 예술로 자리 잡아왔다. ‘토끼’에게 초점을 둔 ‘토공전’, ‘토처사전’, ‘토선생전’, ‘옥토전’과 ‘자라’에 초점을 둔 ‘별주부전’, ‘별쥬전’ 등과 두 배역에 공동으로 초점 맞춘 ‘토별가’, ‘별토전’, ‘수륙문답’, ‘토별산수록’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며 전승됐다. 이번 공연 <Water Castle 토끼탈출기>는 토끼가 주인공이 되어 시놉시스(Synopsis)를 구성하였다.
전통적으로 별주부와 토끼의 대립은 조선 후기의 무너져가는 봉건제도를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Water Castle 토끼탈출기>는 <수궁가> 속 인물과 상황을 현대적 시각에서 해석하여, 해학과 풍자를 담아 표현하였다. 원본인 판소리에서 전하는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되, 결론에 이르는 내용은 불안정한 현대인의 삶을 담아내어 위기에 대한 공감을 끌어내었다.
따라서 등장인물의 창조에서 주인공은 용왕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야기는 두 인물, 즉 토끼와 별주부의 대립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수궁가>와 같은 맥락으로 전개된다. 백약이 무용한 용왕은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설정되어 희화화되었다. 절대 권력을 지닌 왕은 복부의 과장을 통한 복식으로 형태를 구성하고 균형을 잃은 행동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인물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토끼는 용왕에게 대항하는 캐릭터로, 어수선하고 재빠르며 우발적인 춤을 통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토끼의 급한 성정을 표현하였다. 이에 반해 자라는 용왕에 대한 충심이 깊은 캐릭터로, 느리지만 힘이 있는 우직함의 캐릭터로 해석하여 진중함을 표현하였다.
<Water Castle 토끼탈출기>는 프롤로그 ‘아니리’, scene 1 ‘어전회의’, scene 2 ‘상좌다툼’, scene 3 ‘토생요설’, scene 4 ‘피장봉호’, 에필로그 ‘아니리’로 구성되었다. 프롤로그 ‘아니리’는 판소리에서 소리의 중간중간에 음률이나 장단에 따르지 않고 일상적인 어조로 연행하는 형식이다. 무대를 채운 “갑신년 중하월에 남해 용왕이 ~ 수삼일을 즐기더니 과음한 탓인지 용왕이 득병허야 백약이 무효라 홀로 앉아 탄식을 하시는디...”의 작중(作中) 아니리는 <Water Castle 토끼탈출기> 서사의 진행에 관여하여 사전 전개로서 시공간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아니리로 판소리 조의 유장한 서사가 진행되면 무대는 바닥의 공간과 높이가 있는 공간으로 층위를 두며 용왕의 모습을 드러낸다.
scene 1 ‘어전회의’는 수궁 대신들이 모여 벌이는 치열한 논쟁의 장이다. 무대의 아이콘으로 두 개의 대형 테이블이 등장하는데, 바퀴를 단 가동성으로 시각적 가시성을 확장하여 춤을 이어갔다. 나중에 합세한 테이블로 탁상공론하는 용궁의 대신들을 대입하여 인간 세상의 정치인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심해 바다의 풍경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표현하였고, 춤은 공간적으로 신체가 바닥을 지향하여, 중심을 바닥에 두고 상층지향적인 춤을 구성하였다. 탁상공론의 공방 속에 좌충우돌하며 선택된 자라[별주부]의 고뇌로 춤은 마무리된다. scene 2 ‘상좌다툼’은 토기가 사는 육지 동물의 세계를 약육강식의 자연이 갖는 위계적 질서에 따라 무대 장치의 구조를 활용하여 담아내었다. 상좌다툼은 지상 동물계에 인간적 질서가 도입되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이면을 보이며,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대립과 반목을 춤으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이 세계의 춤은 층위를 이룬 계단과 그 위 강자의 변동과 우위를 차지하려는 욕심이 표현이 중심을 이루었다. scene 1 ‘어전회의’의 중심 동작과는 달리 도약과 낙하의 대대적인 움직임을 구성하여 직선적이고 공격적이며 누르는 듯한 힘의 요소를 동원하여 표현하였다. 이 장면에서 토끼는 요령을 통해 상좌를 차지하지만 결국 밀려나 배회하는 다소 얄팍한 밉상과 같은 캐릭터로, 빠르고, 가볍게 다(多) 방위적 공간을 지향하며 춤추었다. scene 3 ‘토생요설’은 별주부에게 속아 용궁으로 들어간 토끼가 요사스러운 수작을 부려 용왕을 속이고 다시 탈출하는 상황을 표현하였다. 토끼, 자라, 용왕의 개성 있는 춤으로 장면을 설명하고 있다. scene 4 ‘피장봉호’는 토끼가 별주부를 속여 육지에 도착하지만 역시 날짐승들의 먹잇감이 되어 곤혹스러운 상황이 연속되는 살벌한 생태계의 위협으로부터 극적으로 탈출하는 장면이다. 토끼와 날짐승인 군무들의 관계를 통해 긴장이 고조되고, 얄팍하고 잔꾀가 많은 토기의 대처로 장면은 재미를 더하였다. 에필로그 ‘아니리’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토끼가 독수리에게 채여 변을 당하며 작은 반전을 통한 여운으로 종결되었다.
전반적으로 관객이 아는 고전 <수궁가>를 재해석한 <Water Castle 토끼탈출기>는 수작에 해당한다. 관객이 알 수 있고, 지루한 전개 사이사이에 캐릭터를 익살스럽게 묘사하여 재미를 주었고, 장면의 내용구성에서 풍자를 실어 해석하고 대미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위기를 메시지로 전해 공감을 증폭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군무의 전개가 조금은 세분된 장면으로 구체화 된 동작 특질로 구성되었으면 하는 점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레퍼토리 작품으로 지속적인 수정을 통해 변화를 꾀한다면 작품은 좀 더 흥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2. 국립국악원의 <나례(儺禮)>
2023년 12월 27일(수)부터 29일(금)까지 3일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국립국악원의 송년 공연 <나례>가 공연되었다. 나례는 섣달그믐날 궁에서 펼치던 새해맞이 의례였다. 이번 공연 <나례>는 궁중의 의례 문화의 하나이자 연향으로 발전된 나례의 전통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의 공연이나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가 연출을 맡아 공연의 시놉시스는 대폭 수정되었다. 박동우는 인문학적 기반이 탄탄한 무대 디자이너로 정평이 난 인물이다. 그의 작품은 간결하나 문화적 상징이 극명하여 작품의 품격을 높이고, 작품의 개연성을 단단히 하는데 기반이 되어왔다. 이번 작품도 국립국악원의 전반적인 상황과 조화를 이루는 격이 있는 무대로 장중함을 보여주었다.
공연은 나례에서 연행되었던 의례나 나례희를 나열하고, 관객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어릿광대 두 명을 서사자(敍事者)로 기용하여 나례의 상황을 관객에게 설명하고, 옴니버스로 구분된 장면의 사이를 희화적으로 연결하기도 하였다. 장면은 1장, ‘고천지(告天地)’, 2장, ‘세역신(說疫神)’, 3장, ‘구나희(求那戱)’, 4장, ‘기태평’(祈太平)‘으로 구성되었다.
1장, ‘고천지’는 나례의 시작을 하늘과 땅에 고하는 장면으로 정악단이 ‘대취타’를 연주하고, 무용단이 ‘사방신무’를 연행하였다. 2장 ‘세역신’은 역신을 달래는 장면으로 민속악단이 연희팀과 객원인 어릿광대 두 명을 기용하여 서도소리 가창자(歌唱者) 한 명이 무녀로 출연하여 ‘훠어이 물럿거라’를 연행하였고, 다시 정악단이 ‘해령’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무용단이 ‘학연화대무’와 ‘역신무’를 연행하였다. 3장 ‘구나희’는 놀이로 역신을 쫓아내던 전통을 표현한 장면이다. 무용단이 ‘방상시무’, ‘처용무’, ‘십이지신무’, ‘진자무’ 등을 공연하였고, 정악단과 민속악단이 반주를 맡았다. 4장, ‘기태평’은 평안한 신년을 기원하는 장면으로 정악단이 ‘대취타’를 연행하고, 무용단이 ‘향아무락’을 춤추었다.
장별로 세부적인 장면들은 안정적이고 품격이 있었다. 어릿광대들이 넘나든 대사와 몸짓들은 관객들에게 풍자와 해학으로 웃음을 던져 주었다. 정악단의 품격 있는 해령의 묵직함과 장중한 연주가 관객들에게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주기도 하였고, 민속악단의 신명 나는 풍물 연주와 깊이 있는 민속악단의 연주도 무용단의 정조를 끌어내는 동력으로 작동하였다. 무용단의 ‘사방신무’, ‘학연화대무’, ‘역신무’, ‘방상시무’, ‘처용무’, 십이지신무‘, ’진자무‘, ’향아무락‘는 궁중무용[정재]부터 민속무용, 창작무용까지 큰 범주의 안무 역량을 넘나든 구성과 함께 춤에 얹힌 복식의 화려한 장식으로 한층 아름다웠다. 복합공연으로서는 각각의 예술적 기량이 훌륭하였으나 하나의 작품을 그 이상의 진전을 기대했을 때는 아쉬움이 남았다. 작품이 진행되면서 다음 장면을 기대하는 기대심리를 갖는다거나, 작품의 고조를 통해 극도의 승화된 감정을 갖기에는 무리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원인은 작품의 대본이나 국립국악원 예술단체 간의 협력 체계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번 공연은 각 단체가 ’나례‘에 적합한 소재를 갖고 작업하여 한 무대에 올린 것에 머물렀다.
국립국악원은 앙상블 시스템을 갖춘 공연예술기관 중 하나이다. 따라서 공연 제작 기반에 관해서는 다른 기관에서 기대할 수 없는 풍부한 재원을 갖고 있다. 이러한 공적 기관에서는 다른 단체는 감히 하기 어려운 대작을 무대에 올려 국민의 문화 향수를 신장해야 한다. 국립국악원 존립의 근간이 전통예술에 있으나, 사회에서는 전통예술이 전승과 함께 지속 발전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회자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수용해야 전승과 발전은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려면 국립국악원은 1년에 한 번 정도 앙상블 시스템을 가동하여 예술성 높은 작품을 제작해야 한다. 국립국악원 내의 단체가 명확한 독자성을 유지하더라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각 단체의 예술적 역량을 작품 안에 녹여 개연성 있는 하나의 작품으로 거듭나야 한다. 지금과 같은 시스템에서는 공연은 전개상의 진행이 끊어진다. 갑작스레 하나의 동떨어진 장르가 이어지는 상황에 맞닥뜨려지게 된다. 옴니버스 구조의 연행도 필요하나, 총체적인 요소를 구성해야 하는 공연도 필요하다. 이러한 대형 프로젝트는 국립예술기관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을 전승할 뿐 아니라 계승해야 하는 소명 의식을 구성원 전체가 공감한다면 작품의 해석을 위해 작품상 단체의 위치는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전통예술의 근간을 지탱하는 국립국악원의 고독한 행보를 응원하지만, 국가의 대표적인 예술기관이기에 새로운 바램을 기대해본다.
글·김기화(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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