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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의 문화톡톡] 나를 둘러싼 ‘사물들(The Things)’에의 헌사
[김소영의 문화톡톡] 나를 둘러싼 ‘사물들(The Things)’에의 헌사
  • 김소영(문화평론가)
  • 승인 2024.01.15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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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비인간 

COVID-19 사태 이후 인간은 비인간적 존재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한낱 바이러스라는 ‘어떤 것’이 전 세계인의 일상을 뒤흔든 것이다. 어떤 것이라 명명한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아닌 비인간 존재(nonhuman-being)이기 때문이다. 비인간 존재라 함은 여러 종류를 포괄할 터인데,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유기체로서의 비인간인 식물과 동물이다. 다음으로 생명이 없는 비유기체인 사물들이다. 사이보그, AI, 디지털 휴먼, 복제인간 등은 기본적으로 사물로서의 비인간 존재이지만, SF영화가 보여주듯 향후 기술 발전에 따라 그 존재론적 위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 

어쨌든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사물을 포함한 비인간 존재들을 사유하려 한다. 그렇기에 이 글은 ‘사물들(The Things)’에 대한 일종의 헌사(獻詞)가 될 것이다. 사물들이라 하면 우선 도구를 떠올리게 된다. 애초부터 인간이 무언가를 만든 이유는 신체가 수행하는 역할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농경사회에서 밭을 갈기 위해 쟁기, 호미, 낫 등을 만들었듯,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기차와 같은 운송수단을 제작하였다. 전자의 경우에는 손, 후자의 경우에는 발의 기능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말대로, 인간의 신체가 확장된 것이다.

 

미디어는 인간 신체의 확장 Ⓒ 구글 이미지
미디어는 인간 신체의 확장 Ⓒ 구글 이미지

오늘날은 어떠한가? 현대인은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무언가를 집어 든다. 바로 스마트폰이다. 날씨가 어떤지, 새로운 뉴스가 무엇인지, 밤사이 도착한 메시지가 있는지, 조그만 기계 장치 하나를 들여다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뿐 아니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이메일을 확인하고, 여러 동영상을 보며 종착지를 기다린다. 온종일 지인들과 온라인으로 연락하는가 하면, 잠이 들 때까지 그것과 함께 생활한다. 불면증이 있는 경우, 밤새 잠을 청하는 음악을 틀어놓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스마트폰을 단순한 비인간적 사물로만 간주할 수 있는가? 누군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유튜브 재생 목록을 보라는 말도 있다. 그 작은 사물에 인간의 기억, 추억, 성향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미디어 통합(media integration)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스마트폰은 모든 미디어의 기능이 통합된 사물인 동시에, 나의 분신이기도 하다.

 

사물의 드러남

그렇다면 도구로서의 사물은 언제 인간의 시야에 포획되는가?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에 나오는 망치의 비유를 떠올려 보자. 인간이 아닌 사물의 존재 양태를 존재론의 범주에 포함한 하이데거의 철학이 인간과 사물의 동등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을 탐구해 온 이전의 철학과 달리, 사물의 존재 자체를 사유했다는 점에서 현대기술을 논할 시 자주 거론된다. 다시 망치로 돌아가자. 우리는 주로 못을 박을 때 망치를 찾는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망치는 인간의 시야 밖으로 물러나 있다.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또한 망치로 못을 박는 순간에도 그것의 존재를 사유하지 않는다. 만약 못을 박다가 부러지면, 그제서야 망치에 온통 주목하게 된다. 이처럼 도구로서의 사물은 사용되지 않을 경우나 사용되더라도 문제가 없으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기술 발전으로 등장한 스마트폰과 같은 사물은 어떠한가? 이것도 여전히 뒤로 물러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스마트폰은 분명 사물이다. 그러나 그 사물은 사용자와 독립적일 수 없다. 앞서 논했듯, 스마트폰이야말로 그 누구(인간)보다 늘 곁에서 나의 행동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체코의 매체철학자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의 말을 빌리면, “사물은 나의 조건이다”(빌렘 플루서, 김태희·김태한 역, 『사물과 비사물』, 필로소픽, 2023, 11쪽). 그는 인간의 조건(conditio humana)으로서 사물을 논하면서, 그 사물을 고찰할수록 불안해진다고 말한다. 주위의 사물들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 정황만 이루고 있으며, 스스로 움직이거나 움직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주위와 정황도 항상 변동하며, 언제나 새로운 조건이 생겨난다고 주장한다(빌렘 플루서, 같은 책, 13쪽).

나는 과연 사물로 인해 불안한가? 전통적으로 사물은 불안이 아닌 편리함을 제공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왜 플루서는 사물로 인한 불안을 말하는가? 플루서의 논의를 확장하여, 이를 이해하기 위한 사례로 인공지능 혹은 로봇을 들 수 있다. 우리의 정보는 모두 인터넷에 노출되어 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이른바 현대판 판옵티콘의 세계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 자꾸만 인간의 형상을 닮아가는 로봇의 출현 역시 불안하다. 물론 신체 기능이 저하된 이들에게 로봇이 대단히 유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로봇은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가? 신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닮게 만든 것처럼, 인간과 매우 흡사한 로봇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는 용어가 말해주듯, 이들은 오히려 인간에게 (섬뜩한)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영화 엑스 마키나(Ex Machina) (알렉스 가랜드, 2015) 인간을 빼닮은 로봇 Ⓒ 네이버 영화
영화 엑스 마키나(Ex Machina) (알렉스 가랜드, 2015) 인간을 빼닮은 로봇 Ⓒ 네이버 영화

 

사물과 행위자

사물에 대한 전통적 사유는 최근 들어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이라는 담론에 의해 전복되고 있다. 신유물론은 인간이 아닌 모든 사물에 행위성을 부여하고, 이들을 행위자(actor)로 명명한다. 사물이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으로 신유물론을 선도한 인물이다. 그가 스티브 울거(Steve Woolgar)와 함께 저술한 <실험실 생활(Laboratory Life: The Construction of Scientific Facts)>에서는 실험실 내의 장비가 인간의 실험에 미치는 영향을 파헤친다. 쉽게 말하면 실험실의 모든 환경과 장치가 실험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능동적 행위자라는 것이다. 

이외에도 흥미로운 신유물론으로는 제인 베넷((Jane Bennett)의 ‘생기적 유물론(Vital Materialism)’이나 캐런 바라드(Karen Barad)의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 등이 있다. 먼저 생기적 유물론이란 인간 중심의 행위자 개념을 버리고 비인간적 물질에 생기를 부여함으로써, 인간과 비인간을 모두 동등한 ‘행위소(actant)’로 바라보는 이론이다. 다음으로 행위적 실재론은 과학 지식의 생산 및 실천에 개입하는 여성주의 인식론적 문제에 관한 이론으로, 과학 실천은 기본적으로 기구 사용에 국한되지 않는 복수의 물질적-담론적 장치들의 내부적 상호작용, 즉 ‘인트라-액션(intra-action)’에 의해 이루어짐을 주장한다. 라투르, 베넷, 바라드 등, 그들이 강조하는 개념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신유물론이 사물의 주체적인 행위성을 강조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인간과 동등하게 행위하는 존재로 수용하기란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듯, 인간의 환경에 미치는 사물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만큼 사물 중심적이고 기술 의존적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는 신유물론의 쟁점을 온전히 수용하진 않더라도,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확장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기에 하이데거가 말한 사물을 향한 인간의 ‘배려(sorge)’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우리는 인간 간의 배려에만 집중해 왔다. 그러나 그 배려함은 인간이 아닌 모든 비인간 존재에게도 필요하다. 환경 파괴, 기후 온난화, 동식물의 변종 등, 지구 곳곳에서 속출하는 이변을 바라보노라면, 사물에 대한 인간의 배려함이 부족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세계에서 군림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겸손히 내려놓고, 사물을 행위자로 받아들여야 할 때이다. 

 

사물과 객체

사물에 대한 좀 더 급진적인 이론이 있다. 이는 사물을 행위자로 간주하는 신유물론을 넘어,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모두 객체로 바라보는 객체지향 존재론(Object Oriented Ontology, 이하 OOO)이다.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을 필두로 형성된 OOO는 인간을 주체로, 사물을 객체로 바라보는 신유물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모든 존재를 객체로 호명한다. OOO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유물론을 접할 때보다 사물에 대해 더욱 개방적이어야 한다. OOO는 인간과 상호작용하지 않는 사물의 양태까지도 주목하기 때문이다. 즉 뒤로 물러나 있는 사물의 존재 그 자체를 강조한다. 어느 날 문득 나의 시야에 들어온 하나의 사물. 그것이 생명을 지닌 유기체이건 아니건, 특정한 공간에 자리 잡은 그 사물은 나와 별개가 아니다. 아니, OOO가 주장하듯, 그것은 그 자체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나와 그 사물은 특정한 공간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때로는 그 사물의 존재함으로 인해 나의 존재함을 확인하며, 때로는 그 사물의 부재함으로 인해 불완전한 나의 존재함을 인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중요한 정보가 담긴 나의 USB나 스마트폰이 사라졌다고 해 보자. 누구나 한 번쯤 그 순간 엄습하는 불안감을 경험했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불안감이나 불편함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물들을 주의 깊게 다룬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일방적 태도이자, 그것을 객체로 바라보는 인간의 주체적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OOO가 주장하는바, 나와 사물이 모두 동등한 객체라면 그들을 배려해야 한다. 여기서 배려는 하이데거의 표현을 변주 혹은 확장한 것이지만, 사물은 사물 그 자체로 독립적인 객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로봇이나 복제인간은 어떠한가? 많은 SF영화에서 이들을 욕망의 수단인 사물로 간주한 인간에게 경고하듯, 그 결말은 암울할 수밖에 없다.

 

사물들의 공존에서 객체들의 공생으로

사물에 대한 급진적 사유인 신유물론과 OOO를 거쳐, 다시 세계 속 인간과 사물의 관계로 돌아오자. 스마트폰이 그러하듯, 지금 이 세계는 사물이 인간과 함께 존재하며 상호작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 자체로 드러나 있는 사물들을 우리의 삶 안으로 끌어안으며 배려할 때이다. 가시적인 꽃과 나무에는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것을 움트게 하는 비가시적인 햇살, 바람, 흙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다시 플루서의 말로 글을 맺으려 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내 주위의 사물은 나의 조건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조건은 매우 불만스럽다. 그 이유는 내가 나의 조건에 익숙해지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즉 그 조건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그 조건 안에서 내가 실은 나 자신을 전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내가 그 안의 어디에도 소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나는 자연에도 없고 문화에도 없으면서 양쪽 모두에게 끊임없이 불의를 저지른다.”(빌렘 플루서, 같은 책, 11-12쪽)

인간 조건으로서의 사물. 그럼에도 그 조건 속에서 나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그 안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못하는 불행을 피하려면, 플루서의 말대로 더 이상 사물들에 불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이는 파괴되어 가는 환경 혹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도 아니며, 인간과 사물들과의 공존(coexistence)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물을 포함한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 즉 ‘모든 객체들의 공생(symbiosis)’을 위함이다.

 

 

글‧김소영
문화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술연구교수 겸 서울사이버대 객원교수. 한국영화학회 국제학술상임이사. 현재 홍익대학교에서 <영화의 이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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