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동석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알게 모르게 늘 ‘법의 폭력’을 말해왔다. 발터 벤야민은 법의 폭력을 ‘신화적 폭력’(Mythische Gewalt)과 ‘신성한 폭력’(Göttliche Gewalt)으로 구분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따르고 지켜야 하는 법은 신화적 폭력에 의해 유지되며, 법의 질서를 넘어서 도덕적이거나 신적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성한 폭력이 필요하다. 말의 뉘앙스가 조금 이상하지만 ‘신성한 폭력’은 억압받는 자의 해방과 인간 존엄성의 회복을 추구한다.
마동석의 폭력은 법을 유지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경찰 캐릭터)에서 볼 때 신화적 폭력에 가깝지만, 법의 체계를 넘어서 자신만이 가진 정의로움을 통해 약자를 보호하려 한다는 점에서 보면(갱단 두목, 범죄자 신분에서 행하는 복수 또는 정의의 실현 등) 신성한 폭력에 가깝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경찰로 등장한다고 해도 관련 규정을 어겨가면서까지 범인을 잡는데 진심이라는 설정은 더욱 쉽게 그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게 한다. 한마디로 마동석은 신화적 폭력과 신성한 폭력, 그 사이에 놓인 캐릭터를 연기한다.
그러면 법 체계가 붕괴된 세상에서 그가 법의 폭력을 행사한다면 어떤 폭력에 기울게 될 것인가? 여기서 법체계의 붕괴는 사실상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종말적 재앙을 의미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종말적 재앙의 세계관이 <황야>의 남산(마동석) 캐릭터와 만났다는 것은 두 폭력의 관계에서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그의 캐릭터가 사실은 어디에 더 가깝게 다가서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먼저 종말적 재앙은 주류의 법체계를 무능력한 것으로 바꾸는데 자주 등장하는 설정이다. 예컨대 전염병의 창궐로 대다수 인간이 절멸한 상태에서 소수의 생존자가 맞이하는 세계는 법이 붕괴된 세상이다. 급격한 기후 변화 혹은 지각 변동 등으로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소수의 생존자가 맞이하는 세계 역시 법 체계가 붕괴된 바로 그런 세상이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기존 질서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파괴된 도시에서 불법주차 딱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결국 소수의 생존자들은 자기들만의 질서를 만들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원래는 당연했던 일들이 상벌의 기준이 되고, 아무렇지 않게 해왔던 일들이 공동체 전체를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이 아파트에서 쫓겨날 수 있는 범죄가 된다거나 (<콘크리트 유토피아>),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샤워하는 일이 공동체를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 된다는 식 (<황야>) 이 그것이다.
이런 질서, 법은 곧 창설적 폭력에 의해서 새롭게 수립된다. 그 이후에 가해지는 모든 폭력은 유지적 폭력이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세계관을 이루었다. 그 세계관을 이어받은 <황야> 역시 이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황야>에서의 남산은 종말적 재앙 이후에도 기존의 질서, 즉 물물교환의 질서를 그대로 이어간다. 본인의 능력으로 악어를 잡아 그 고기를 같은 공동체 사람들과 물물교환하는 모습이 영화 초반을 장식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황야>에서는 모두 창설적 폭력으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 후 이 법을 유지하려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반면(<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영탁(이병헌) / <황야>의 양기수(이희준)), 오히려 남산은 새로운 질서에 주목하기보다 기존의 질서, 소위 재앙 이전의 질서인 물물교환의 질서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를 위협하는 외부인들을 철저하게 응징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한수나(노정의)를 되찾아 오려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이를 단순하게 종합하면, 마동석이 연기한 남산 캐릭터는 이미 존재해 왔던 질서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신화적 폭력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종말론적 세계관이 이미 자리잡은 상태에서 신화적 폭력이 성립할 수 있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켜야 하고 따라야 하는 법 자체가 붕괴된 상태에서 신화적 폭력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 놓여 있는 <황야>에서 남산의 판단은 곧 법의 판단과 유사한 것이 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남산이 곧 법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폭력의 정당성은 남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더욱 살벌해진 <황야>에서의 남산의 폭력에 우리가 너그러운 이해를 표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법으로서의 남산과 그가 하면 뭐든 정당할 것이라는 식의 관념을 우리가 이미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마침 자연재앙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세상이어서 필연적으로 법의 질서를 넘어서는 도덕적 정의를 판단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누군가에 의한 독립적인 도덕적 판단만이 자리해야한다면 그 자리는 오로지 남산의 몫이어야 한다는 공감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기존의 법 질서를 넘어서 도덕적 정의를 실현한다는 차원에서 볼 때 이는 신화적 폭력보다 신성한 폭력에 더 가깝다. 그러면 잠정적인 결론을 이렇게 내놓을 수 있다. 마동석의 폭력은 신성한 폭력이 작동하는 것을 유사하게 옮겨 놓은 것으로써 법을 넘어서 마동석에 의해 발휘되는 폭력의 정당성이 우리에게 강하게 교감되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에 또 하나 덧붙일 수 있는 것은 마동석 캐릭터에는 신성한 폭력의 정의 구현, 즉 억압받는 자의 해방과 인간 존엄성 회복의 기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소녀를, 노약자를 그가 보호해야할 대상으로 등장시키는 전략과 그들을 위해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 이른바 유머러스한 대사와 태도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그런 의미에서의 신성한 폭력에 조금은 더 다가서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동석의 강력한 펀치가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준다며 쌍수 들고 환영했던 관객들은 사실 그의 펀치와 신성한 폭력의 정당성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감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어쩌면 마동석 캐릭터에 대한 나의 이런 판단은 그를 옹호하는 것을 넘어 그의 폭력을 미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마동석의 영화가 지속적으로 흥행에서 성공하고 있는 현상을 신성한 폭력을 바라보는 식으로라도 이해해 볼 수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마동석의 폭력이 신성한 폭력에 더 가깝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법 권위의 폭력적인 기반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은 물론, 여기에는 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의의 행사를 갈망하고 있다는 시그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눈감아 줄 수 있는 법 권위의 폭력성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음을 가리킨다. 마동석의 폭력은 우리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법의 한계를 그렇게 보여주고 있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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