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떠나간 자들의 소환
미국에서 2023년에 개봉한 셀린 송 감독의 첫 장편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가 제 96회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미 2023년 10월 제 28회 부산국제영화제 ‘코리안아메리칸 특별전-코리안 디아스포라’ 프로그램에서 상영되어 영화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다.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가 미국에서 작가 생활을 하고 있는 나영/Nora(나영의 미국 이름)와 그녀를 찾고 있었던 초등학교 친구 해성이 24년만에 뉴욕에서 재회하게 되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이 영화는 어린 시절 첫사랑이었던 남녀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재회하는 로맨스를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한국을 떠난 뒤 캐나다로,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며 그곳 일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이민자의 삶이 놓여 있다. 헤어진 지 12년 만에 해성과 실시간 영상 채팅으로 만나면서 친분을 쌓아가던 노라가 두 번 연속 이민한 자신에게는 미국에서 작가로서 안착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장면이나, 그녀가 작가들을 위한 창작 하우스에서 만난 미국 작가와 결혼한 일이 영주권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는 장면들을 통해서 관객들은 그러한 이민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뿐만이 아니라 이민자의 삶을 다룬 작품들이 최근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성진 감독의 <성난 사람들 BEEF> 역시 주인공 역을 맡은 스티븐 연이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상인 프라임타임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갈채를 받고 있다. 2018년 발간된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와 2021년에 개봉된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로부터 한국을 떠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과 영화가 미국과 한국에서 모두 관심과 공감을 얻고 있었던 터이다. 한국에서 2023년 6월에 개봉하여 700만이 넘는 관객 수를 기록한 피터 손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엘리멘탈 Elimental>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계 미국인 감독의 작품들로서 한국을 떠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을 통해서 미국과 한국에서 ‘디아스포라’가 다시 문화 예술의 전면에 소환되고 있는 것이다.
떠돌이, '쓰레기가 되는 삶'
이러한 디아스포라 작품들이 이동이나 이주 후의 정착이나 정주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주로 ‘노마드(nomad)’라는 개념을 통해서 설명되어온 작품들은 이동이나 이주 그 자체에 좀 더 좀 더 집중한 작품들이다. 물론 우리 시대의 노마드가 단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적시했듯이 시간/공간 압축으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의 지구화는 이동성이 양극화된 세계로서 여기에는 떠돌이와 여행자들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미 2000년대부터 우리의 문학과 미디어콘텐츠에서는 노마드로서 살아가는 떠돌이와 여행자의 존재가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오리배 세계시민연합’이라는 연합체가 있다. 일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가야 하지만 비행기표를 구할 돈이 없어서 오리배를 타고 세계를 떠도는 사람들이 만든 연합체이다. 오리배는 그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넣어 다니느라 부리가 큰 펠리컨으로 변해버린다. 2005년에 발간된 박민규의 소설집 『카스테라』에 실린 <아 하세요 펠리컨>에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수도권 변두리 유원지를 배경으로 200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양상을 제시한 작품이다. 작가는 수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의 시선으로 유원지의 사장과 유원지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다. 작품은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삶의 불안정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러한 불안정성을 야기하고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이동 혹은 이주이다. 유원지에서 오리배를 타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보트 피플’과 오리배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 세계를 떠도는 ‘오리배 세계시민연합’의 사람들은 모두 한 곳에 정착하여 안정적으로 삶을 꾸려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작가는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오리배’와 주머니처럼 생긴 커다란 부리를 가진 철새, 펠리컨의 표상을 통해서 글로벌화된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유동하는 ‘보트 피플’과 ‘오리배 세계시민연합’ 노동자들의 모습을 주조한다.
‘보트 피플’과 ‘오리배 세계시민연합’은 모두 현대 지구화가 양산한 ‘쓰레기가 되는 삶들 wasted lives’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쓰레기가 된 삶들’이란 “잉여의, 여분의 인간들로서 공인받거나 머물도록 허락받지 못한 인간으로서 현대화가 낳은 불가피한 산물이며 질서구축과 경제적 진보가 초래하는 피할 수 없는 부작용”이다. “일시성, 불확정성, 그리고 정주의 임시성”이라는 유동성 속에 놓여 있는 그들은 주로 (피)난민, 망명자이거나 이주노동자, 경제적 이주자이다. <아 하세요 펠리컨>에서처럼 그들의 이동은 사회경계적인 것에서 기인한 비자발적인 이동으로서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노동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세계를 떠돌아야 하고 최종적인 목적지가 영원히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이동은 일종의 표류”에 가까운 것이다. 그들은 이동과 이주를 한다는 점에서는 디아스포라와 겹쳐지지만 한 곳에 정착하기보다는 노동의 장소를 찾아 떠나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디아스포라와 구별된다. 네팔에서 온 불법체류노동자의 이야기를 그린 박범신의 <나마스테>(2005)나 탈북 난민의 이야기를 그린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2011)와 같은 장편소설이 이러한 삶을 조명한 작품들이다. 영화로는 취업난에 허덕여 외국인 노동자인 척 속이고 취업을 한 한국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외국인 노동자의 실상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육상효 감독의 영화 <방가?방가!>(2010)가 있다. 비록 베스트셀러나 천만관객 영화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작품들이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 대해서 보여준 성찰적 시선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행자, 노동에서 여행으로 여행에서 노동으로
한 편 지구화 시대의 유동하는 삶을 대표하는 또 다른 존재는 여행자이다. tvN의 <스페인하숙>(2019)은 순례길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를 통해서 순례길의 여행자를 조명한다. 자신의 나라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비자발적인 노마드가 된 경제적 이주자와 달리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여행자는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사실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경제적 이주자와 여행자는 ‘일과 노동’이라는 고리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경제적 이주자가 직업과 일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으로서 이동을 하는 반면, 여행자는 일과 노동에 지치고 소진된 이들이 반복적 일상과 일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여정으로서 이동을 한다. 즉 노동을 할 수 있는 일자리에 대한 탐색의 과정이 경제적 이주라면 일자리 혹은 노동으로부터의 일시적으로 때로는 장기적으로 이탈하는 과정이 여행인 것이다.
tvN의 <스페인하숙>(2019)이 주목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배우들 역시 어떤 측면에서는 산티아고 여행자이고 동시에 어떤 측면에서는 경제적 이주자와 같은 노동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자리가 경제적 이주자와 여행자 사이를 매개하여, 상반적인 것처럼 보이던 경제적 이주자와 여행자라는 존재가 서로 혼융된다. 유해진, 차승원, 배정남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성당을 방문하기도 하고 순례길을 산책하기도 하는 여행자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순례자에 포함되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아니 게스트하우스를 무대로 하숙집 주인을 연기하는 존재이다. 자신의 여행영상을 올려서 큰 관심을 받고 방송에 진출한 빠니보틀이나 곽튜브와 같은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에게도 여행은 단지 ‘유희적’적인 것이 아니라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한 노동의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콘텐츠의 원조격인 <꽃보다 여행>(2013~ ) 시리즈로부터 최근에 방영된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시리즈(2022~2023)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여행-노동’의 콘텐츠는 앞으로도 계속 제작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된 삶에 지쳐서 떠나고 싶어하고 여행자로서의 노마드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AI를 통한 스마트팩토리화, 로봇화가 진척될수록 일자리는 줄어들고 경쟁은 가속화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전 세계를 표류하는 경제적 이주자들의 숫자는 많아질 것이다. 일이 힘들어질수록, 주당 법정근무시간이 단축될수록, 주 4일제가 도입될수록, 일을 하는 자들은 여행자로의 변신을 통해 일시적 탈출을 감행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러나 우리는 여행이라는 일탈의 시간과 공간에서 치유받기를 원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 부재의 시간에 자신의 일자리가 사라질까봐 초조해하기도 할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여행의 시공간에서도 직장의 이메일을 확인하고 SNS에 여행지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듯한 모습을 올리며 자신의 건재함과 가치를 알리고자 노심초사하고 있다. job-seeker이든, job-holder이든, job-leaver이든 우리는 일자리의 연쇄고리를 따라 변신하면서 불안해할 것이다. 안정된 일자리가 사라지게 되면 여행자의 삶은 언제든지 ‘쓰레기가 되는 삶’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우만이 이야기한 여행자와 떠돌이는 이제 대극적인 존재가 아니다.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경제적 이주자이거나 일종의 (피)난민인 떠돌이와 일자리를 떠나 힐링하고 자신을 찾겠다는 여행자는 점점 더 교차하거나 혼융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모든 공간을 이동하고 모든 영역을 넘나들며, 노동과 여행의 세계에서 진동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듯하다. 떠돌이와 여행자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서 우리 삶의 여러 시기에 나타나는 두 가지 삶의 교차적 양상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접근이 필요한 때이다.
* 참고문헌
지그문트 바우만, 김동택 역, 『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 한길사, 2003.
지그문트 바우만, 정일준 역, 『쓰레기가 되는 삶들-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새물결, 2008.
글·구재진
세명대학교 영화웹툰애니메이션학과 교수, 문화평론가. 저서로 <한국문학의 탈식민과 디아스포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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