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깊은 숲속에서 길 잃기
칸과 아카데미에서 호명된 <드라이브 마이 카> 이후 하마구치 류스케의 행보에 대해 궁금해했던 사람들에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悪は存在しない, 이하 <악은..>)>는 다소 의외의 작품처럼 느껴질 것이다. 전작에서의 긴 러닝 타임을 걷어냈고 연극이라는 매체의 안팎을 넘나들며 극중극의 쏟아지던 대사들을 경유하던 것에 비해 훨씬 말수가 적어졌기 때문이다. 전작에서 주인공인 ‘가후쿠’의 좀처럼 밝히기 힘들어하는 내면에 대해 사려 깊은 접근을 통해 도달했다면 이 작품에서 주인공 ‘타쿠미’의 의중은 끝까지 알아차리기 힘들다. 이것은 <악은..>이 애초에 전작의 음악감독인 이시바시 에이코의 라이브 공연 영상을 만들려고 했던 것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지와 음향이 먼저 설정되고 이야기가 따라간 형태의 작업 작업 과정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타쿠미’는 어린 딸 ‘하나’와 함께 도쿄에서 두어 시간 거리인 미즈비키 마을에 살고 있다, 타쿠미와 마을 사람들은 자연의 깨끗한 물과 환경에 조화를 이루면서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도쿄로부터 한 회사가 등장해 마을에 글램핑장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세우며 공청회를 소집한다. 회사에서 파견한 ‘다카하시’와 ‘마유즈미’라는 남녀 직원은 글램핑장에 관한 긍정적 청사진으로 설득하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힌다.
전체적으로 현악기를 활용한 음향이 영화 내내 집요하게 등장하는 길고 긴 트래킹 쇼트와 함께 결합해 빈번하게 삽입되고, 종종 사건과 상관없이 하늘과 나무, 길, 숲 등에 카메라가 오래 머무르기 때문에 인물들의 감정을 세세히 헤아리기 어렵다. 특히 아내가 없는 타쿠미의 구체적인 사연과 내력은 거의 설명되지 않으며, 딸 하나 역시 가끔 아빠와 함께일 때를 제외하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친구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에서는 숲의 음영과 차가 지나오는 길에 남는 롱쇼트의 잔여 감정, 그리고 그 자리에 고인 시선이 지닌 리듬에 관한 것들이 문제시된다. 타쿠미의 과묵한 모습과 일상적인 노동의 현장을 천천히 현시하며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이 흘러가고 영화의 느린 호흡에 익숙해질 무렵, 약간의 서스펜스를 구성하는 것은 타쿠미가 건망증이 있어 종종 딸 하나의 하굣길에 데리러 가는 것을 잊는다는 점과 하나가 홀로 숲의 이곳저곳을 헤매는 장면들이 교차되는 장면이다.
영화의 초반부터 하늘을 가리며 뻗어있는 나무우듬지에서 틸트 되어 내려오는 시선이나 깊은 숲의 나무 그루터기들을 건너가는 인물들을 바라보는 트래킹 쇼트, 그리고 벌판을 따라 걷는 하나의 옆으로 호수의 얼음이 녹고 있는 시간적 흐름까지 자연의 모든 것이 느리고 고유해서 자족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완벽한 균형성이 지닌 탈속적인 모습은 저 먼 데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사슴 사냥의 총성이 상기하듯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타쿠미의 낭비 없이 완벽히 조율된 일상의 노동-도끼질, 물 긷기 등이 안온하게 이어질수록 자꾸만 새의 깃털을 찾아 숲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무구한 발걸음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깊은 숲속을 향해 인물들이 들어갈수록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침잠되어있던 비의가 되살아나고 이들은 길을 잃게 된다. 자연도, 인간도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연을 기반으로 한 자족적인 공동체란 도리어 배타적인 인본주의의 산물일 수도 있다. 숲이 무성하고 깊을수록 어두움도 짙어지는 것이다.
2. 야만과 구제가 불러오는 폭력과 오염
대도시, 속물성, 콘크리트 건물로 표상되어 여러 면에서 미즈비키 마을과 정반대인 도쿄의 연예 기획사는 자본주의적 술책의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를 급파한다. 이 마을의 자연환경과 숲 세를 활용해서 글램핑장을 만들겠다는 제안은 기만적인 것이다. 표면적으로 도시인들에게 ‘자연으로의 편안한 탈출’을 제공하겠다고 하고 있지만, 그 자체로 도시인들 맘대로 마을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계획이면서, 동시에 재정난에 시달리는 연예계 기획사로서 코로나 정부지원금을 타 먹겠다는 얄팍한 술수에 불과해 진정성도 갖추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그러니까 도시의 사정으로 미즈비키의 생태계를 활용하겠다는 선전포고에 불과한 것이다.
애나 칭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농장은 부를 모으기 위해 생태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 살아 있는 존재들을 끌어들이는데 이는 자본주의적 통제를 받지 않고 생산된 가치를 써먹는 것으로 ‘구제(salvage)’라고 부른다.(애나 로웬하웁트 칭, 『세계 끝의 버섯: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노고운 역, 현실문화연구, 2023, p.120) 그런데 ‘야만(savage)’과 구제는 종종 쌍둥이와 같으며, 구제는 폭력과 오염을 이윤으로 번역한다.(위의 책, p.124) 그러니까 자본주의적 술책은 인간 행위와 관련 없이 자연 자체에서 만들어진 가치인 ‘구제’(다른 의미로 ‘야만’)를 활용하여 이윤을 얻으려 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폭력과 오염을 통해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야생의 자연을 도시인들의 휴식을 위한 글램핑 공간으로 바꾼다는 계획은 침탈과 파괴를 전제로 하는 인간 본위의 사고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을 주민들이 글램핑의 평균 가동률, 정화조 위치와 수질 악화의 문제, 산불에 대한 관리 등을 묻는 것은 자연에서 얻는 유무형의 ‘구제’의 가치의 손상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을회장 스루가의 전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이 단순히 환경보전 문제가 아니라 상류에서 하류로 흐른다는 위치 이동의 문제라는 것, 즉 상류에서 하류로의 물질과 권력, 부와 오염의 이동의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책임 있는 자세와 의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인류세(Anthropocene)’에서 구분된 ‘쑬루세(Chthulucene)’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인간이라는 종 중심의 사고를 다른 세계에 대한 사고와 대결시켜 탈피할 것을 주장하고, 이때 비인간화된 존재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요컨대 인간중심 문명의 붕괴가 가져올 상황에 대한 대비로서 인간의 탈중심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옮김, 마농지, 2021, p.237]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른 종과의 다중 결합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해야 하면서도 반면에 윤리적 책임과 정치를 실행해야 할 양가적인 의무를 갖고 있다. 또 우리가 우리 외의 다른 실재들과 늘 우호적이거나 조화롭지 않으며 도리어 상호 파괴의 가능성으로서 공생은 상호 이득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위의 책, p.109) 즉, 인간 외의 개체와의 공생이란 필연적으로 인간으로서 우위에 있는 위치를 상실하고 때때로 자신의 파괴나 손해 역시도 허용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악은..>에서 성격화에 대한 판단이 유일하게 변화하게 되는 인물이 타카하시일 것이다. 초반부의 공청회에서는 회사 측의 충실한 대리인이자 행정주의적인 요식행위로서 마을 사람들을 대하던 그는 타쿠미와 마을의 자연에 감화받는다. 오랜 회사 생활과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연예계 기획사의 생리에 지쳐, 코로나로 우울증을 겪다 커플 매칭 앱에서 구혼 상대를 찾으려 하는 이 남자의 급작스러운 변화는 나름대로 진심인 것처럼 보이며, 미래에 대한 단순한 기쁨을 드러내어 이 잔잔하고 느린 템포의 영화에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타카하시는 마을과 자연에 대항한 악에서 선으로, 혹은 적대에서 선의로 쉽게 자리바꿈할 수 있을 것인가. 해러웨이의 설명대로라면 인간 외의 개체와의 공생을 위한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3. 마주침의 불안한 양태와 불확정성의 공포
<악은..>의 서사는 ‘붉은 청어’(red herring)의 전형적인 서사적 논법을 활용한다.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전경화와 탈 세속화에 대한 의도적 강조, 다소 괴상하지만 진중한 선의의 수호자이자 프로타고니스트로서 타쿠미가 지닌 성격화의 평면성, 회사의 메시저로서 속물성에 충실했다가 어느새 미즈비키 마을에 깊이 동화된 인물로 변모한 타카하시의 입체적 성격화 등 이 영화의 대부분의 러닝타임을 거의 아우르며 구축된 서사들은 결말부의 충격적 내용 앞에서 모두 서사적 트릭에 불과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관객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영화의 본의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의도는 성공적이다. 롱테이크의 트래킹 쇼트만이 영화의 끝까지 유일하게 관객들의 익숙함을 위반하지 않고 유지된다.
그렇다면 이 섬뜩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애나 칭은 바로 우리 것인 줄만 알았던 통제된 세계가 실패했을 때 통제받지 않는 버섯의 삶이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처럼, 별것 아닌 상품들로 거시사를 설명하게 될 때, 세계 경제는 역사적 국면에서 창발하는 형태, 즉‘ 마주침의 불확정한 양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고 설명한다. (애나 칭, 앞의 책, p.22-23) 또한 자본주의적 공급사슬의 구성요소는 회사든 생물종이든 간에 자기복제를 하는 교환 가능한 사물로 축소될 수 없는 대신에 그 사슬을 유지하는 ‘마주침의 역사’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위의 책, p.265)
요컨대 자본주의화 된 세계가 재화와 경제 논리의 완벽한 통제 속에 놓여 있는 듯 보이지만,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을 수 있는 돌연한 ‘마주침’의 순간들이 창발 되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놓인 삶의 ‘불확정성(indeterminacy)의 공포’(위의 책, p.222)와 ‘불안정성(precarity)’(위의 책, p.22)이 언제든 우리를 우리 앞에 놓인 질서와 통제 밖으로 던져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타쿠미는 사슴이 위험하지 않냐는 마유즈미와 타카하시의 질문에 “야생 사슴은 새끼를 보호하거나 다칠 때를 제외하고는 결코 공격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공격성을 발휘하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으면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결말에서 역으로 타쿠미에게 도전적으로 창발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느린 템포의 트래킹 쇼트와 롱 숏의 화면의 거리감을 지나 폭력과 오염에서 가장 벗어나 있는 인물로 구축한 주인공에게서 갑작스럽게 도출된 이 행위가 우리에게 주는 섬뜩함은 언제든 우리에게 틈입할 수 있는 ‘돌연한 마주침’에 우리가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불안정성’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냉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흥미롭게도, 극중 인물의 입을 빌어 미즈비키 마을의 내력에 대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이곳으로 이주한 농부들의 후손이라고 설명하는데, 마찬가지로 이 마을 역시 우연한 역사적 계기에 돌올하게 구성된 공동체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반어적인 제목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는 우리 생의 불확정성이 주는 공포가 자본주의의 논리와 개체의 고유성을 돌파해서 공생할 수 있는 것인가를 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이수향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영상물등급위원회 소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평론상 수상. 영화와 문학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며 대학에서 강의 중이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