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센셰이션하게 등장한 홍상수 감독은 한국 영화계의 그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자전적인 이야기 위에 포장된 특유의 말맛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은 홍상수는 탁월한 작가주의 감독이다. 2022년 개봉한 <탑>에선 건물의 층고를 이용해 인간의 불균질한 감정과 정의되지 않는 자아를 표상한다. 중년의 영화감독 병수(권해효)가 딸 정수(박미소)와 함께 진입한 여자(이혜영)의 4층짜리 건물은 공간이자 층마다 분화된 챕터 같은 형식이다. “혼자가 편해”라는 병수의 혼잣말은 아무도 듣지 않는 선언을 하면서도 다른 여자들(송선미, 조윤희)을 만나는 모순된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샐러드를 먹는 채식주의자에서 갑자기 육식 주의자가 되거나, 3층 천장에서 물이 새는 것이 4층 화장실에서 냄새가 올라오는 것으로 변주되는 이야기는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해 탁상공론한다. 이러한 장면에서 우리는 폭소를 감출 수 없다. 진지하지만 때로는 자기고백적인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홍상수의 <탑>은 후기작으로 분류되는 <인트로덕션>(2021), <당신의 얼굴 앞에서>(2021), <소설가의 영화>(2022)와 함께 본래의 결이 조금은 달라진 듯 보인다. <인트로덕션>의 아들과 아버지는 <탑>에서 딸과 아버지의 관계로 그 연속성을 띤다. 하지만 시기로 구분 지은 2010년대 중반, 홍상수 중기 작은 부모와 자식 관계보다는 타인과 나에 더 집중하는 것 같다.
<우리 선희>(2013)는 굳이 따지자면, 홍상수의 중기작 정도에 해당될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변주한다는 점과 선희(정유미)라는 캐릭터의 통통 튀는 매력이 영화의 분위기를 좌우하며 이는 홍상수의 인장과도 같은 모습이다. 영화는 외국의 대학원에 유학을 가서 영화를 전공하려는 선희가 영화과 교수인 최 교수(김상중)에게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하며 시작된다. 최 교수와 영화감독인 재학(정재영), 영화과 대학원생인 문수(이선균)는 모두 선희를 길 위에서 한 번씩 만나는데, 그들은 선희에게 조언이랍시고 자신의 속내를 끄집어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이들 역시 선희가 이야기하는 영화에 대한 고민을 하며, 아직까지 정의를 내리지 못한 동일선상에 놓인 영화하는 사람들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들 역시 선희에게 이렇다 저렇다 할 권리가 없다. 내부와 외부를 가로지르는 부조화는 관객에게 하여금 외부의 위치에 누가 놓이는지를 고민하도록 한다. 때문에 타이트한 클로즈업보다는 상황을 묘사하고자 하는 투 샷이나 풀샷은 주제를 의도적으로 부각한다.
문수가 첫 등장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그는 누군가 내려다보는 시선에 의해서 처음으로 등장을 허가받는다. 우리는 이전 장면이 선희가 홀로 치킨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으로, 단박에 문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선희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선희는 2층 높이의 치킨집 창문으로 신호등 앞에 서있는 문수를 부른다. 불특정한 대상의 부름에 문수는 영문을 모른 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이때, 카메라는 부르는 대상은 비추지 않고 과감하게 문수와 같은 위치에 놓인 보이지 않는 자로 설명한다. 선희의 존재는 다시 문수가 프레임 안으로 개입하면서 보이는 자의 위치를 되찾는다. 이런 식의 장면들은 뒤에서도 반복된다. 문수는 골목길 어귀에 서있다. “재학이 형”은 문수가 무턱대고 호명한 틈을 타서 프레임에 모습을 비춘다. <우리 선희>의 인물들은 타인의 요청에 의해서 프레임에 진입하게 되고, 그리 달갑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사실 그들은 무척 무례하다. 약속도 잡지 않고 갑자기 찾아가서 자신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말하거나, 같이 술을 먹자고 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응하는 타자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도 되는 상황임에도 홀린 듯이 치킨 집으로 들어서고, 술집으로 들어서면서 투덜거린다. 불균형한 관계는 초대를 한 쪽에서 자신의 분노로 쏟아내고는 가버리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문수의 부름에 하던 일이 중단된 재학은 나가기로 한 시간을 훌쩍 넘겨서 가게에 도착한다. 문수는 다짜고짜 선희를 만난 이야기를 꺼내는데, 재학에게는 일상의 평화로움을 깨뜨린 소음에 불과하다.
느닷없이 프레임에 침투하는 최은진의 1집 <풍각쟁이 은진> 中 <고향>은 일종의 형식이 되어, 아이러니한 상황을 극대화시킨다. “정들은 고향 길에서 순정에 어린 그대와 나는 언제나 변치말자고 손잡고 맹서했건만” 가사를 해체해 보면, 화자가 ‘과거’라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상기하며 그 시간이 회복되기를 염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인물들의 만남 종반부에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일까? 이는 관계가 이전과 같지 않으며, ‘우리’ 선희라는 단어가 지닌 통속적인 관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과연 ‘우리’라는 명칭은 누가 호명한 것일까? 앞서 말한, 무턱대고 타인의 자리에 찾아가 호명하는 사람들이 한 것일까.
영화의 후반부, 덕수궁에 모인 3명의 남자(최 교수, 재학, 문수)가 ‘우리’라는 틀을 만든 당사자들일 것이다. 최 교수에게 수정된 추천서를 받은 선희는 매끄럽게 포장된 글 안에 자신을 마주하고는 진짜인지 되묻는다. “소심하지만 용기 있는”이라고 선희를 수식하던 문장은 삭제되고, ‘우리 선희’는 사라진다. 최은진의 노래 <고향>이 반복되는 일정한 시기처럼 과거에 기억하던 선희라는 인물은 지나가버린 대상이다. 재해석된 선희의 모습은 문수가 선희에게 전화해 덕수궁으로 무턱대고 찾아오면서 그 실체를 확실시한다. 재학 역시 최 교수가 덕수궁에 있다는 말에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초대받지 못한 두 손님은 선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최 교수를 만난다. 원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선희는 자리를 피해야만 한다. 역으로 초대받지 못한 자들은 선희를 찾기에 급급하며, 심지어 당당하다.
홍상수 영화에서는 이러한 무례함은 폭소로 치환된다. 무례함에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느끼며 다른 공간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환기한다. 결국 그 자리에서 불편한 사람은 선희이며, 그녀는 덕수궁을 빠져나가고 만다. 마지막 장면 이전까지 선희에 대한 타인의 평가는 일관되었다. 보이지 않는 허상이자 잔상을 찾아 헤매는 남성들(최 교수, 재학, 문수)은 사라지고 없는 여성(선희)을 언어로 구체화한다.
자크 데리다는 차연(差延)이라는 개념을 통해 기원은 존재하나 부재하다고 말한다. 현존하지 않으며 대신에 흔적들만 남기에 기원의 도래는 흔적에 의해 무한히 연기되며, 기원은 해체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남성들의 언어로 재현되던 선희는 흔적만 남은 채 사라지며 해체된다. 카메라는 멀어지는 남성들이 선희에 대해 왈가왈부 떠드는 행위를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그저 멀리서 관조할 뿐이다. 그렇게 타자화 된 ‘우리’라는 명칭에 가두는 행위는 과거의 언어를 상징하며 고립되며 비로소 해체되는 것이다.
글·이하늘
영화평론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