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가장 거룩한 시간
바빌론 신화 ‘에누마 엘리시’에 따르면 최고의 신 마르둑은 혼돈의 신 티아맛과 전쟁을 치른다. 마침내 마르둑은 티아맛을 물리친 후 사체를 이용해서 하늘과 땅을 만들고 승전을 기념하여 에사길라(Esagila)를 건축한다. 그리고 신을 섬길 노예로 사람들을 창조한다. 바빌론은 해마다 에사길라에서 아키투 축제를 벌이며 위대한 마르둑을 기념하고 새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한다. 한편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첫 날 빛과 어둠을 시작으로 엿새 동안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만물을 창조한다. 하늘의 광명체와 땅의 각종 채소와 나무,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땅 위의 짐승을 종류대로, 그리고 여섯째 날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지으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신다. 일곱째 날 하느님은 모든 창조를 끝내고 신전을 세우는 대신 안식하신다. 바빌론 신화와 대조되는 지점이다. 히브리어 동사 ‘쉬다’(tb;v')에서 안식일(tB'v;)이 비롯되었다.
창조 이야기에 안식일이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창조를 마치고 하느님이 ‘일곱째 날’ 휴식하였다고 마무리 짓는다. 이 단락의 7중(septenary) 구조에 들어있는 정교한 설계와 7일째 신의 휴식이라는 결론에 눈이 간다. 특히 저자의 문학적 기교는 물론 안식이란 개념이 독특하다. 우선 7개 문단이 확연하고 곳곳에 숫자 7을 암시적으로 배치하여 씨줄 날줄처럼 엮어놓았다. 예컨대 첫 문단 창세기 1장 1절은 7 단어, 2절은 14 단어, 그리고 마지막 문단은 35 단어로 각각 7 낱말이 한 문장을 이루고 ‘일곱째 날’을 세 번 언급하며 안식일을 강조한다. 또한 하느님(~yhil{a/)이 35(7×5), 하늘(~yIm;v')과 땅(#r,a'h')이 21(7×3), 빛(rAa)과 날(~Ay)이 각각 7차례씩 나오는 등 숫자 7([b;v,)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7일 단위의 시간을 고안하여 일곱째 날을 그 정점에 놓은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수없이 만나는 시간은 육안(肉眼)으로 볼 수 없다. 현대인에게 시간은 일간, 주간, 월간 등으로 촘촘히 쪼개져 있지만 고대인에게 지금 이후는 예측할 수 없었다. 마치 민무늬토기처럼 어제와 오늘 사이에 어떠한 경계와 표식도 없다. 막연한 불안과 미지의 공포가 연속될 뿐이다. 그러나 삶의 경험과 지혜가 쌓이면서 자연의 순환을 깨닫고 계절의 반복을 감지한다. 히브리 신앙인들은 밋밋하고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 가운데 빗살 같은 일정한 무늬를 새긴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신석기인들은 토기에 빗살무늬를 그었으며, 히브리인들은 시간 속에 일곱을 새겨놓았을까?
공학은 빗살에서 내구성을 찾아내고, 인문학은 실용성을 발견하며, 종교학은 주술성을 찾는다. 말하자면 내구성이란 높은 온도에도 버티는 강도(剛度)이며, 실용성은 용기 안의 저장물을 구별할 수 있는 표식으로 보는 것이고, 주술성은 고대인의 안녕과 금기를 바라는 기호라는 뜻이다. 부분적으로 이해할만하고 그럴듯한 해석이다. 그러나 토기 표면의 빗살은 미학적 고안과 더불어 고대인들의 희구를 반영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즉 아무런 규칙이나 문양이 없는 태토(胎土) 위에 빗살을 그어 원초적인 불안을 극복하고 안정감을 얻기 위한 고안이란 뜻이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은 보이지 않고 잡을 수 없는 추상적인 시간에 일정한 규칙을 부여함으로써 문양을 새긴 것과 같은 효과를 꾀한 것이다. 예컨대 미지의 내일에 대하여 두려워 떠는 대신 안심하고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을 설계한 것이다. 그것은 시간에 규칙성을 부여하고 그 정점에 안식일을 둔 혁신적인 관념이었다.
이스라엘이 언제부터 안식일을 지켰는지 알 수 없다. 창세기 1-2장은 하느님의 우주 창조와 그 뒤 이어진 휴식을 언급하여 안식일이 마치 세상의 처음부터 기인한 것처럼 묘사된다. 안식일이라는 그들의 독특한 삶의 방식은 이방인들의 눈에 낯설게 비쳤다. 타키투스, 세네카 등은 이스라엘의 안식일 전통에 대하여 경멸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주일마다 하루 쉬는 게으른 민족이라며 조롱하고 비웃었다. 플루타크에 의하면 심지어 예루살렘 침략 중에도 안식일에는 유대인들의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On Superstition, 8:36). 이같은 사실은 이스라엘 내부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외경에 따르면 시리아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안식일 준수 때문에 유대인들은 무기를 들지 않았다(마카베오상 2:38). 기원후 1세기 유대계 역사가 요세푸스는 ‘일주일 중 하루를 공식적인 휴무로 지키는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안식일은 기원전 6세기 후반기부터 공동체의 규율로 인식되었다(느헤미야 13:19). 후에 탈무드는 안식일 준수를 위한 39가지 계명을 정교하게 다듬었으며(Shabboth 7:2) 예수 당시는 견고한 제도가 되었다. 만약 안식일을 어긴다면 죄인이라는 비난과 멸시를 겪어야 했다(마태복음 12:5). 유대교를 부분적으로 계승한 기독교는 321년 안식일 대신 다음 날을 공식적인 휴일로 정하고 ‘주님의 날,’ 곧 주일(Sunday)로 선포하였다.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주일 성수를 기치로 신앙생활의 출발로 삼았다. 점차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소수 민족의 안식일이 모든 인류에게 휴식의 권리 및 인간의 기본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현대인들에게 노동 못지않게 휴식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권리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휴식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사람은 쉬지 않고 일 할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니코마쿠스 윤리학』, X.6> 인간의 휴식을 신적 의무로 간주할 근거를 제공한 것은 분명히 창세기의 공헌이다. 그렇다면 창세기가 제안하는 안식이란 무엇일까?
안식일은 유대인들을 내부적으로 규합하고 정체성을 갖게 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으나 점차 교리로 굳어지면서 본래 정신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예수가 지적한 안식일 정신은 명료하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27). 예수는 안식일 교리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민중들을 해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적대자들은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며 비난하고 죽일 궁리를 서슴지 않았다(마태복음 12:14). 안식일 정신과 관련하여 또 한 인물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켜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켜왔다.” 아하드 하암(~['h' dx;a;)이라는 필명으로 불린 시온주의자의 정의다. 그의 안식일은 당일 하루 어떻게 준수하고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가 아니라 창조 정신에 부합한 해설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안식일 정신을 더 깊이 성찰하고 풀어낸 현자의 말을 들어보자.
20세기 유대인 현자로 알려진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이다. 그는 1951년 『안식』을 통하여 안식일의 본질적인 의미를 규명하였다. 헤셸은 에사길라의 궁전과 달리 안식일을 시간의 궁전, 곧 가장 거룩한 공간 지성소(至聖所)에 비견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이 기술문명을 앞세워 공간을 정복하였지만 정작 존재의 핵심은 시간에 있다고 갈파한다.
시간의 궁전에서는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획득이 아니라 나눔에, 지배가 아니라 분배에, 정복이 아니라 조화가 시간 속 삶의 목표다. 공간을 지배하고 공간의 사물을 획득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가 될 때 삶은 길을 잃을 것이다.
유대 사상에서 창조의 일곱 번째 날은 노동의 결과물을 소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이 점에서 아스리토텔레스의 휴식과 차이가 난다. 후자에서 휴식이란 새로운 활동을 ‘위한’ 멈춤이지만 전자에게 안식은 더 좋은 품질과 더 많은 생산을 위한 준비나 휴식이 아니다. 안식일은 생명의 날이며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다. 노동은 물론 멈춰야 하고 짐승과 나중에는 땅에도 휴식을 줘야 한다. 심지어 그 날 음식을 위한 노동조차 허용되지 않는다(출애굽기 16:22-26). 따라서 안식일은 6일 동안의 시간과 구별되며 일과 노동으로부터 자유롭다. 안식일은 창조의 마지막이자 완성이며 하늘과 땅을 지은 첫 번째 목적이 여기에 있다. 안식일은 시간의 지성소다. 안식일은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창세기의 안식은 태초부터 모든 인류에게 허락된 권리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사모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시간을 기다린다. 그날은 세상 모든 일과 유익을 멈추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 날이다. 마치 신석기인들이 민무늬 토기에 빗살을 그어 안정성을 희구하였듯 히브리 신앙은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에 안식일을 새겨 육체의 휴식과 함께 생명의 기쁨, 영적 위로를 맛보려고 하였다.
1) 성서의 숫자 7을 제발 완전수라고 부르지 말라. 수학에서 완전수란 6→1+2+3 = 6과 같이 자신을 뺀 약수를 더해 본래 수가 되는 양수로서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2) 김찬곤,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도서출판 뒤란: 2021) 615.; 마리야 김부타스, 『여신의 언어』 고혜경 올김 (서울: 한겨례출판, 2016) 3, 83.
3) 프랑스 제1공화국(1792-1804)은 일주일 단위가 아니라 10일마다 하루 휴무제를 시행하였지만 정착하지 못하였다.
4) 본명은 Asher Zvi Hirsch Ginsberg (1856–1927)이며 문화적 시온주의를 주창한 인물이다. 아하드 하암은 필명으로 ‘백성 중의 하나’를 뜻하며 성서에서 따온 이름이다(창 26:10).
5) 솔로몬 성전에서는 ‘내소’라고도 불리는데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holy of holies)로 오직 대제사장만 출입할 수 있다(열왕기상 6:16).
6) Abrahm Joshua Heschel, The Sabbath: Its Meaning for Modern Man (New York: MacMillan, 1951).
글·김창주
한신대 신학부 교수. 히브리 유산을 인문학으로 푸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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