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영화는 집단적 관객을 대상으로 상영된 스크린의 움직이는 이미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작금의 시대에는 자신이 애용하는 디지털 플랫폼 서비스를 통해 영화를 보는 경우가 일반화되었다. 이처럼 디지털 시대 OTT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필름, 스크린, 관객이라는 영화의 3요소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3요소 중 스크린은 영화관의 스크린을 의미했지만, 이제 스크린의 종류는 너무도 다양하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기 위해 여전히 영화관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적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공간으로서 영화관의 정체성은 여러 가지로 규정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흥미로운 두 학자의 관점을 빌려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먼저 프랑스의 영화기호학자 크리스티안 메츠(Christian Metz)는 영화관의 관객이 스크린을 바라보는 욕망을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해석한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설명한 상상계의 거울 단계(mirror stage)가 영화관의 스크린을 바라보는 행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는 거울 단계의 일차적 경험을 거친 제2의 거울 단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유아는 상상계의 거울 단계에서 자신의 불완전한 신체 이미지를 거울 속 이미지로 처음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신체가 완벽하다는 오인을 경험한다. 이러한 상상계의 거울 이미지를 실제의 이미지로 왜곡하는 주체는 성인이 되어 접하는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가상 혹은 환상의 기술 이미지를 실제의 이미지로 인식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제공하는 또 다른 정신분석학적 특성은 일종의 ‘관음증적 훔쳐보기’가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간이 몰래 누군가의 행위를 훔쳐보는 욕망을 지닌 존재인바, 어두운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향한 시선은 그러한 행위를 공적으로 허락받은 것이라는 해석이다. 물론 OTT를 통해서도 유사한 양상이 전개되지만, 영화관은 집단적 관객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훔쳐보기가 이루어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한편 체코의 매체철학자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에 의하면, 영화관은 중세 시대의 성스러운 종교 의식이 행해지는 교회나 성당의 공간적 특수성을 닮아 있다. 집단적 성도들이 보이지 않는 숭배의 대상을 믿으며 엄숙하게 제례를 행하는 행위가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행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관도 종교적 건축물처럼,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집단적 관객들이 가상의 기술 이미지들이 움직이는 스크린만 응시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영화관은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영화의 웅장한 시청각 이미지를 관람하는 것을 넘어서는 공간 그 이상의 특수성을 지닌다.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대중문화의 향유 방식을 통해 드러났다. OTT도 마찬가지다. 영화관의 공간적 특수성만큼 OTT의 스크린도 향유자의 주체적 행위가 능동적으로 이루어지는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관객, 소비자, 수용자 등으로 지칭되면서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호모 루덴스는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러한 행위의 주체적 수행성이 강화되고 있다. 디지털 기기를 선택하여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관람하기 혹은 보는 속도를 조절하기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처럼 OTT야말로 관객의 수행성이 능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술적 공간이다.
이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화관은 여전히 영화관으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단순히 영화를 관람하는 공간을 넘어,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영화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블록버스터 영화와 같은 거대 규모의 자본을 들여 만든 상업영화를 상영하는 멀티플렉스처럼 식당이나 카페, 상점 등의 여러 문화공간들이 공존하는 경우도 있지만, 영화관 자체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작은 영화관들도 고유한 특성을 지닌 문화공간으로서 그 정체성을 수립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미래의 영화관은 건축적인 관점에서 더욱 인문학적으로, 더욱 기술적으로 설계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화관은 가상의 기술 이미지를 상영하는 공간이지만, 그곳은 수많은 타자와 그들의 일상을 조우하기 위해, 우리의 발걸음을 내딛는 세계라는 거대 공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관이 그 어떤 기술적 공간보다 휴머니즘이 가득한 공간이며, 낯선 타자들(관객)과 함께 또 다른 가상의 타자를 스크린을 통해 집단적으로 만나는 이중적 공간임을 증명한다. 나는 왜 영화관을 가는가? 그리고 영화관을 어떠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영화관에서 어떠한 경험을 하기를 원하는가? 이는 상영되는 영화 그 자체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존립을 위한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글·김소영
문화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술연구교수 겸 서울사이버대 객원교수. 한국영화학회 국제학술상임이사. 현재 홍익대학교에서 <영화의 이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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