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에서 누가 이 페이지를 집필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도다.
- 보르헤스, 『보르헤스와 나』 중에서
1. 제임스 그레이와 <투 러버스>
1990년대 미국 영화계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에 태어난 신진 감독들(알렉산더 페인(Alexander Payne)(1961), 데이비드 핀처(David Fincher)(1962), 제임스 맨골드(James Mangold)(1963), 대런 애러노프스키(Darren Aronofsky)(1969), 웨스 앤더슨(Wes Anderson)(1969),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1970),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1971) 등)이 대거 등장한 풍요로운 시기였다. 제임스 그레이(James Gray)는 1969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슈케나즈 유대인(Aschkenasim)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USC 영화과 재학 중에 만들었던 12분짜리 단편 <카우보이와 천사들 Cowboy and Angels>(1991)이 프로듀서의 눈에 띄면서 1994년, <리틀 오데사 Little Odessa>로 데뷔하는 행운을 누렸다. 데이비드 그랜(David Grann)의 동명의 논픽션을 영화화한 <잃어버린 도시 Z The Lost City of Z>(2016)와 SF 장르인 <애드 아스트라 Ad Astra>(2019)를 제외한, <더 야드 The Yards>(2000), <위 오운 더 나잇 We Own the Night>(2007), 그리고 이 글에서 다룰 <투 러버스 Two Lovers>(2008), 이후에 제작된 <이민자 The Immigrant>(2013), <아마겟돈 타임 Armageddon Time>(2022)은 모두 첫 작품인 <리틀 오데사>처럼 뉴욕(주로 브라이튼)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레이는 미국 내보다 유럽에서 훨씬 더 주목받는 작가다. 특히 누벨바그의 거장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이 그의 데뷔작, <리틀 오데사>에 대해 했던 상찬으로 촉발된 프랑스 비평가들의 그레이에 대한 사랑은 특별하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을 진지하게 다룬 에세이와 논문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그를 ‘작가주의’라는 테두리로 묶을 만한 씨줄과 날줄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작가적 인장의 선명함은 부족하지만, 사건이 아닌 인물의 성격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제임스 그레이가 구축한 디제시스는 ‘고전적’이라고 할 만하다. 플롯이 고전적이라는 말은 무지에서 앎(anagnorisis)으로, 행복에서 불행으로 이행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모델’을 따른다는 뜻이다. 조던 루이미(Jordan Ruimy)는 그레이가 칸 영화제의 단골손님이 된 이유를 ‘고전주의’에서 찾는다. 물론 이러한 분석처럼, 제임스 그레이는 분명 21세기에 보기 드문 고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레이의 드라마투르기는 17세기 아카데미즘에 기반을 둔 프랑스의 (신)고전주의적 전통이나 20세기 전반기까지 번성했던 할리우드 고전주의(Classical Hollywood cinema)와는 궤를 달리한다. “프랑스 고전주의는 엄격한 3일치(시간, 장소, 행동), 희극과 비극의 엄격한 구분, 데코럼(decorum)이라고 불리는 성격 창조의 규칙을 준수한다. 당시의 극작가들은 특정한 시대, 장소 또는 개인적 특이성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예술의 목적은 인간성을 그리는 것인데, 고전주의자에게 ‘인간성’이란 모든 장소와 시대에 걸쳐서 불변하는 고유한 지배적 패턴이 있다는 믿음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레이의 고전주의는 형식과 장르에 관한 엄격성에서는 프랑스 고전주의의 원칙에 어긋나지만 ‘영원한 인간성’을 탐구하는 측면에서는 일정 부분 사상을 공유한다.
제임스 그레이의 <투 러버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펼친 비극의 원칙에 근거하여 드라마가 전개될 뿐만 아니라 수많은 텍스트가 교차하는 양피지(palimpseste)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양피지에는 다양한 문학 작품들, 오페라 및 영화적 요소들이 하이퍼-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다. 그레이를 21세기의 고전주의자라고 호명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크리스테바, 바흐친, 주네트의 이론으로 그를 해석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역으로 양피지에 주목하여 그를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규정한다면, <투 러버스>를 굳건하게 지탱하고 있는 오래된 드라마의 준칙들을 과소평가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의 드라마투르기 전략을 탐구하는 작업은 고전적 시학이 영화 플롯에 적용되는 양상, 이와 더불어 영화가 다른 예술 작품과 맺는 트랜스-텍스트성, 특히 그중에서도 하이퍼-텍스트적 관계를 조명해야만 가능한 영역이다. <투 러버스>의 하이포-텍스트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야』, 『백야』의 각색 영화들, 히치콕(Alfred Hitchcock), 펠리니(Federico Fellin)의 작품들, 피에트로 마스카니(Pietro Mascani)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와 같은 타 예술 장르 그리고 멀리는 소포클레스(Sophocles)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2. 『백야』와 경험담의 패치워크
어린 시절 형제들과 말을 섞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외톨이처럼 지냈던 도스토옙스키( Fyodor Dostoevsky)는 1846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가난한 사람들』로 등단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데뷔작으로 인해 ‘제2의 고골’이라는 찬사를 얻었지만, 이 작품을 통해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없다. 젊은 도스토옙스키의 내면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그가 2년 후에 선보인 『백야』다. 이 단편에 사로잡힌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은 약간의 각색을 거치긴 했지만,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들의 작품 이외에도 『백야』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는 공식적으로 9편이 더 존재한다. 도대체 『백야』에서 감독들은 무엇을 보았기에 이렇게 열광했던 것일까?
『백야』에는 네 사람이 등장한다. 그러나 『백야』는 여주인공 나스텐카를 희롱하려던 중년 남자와 마지막에 대사도 없이 잠시 스치듯 나오는 그녀의 정혼자를 제외하면, 화자인 ‘나’ 그리고 ‘나’와 대화를 주고받는 열일곱 살 소녀가 실제 등장인물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스무 명 가까운 인물이 등장해 독자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유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비하면, 너무나 단촐한 『백야』는 독자가 능동적으로 두 인물의 내면 여행에 동참해야 하므로 생각만큼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강가에서 울고 있는 나스텐카를 우연히 목격한 ‘나’는 그녀에게 말을 붙일 요량으로 뒤를 쫓는다. 도중에 나타난 술주정뱅이가 그녀를 희롱하려던 순간, ‘나’는 용기를 발휘해 그를 쫓아버리고 그녀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잡는다. 소설은 그들이 ‘백야’ 기간 나눈 나흘간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몽상가인 ‘나’는 생전 처음으로 꿈에 그리던 ‘진짜’ 여자와 말을 섞는다. ‘나’는 보자마자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라고 요구하면서 ‘나’와의 대화와 만남을 허락한다. 왜냐하면 나스텐카에겐 미래를 약속한 남자가 있고 그녀는 일 년 동안 그를 기다리는 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이야기의 무대인 페테르부르크에 이미 도착해있다. 그런데 이 무정한 정혼자는 어찌 된 일인지 그녀에게 곧바로 나타나지 않고 나흘을 보낸다. 그 시간 동안 나스텐카의 영혼은 삶과 죽음 사이를 시도 때도 없이 왕복한다. ‘나’는 운명의 장난처럼 나스텐카의 극단을 오가는 감정 여행의 동반자가 된다. 몽상가인 ‘나’는 밤이나 낮이나 그녀만을 생각한다. 사실 백야 기간 중엔 밤낮의 구분이 문제가 되지 않기에 ‘나’는 나흘을 온전히 몽상에만 바친다. 마지막 날, ‘나’는 그녀에게 전력을 다해 사랑을 고백한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우리가 젊었던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그런 밤이었다.
그 아름다운 밤에, 나스텐카는 온다고 약속한 남자가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깊은 슬픔에 사로잡혀 울고 있다. ‘나’는 고귀한 영혼을 담고 있는 그녀의 눈에 맺힌 이슬을 마주하는 순간 이 세상이 멈춘 듯하다. 나스텐카에게 한눈에 반한 ‘나’는 그녀를 위로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사랑의 열병에 사로잡힌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순간 극적으로 정혼자가 찾아오면서 나스텐카는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나’는 여태까지 위로하던 그녀가 떠나자 어느새 처지가 바뀌어 ‘그녀’의 아픔을 그대로 반복한다.
그레이는 <투 러버스>의 제작 동기에 관한 인터뷰 중에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의 시 ‘Le contre-chant’의 한 구절을 꺼내 들었다.
당신의 이미지가 나를 만나러 온 것은 헛된 일입니다.
그것은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여기서 나는 당신 모습만 비출 뿐
당신이 나를 향해 돌아선다고 해도 내 응시의 벽에서
당신은 꿈꾸던 그림자만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레이는 이 시의 주제를 사랑의 본질로 해석한다. 그가 소개한 시와 개인적인 일화는 사랑과 페티시(fetish)가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가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에게 단서를 제공해준다.
"아내를 처음 만났던 어느 파티를 기억해요. 그런데 아내가 당시와 같은 화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입었던 옷을 입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겁니다."
그레이는 사랑에 빠지는 때를, 욕망의 투사(投射)가 상대방에게 정확히 맞아떨어진 순간이며 이는 일종의 정신착란 상태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인터뷰 도중 아라공의 시를 빌려 “당신의 이미지가 나를 만나러 온 것은 헛된 일”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아라공은 왜 “내가 당신의 이미지를 만나러 온 것은 헛된 일”이라고 하지 않고 도치법을 선택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문장은 도치법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투사’를 맞이하러 그곳에 간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투사’에 딱 들어맞는 이미지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사랑에 빠진 자들은 이 상황을 운명이라고 여긴다. 그레이는 <투 러버스>에서 심리 투사 작용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자들이 만든 몽상과 관련된 ‘헛된 일’을 그리려 한다.
그레이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하늘이 정해준 인연 대신 물신(物神) 즉, 페티시만 존재한다. 『백야』의 주인공 ‘나’에게 나스텐카는 ‘눈물’, 갈색 머리란 뜻의 ‘브루넷(brunette)’ 그리고 ‘순백의 피부’라는 물신을 이루는 부속물들의 연접(conjunction)이며, 이 요소들이 몽타주 되어 나의 투사에 온전히 들어맞아 ‘사건’을 발생시킨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레이는 아슈케나즈 유대인이다. 아내가 임신한 후, 그레이는 유대인들에게 흔한 유전 질환인 테이-삭스병(Tay-Sachs disease) 검사를 받으러 갔다. 놀랍게도 자신은 잠재적 환자였고 아내는 음성이었기에 그들의 아이는 다행히 무사할 수 있었다. 그는 생후 일 년 이내에 실명하고 길어야 사춘기를 넘기지 못하는 이 불치병이 아이에게 유전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에 전전긍긍했던 기억을 추억의 서랍에서 꺼냈다. 그러므로 <투 러버스>를 축약하자면, 도스토옙스키의 『백야』를 하이포-텍스트로 삼고 자신의 경험과 새롭게 창조한 샌드라라는 인물을 배치해 드라마를 중층적으로 구성한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레너드(호아킨 피닉스)는 다리를 건너다가 배달해야 할 세탁물을 놔둔 채 갑자기 바닷가에 뛰어든다. 물에 빠진 그는 찰나의 순간에 떠나간 옛사랑을 떠올리고 그녀의 환영은 “레너드 사랑해. 하지만 난 떠나야 해”라고 속삭인다. 이 말을 상기한 레너드는 생을 마감하려는 마음을 접고 스스로 수면 위로 올라온다. 물에 잔뜩 젖은 레너드는 배달일도 잊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 그의 몰골을 보고 부모는 “저번에도 그랬듯이 또 그랬나 봐. 아침에 약 먹는 걸 깜빡한 게 아닐까?”라고 속삭인다. 이 대사를 통해 관객은 레너드가 습관적으로 자살 소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백야』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이 이야기를 더 두텁게 만들려고 했던 그레이는 자신의 경험담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또 다른 레너드’가 될 뻔한 샌드라(바네사 쇼)를 등장시킨다.
샌드라의 아버지 마이클과 레너드의 아버지 루벤은 둘 다 세탁소를 운영하는데, 서로의 이익을 위해 사업을 합치기로 한다. 유대인인 이들은 집안끼리 결속을 다지고 사업을 번창시키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식들의 결합을 바란다. 레너드의 집에 초대받은 샌드라는 어른들의 바람대로 그에게 호감을 보이며 가까워지려 한다. 레너드의 방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묘령의 여자 사진을 본 샌드라가 그에게 누군지 묻자, 레너드는 자신의 과거를 그녀와 관객을 향해 압축적으로 들려준다. 테이-삭스병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정혼자와 본의 아니게 헤어지게 되었다는 레너드의 말에 관객은 그의 자살 소동의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장면이 바뀌면, 레너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세탁물을 배달한다. 퇴근하는 그의 시야에 누군가와 말다툼을 벌이는 미셸(귀네스 펠트로)이 들어온다. 레너드는 불같이 화내는 아버지를 피할 수 있도록 그녀를 잠시 집에 머물게 한다.
3. 호퍼의 미장센과 히치콕의 인물들
닐 사이먼(Neil Simon)의 희곡 『브라이튼 해변의 추억』(1983)이나 로빈 쿡(Robin Cook)의 소설 『벡터』와 마찬가지로 <투 러버스> 역시 뉴욕의 브루클린 지역 브라이튼 해변이 주 무대다. 제임스 그레이가 유년 시절을 보낸 이곳은 슬라브계 이민자들, 그중에서도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면서 맨하튼에서 지하철로 1시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레이의 초·중기작은 이곳이 주요 무대였다. 마천루가 즐비한 뉴욕이 아닌, 사람들이 ‘거주’하는 ‘진짜 뉴욕’인 브라이튼은 테러와 범죄가 밥 먹듯이 일어나는 시내와 달리, 여느 미국 소도시와 다를 바 없다. 길을 가던 레너드는 며칠 전에 잠시 집안에 들였던 미셸을 거리에서 우연히 보고 따라간다. 그녀는 아마도 출근 중인 듯하다. 혹시 오해를 부를까 두려운 레너드는 짐짓 아닌 척 딴청을 피우며 브라이튼 해변 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의 작전은 성공을 거둬 둘은 자연스럽게 지하철에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점점 미셸에게 빠져드는 레너드. 미셸이 57번가에서 내린다고 말하자, 목적지 없는 여행을 하던 그는 산책을 핑계로 따라 내린다. 그런데 그곳에는 미셸을 기다리는 고급 승용차가 있다. 말 한마디라도 더 시켜볼 요량으로 미셸을 따라간 탓에 레너드는 샌드라 가족과의 점심 약속을 저버린다. 집으로 돌아온 레너드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샌드라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청한다. 그런데 샌드라와 전화하던 도중, 창문 너머로 미셸이 화장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미카엘라 카마로토(Micaela Camaroto)는 이 장면을 에드워드 호퍼의 《밤의 창 Night Windows》(1928)과 연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레너드가 창문을 통해 미셸을 염탐하는 장면은 관음증을 반영한다. 그림 속 익명의 여성은 자신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조명이 켜진 실내는 밤의 어둠 속에서 도드라져 그녀의 내밀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호퍼는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의 고립을 무대로 삼고 그레이는 그러한 종류의 외로움과 고립을 자신의 캐릭터에 부합하게 만든다.”
이때부터 영화는 『백야』의 여주인공 나스텐카의 변형태인 미셸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우리는 이제 앞서 언급한 아라공의 시구절 “나를 향해 눈을 돌리면 당신이 꿈꾸던 그림자만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라는 구절을 떠올려야 한다. ‘ㄱ’자로 꺾인 이 아파트의 구조상 레너드는 그녀를 볼 수 있지만, 미셸은 그를 볼 수 없다. 페티시는 볼 수 있는 자에게만 작동하기 때문에 그레이는 이 기묘한 구조의 건물을 떠올렸을 것이다. 히치콕의 <이창 Rear Window>(1954)의 오마주처럼 보이는 이 장면에서 레너드는 그녀를 훔쳐보며 이미지를 카메라에 담는다. 레너드가 가닿을 수 있는 것은 결국 그녀의 실체가 아닌 사진뿐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꿈꾸던 그림자만 발견할 수 있다.”라는 아라공의 시구절은 레너드를 향한 미셸의 들리지 않는 보이스 오프(voice off) 혹은 미셸을 경유한 그레이의 복화술이 된다. 그레이는 <이창>에서 미장센을 빌려왔지만, 그가 선택한 영화의 주제는 <현기증 Vertigo>(1958)에 더 가깝다. <현기증> 주인공 스카티는 매들린에게서 사랑의 이데아를 발견하고 그녀의 도플갱어(doppelgänger)인 주디를 시뮬라크르로 여긴다. 그래서 에릭 로메르(Éric Rohmer)는 <현기증>이 플라톤 철학에서 출발한 것이며 초월성의 시·공간을 가시화한 작품이라고 평한다. <현기증>의 주인공 스카티의 분노는 ‘원본’이라고 여긴 매들린이 ‘복제본’ 즉 시뮬라크르인 주디와 어떤 ‘차이’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창>과 <현기증>이라는 두 개의 하이포-텍스트에서 태어난 레너드. <이창>의 제프리는 카메라로 몰래 이웃을 염탐하지만, 그가 포착한 것은 관음증의 대상일 뿐, 사랑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레너드는 <현기증>의 스카티처럼 페티시를 절대적 사랑의 척도로 오해하여 불행에 빠진다. 그레이는 레너드라는 캐릭터를 제프리에서 착안하여 스카티로 끝낸다. 그러므로 레너드의 멜랑콜리는 <현기증>의 스카티가 그랬듯 원본에 집착했지만, 그 원본이 시뮬라크르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 발생한다. 히치콕은 스카티의 깨달음 뒤에 죽음을 배치하고, 그레이는 ‘고전주의자’답게 레너드의 자각을 그가 다시 삶을 재건할 수 있도록 아나그노리시스(앎)로 연결한다.
4.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원초적 장면
그레이는 『백야』에서 ‘나’와 나스텐카가 대화를 나누던 골목길 어귀를 브라이튼 해변에 자리한 낡은 아파트로 전환한다. 미셸은 브라이튼 해변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 위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아파트 옥상으로 레너드를 불러낸다. 그리고 나스텐카가 ‘나’에게 그랬듯, 그녀는 레너드에게 자신의 사연을 들려준다. 미셸의 에피소드에서 나스텐카가 기다리던 정혼자는 현대적인 감각에 맞게 조금 더 비극적인 변형을 거쳐서 선보인다. 미셸의 남자는 애 딸린 유부남이며 그녀는 몰락한 집안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소녀 가장’이다. 미셸의 애인 로널드는 일 년 동안 나스텐카를 기다리게 했던 정혼자의 달리, 그녀에게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한다. 미셸은 ‘친구’인 레너드에게 로널드의 됨됨이를 평가해달라고 청한다. 편지 심부름꾼을 자청하면서 나스텐카의 정혼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려 했던 『백야』의 ‘나’의 현대적 판본인 레너드는 이렇게 자신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로널드는 재력과 매력 그리고 카리스마를 겸비하고 있으며 미셸을 진심으로 아끼는 듯 보인다. 레너드는 도저히 그를 대적할 수 없다. 게다가 그는 ‘오페라’를 이해하는 교양인이기도 하다. 로널드는 풋내기 레너드를 자신의 연적으로 여기지도 않지만, 일말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결정타를 날린다.
"레너드, 자네를 보면 우리 아들이 생각나."
이 어처구니없는 로널드의 대사로 인해 이야기는 일순간 도스토옙스키의 변주에서 ‘소포클레스’로 넘어간다. 의사(疑似) 아버지를 자처하는 로널드는 테바이의 ‘라이오스 왕’으로, 레너드가 연심을 품고 있는 미셸은 ‘이오카스테’가 되어버린 이 사태 속에서 가련한 레너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 ‘왕과 왕비’는 ‘오이디푸스’인 레너드를 남겨둔 채 마스카니의 오페라를 보러 간다. 레너드는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오페라 대신 오페라 아리아가 수록된 시디를 사서 그들이 들었을 법한 음악을 텅 빈 집안 곳곳에 울려 퍼지게 한다.
그레이가 오페라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그는 2019년 레아 앙드레-사로(Léa André-Sarreau)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10살 때, 가족들과 오페라 〔아이다 Aïda〕를 보러 갔어요. 진짜 코끼리가 무대에 등장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때는 크게 실망했죠. 이듬해에는 〔유진 오네긴 Eugène Onéguine〕을 봤어요. 그때 저의 영혼을 사로잡은 멜로디가 기억납니다…. 호아킨 피닉스가 맡았던 <투 러버스>의 레너드는 모차르트 오페라의 주인공과 닮았어요. 그는 피가로처럼 어리석고 유치한 계획을 세우죠.” 그레이의 오페라 사랑으로 인해 탄생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Cavalleria rusticana〕 에피소드는 극 중에서 직접 묘사되지는 않지만, 그레이는 그 내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도록 오페라 아리아와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두 작품의 연관성을 구체화한다.
군대를 갓 제대한 투리두는 애인 롤라가 알피오란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괴로워하다가 자신을 위로해주는 산투차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투리두는 롤라가 유혹해오자 옛 추억을 이기지 못해 불장난에 빠진다. 두 사람 사이를 눈치챈 산투차는 아무리 간청해도 투리두의 마음을 되돌릴 길이 없자, 롤라의 남편 알피오에게 두 사람 사이를 폭로한다. 투리두와 알 피오는 술을 마시다가 서로를 모욕하게 되고 마침내 결투를 벌여, 투리두가 죽고 만다.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알피오가 일하러 간 사이, 롤라와 밤을 지새운 투리두가 새벽어둠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오프닝에서 그 유명한 ‘O Lola ch’ai di latti la cammisa(우윳빛 셔츠처럼 하얀 롤라)’라 들린다. 눈치 빠른 관객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주인공 투리두와 롤라를 레너드와 미셸로 환치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레너드의 집 안 가득 퍼지는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의 ‘우윳빛 셔츠처럼 하얀 롤라’는 두 작품을 잇는 가교로 기능한다. 하지만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투리두와 달리, <투 러버스>의 레너드는 실연의 아픔을 삭이는 중이다. 그는 아버지를 자처한 로널드로 인해 미셸에게 향하는 마음을 강제로 닫아야 했고 오페라 관람에도 소외된 채, 이를 재현한 음반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중이다. 이 장면은 헛웃음이 나오는 블랙코미디로 여길 수 있지만 혹자에 따라서는 가장 가슴 아린 장면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근친상간의 범죄를 저지를 수 없었던 브라이튼의 오이디푸스, 레너드는 원초적 장면(Primal Scene)이라고 할 수 있는 부모의 정사(오페라 관람)를 엿볼 수 없기에 시각을 차단한 채, 청각으로만 그들이 유희를 상상한다.
이 순간 ‘우윳빛 하얀 미셸’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레너드 앞에 반대 방향에서 그를 향한 욕망의 투사 게임을 벌이고 있던 샌드라가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그녀는 레너드가 왜 ‘우윳빛 셔츠처럼 하얀 롤라’를 듣는지 알 길이 없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레너드는 지금 당하고 있는 자신의 고통을 그녀에게 복습시킬 만큼 파렴치한이 아니다. 그래서 레너드는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이한다. 하지만 눈치 빠른 샌드라는 멜랑콜리에 젖은 레너드를 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나더러 집에 와달라고 말한 건 아니죠?"
레너드는 일단 잡아떼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의 연기는 어설프다. 샌드라는 레너드의 태도가 사회적인 응대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간파한다. 실망한 샌드라는 이윽고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든다.
"저한테 이제 전화 안 하셔도 돼요. 저 좋다는 남자 많아요."
샌드라의 이 대사는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에게 쓸 수 있는 최선의 카드다. 절절한 사랑 고백보다 더 아프게 다가온 샌드라의 넋두리에 레너드는 순간 마음이 녹아내려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그녀에게 키스한다. 우리는 레너드를 의심해선 안 된다. 그는 아주 잠시 정신착란 상태에서 돌아온 것이며 자신의 처지를 샌드라에게 반복시킬 수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휴머니즘을 발휘한 것이다. 그의 유일한 죄는 휴머니즘과 사랑을 동일시한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레너드의 사랑을 확인한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할 파티에 그를 초대한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런데 레너드의 시선은 그 순간에도 미셸의 모습이 어른거렸던 창가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때 절묘하게도 그녀에게서 전화가 온다. 다시금 찬 바람이 불어오는 옥상에서 두 사람이 만난다. 이곳에서 미셸은 레너드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다.
"레너드 제 말 잘 들어요. 당신이 날 잘 알게 된다면 마음이 달라질 거예요."
"당신은 오빠 같아요. 좋은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어요."
미셸의 ‘오빠 타령’에 실망한 레너드는 다시는 얼굴을 보지 말자고 외치며 절교를 선언한다. 마음을 정리한 레너드는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샌드라에게 정착하려 한다. 그레이는 이 장면을 레너드가 취미로 찍은 사진 몇 장을 이어 붙인 몽타주로 간결하게 표현한다. 사진 속에 레너드와 샌드라는 여느 연인들처럼 행복하다. 이어서 영화는 ‘중요한’ 성인식으로 건너뛴다.
5. 진정한 바르 미츠바를 통한 깨달음
유대인 소년들은 13세가 되면 바르 미츠바(Bar Mitzvah)라는 성인식을 치른다. 사실 이 성인식 시퀀스는 극 전개와 크게 관련이 없다. 흥겨운 성인식이 등장한 유일한 이유는 행사 끄트머리에 레너드의 휴대폰으로 걸려 온 전화 때문이다. 이 전화 한 통이 레너드의 일상을 다시 뒤흔든다. 전화를 건 미셸의 목소리는 힘이 없다. 위기의 순간에 그녀의 남자, 로널드는 가족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녀가 유일하게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은 ‘오빠’ 레너드뿐이다. 레너드는 결국 그녀에게 달려간다. 임신한 줄도 몰랐던 미셸은 유산하면서 소파 수술을 받게 되고, 레너드는 ‘엉망진창’이 된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준다. 연민을 자아내는 미셸을 두고 떠날 수 없던 레너드는 그녀를 침대에 누이고 다정한 말로 그녀를 안심시킨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곧바로 애인 로널드가 들이닥친다. 로널드가 이 상황을 보길 원치 않을 것이란 그녀의 말에 레너드는 문 뒤에 숨는다. 방으로 들어온 로널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변명과 함께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많은 말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미셸은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로널드에게 진심으로 화가 났으므로 그에게 사라질 것을 종용한다. 문 뒤의 레너드는 본의 아니게 의사(疑似) 부모의 ‘원초적 장면’을 지켜보게 된다. 주인공을 바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진행되는 동안 레너드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로널드가 사라진 사실을 확인한 미셸은 레너드에게 자신이 잠들 동안 머물러 달라고 청한다. 이 가련하지만, 사랑의 권력관계에서 확실하게 우위를 점한 여인은 염치없게도 ‘오빠’ 레너드에게 ‘희한한 부탁’을 한다.
"어렸을 적, 할머니는 제가 잠을 이루지 못하면 제 팔에 글씨를 써줬어요."
다시 몽상가로 돌변한 이 미욱한 남자는 그녀의 팔뚝에 천천히 글씨를 쓴다. ‘L O V E’ 그러나 무심한 그녀는 이 남자가 이토록 애절한 사랑 고백을 하는지도 모른 채 수마에 빠져든다. 연말을 맞이하여 레너드와 샌드라는 남들처럼 ‘데이트’를 한다. 맨손으로 일하는 레너드가 안쓰러웠던 샌드라는 그에게 가죽 장갑을 선물한다. 그런데 이 남자의 태도가 이상하다. 오늘따라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있는 것 같다. 그녀가 이유를 묻자, 레너드는 친구 때문에 그렇다고 핑계를 댄다. 안도한 그녀는 레너드의 손을 만진다. 그 순간 레너드가 지난 시절 벌인 자살 소동의 흔적이 팔목에 드러난다. 민망해진 그는 “빌어먹을 상처, 정말 보기 싫어!”라고 자기혐오를 드러낸다. 연민의 감정이 밀려온 샌드라는 진심으로 그를 보듬으려 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과 다르잖아요. 괜히 그러지 않은 척 가장 하지 말아요.
레너드, 난 당신을 돌봐줄 거예요(I’ll take care of you)."
샌드라가 제아무리 자신을 위로하려 해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레너드의 머릿속엔 온통 미셸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며칠이 지나고 그에게 선택의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 이야기는 두 축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집에 찾아온 샌드라의 아버지는 사업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집안을 어슬렁거리는 레너드에게 내일 사무실로 와달라고 말한다. 아무래도 합병한 사업을 그에게 맞길 요량인 듯하다. 이윽고 미셸에게 연락이 와서 두 사람은 또다시 아파트 옥상에서 만난다. 미셸은 로널드와 헤어졌다면서 머리를 식힐 겸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겠다고 말한다. 그녀를 붙잡을 것인가? 아니면 샌드라와의 평온한 일상을 살아갈 것인가? 이 두 갈래 길에서 레너드는 몽상가답게 ‘드라마’를 선택한다. 레너드는 ‘오빠’가 아닌 ‘연인’이 되기 위해 미셸에게 자신의 불꽃 같은 마음을 고백한다.
"미셸, 당신의 실체를 알면 사랑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나는 당신을 잘 알아요. 나도 당신처럼 엉망진창인걸요. 난 당신을 절대 떠나지 않아요. 로널드는 당신을 떠났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난 당신을 돌봐줄 거예요(I’ll take care of you)."
눈물과 욕정이 뒤범벅된 키스를 나눈 그들에겐 이제 사랑의 도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미셸이 그를 사로잡은 이유, 즉 그가 벌인 욕망의 투사가 미셸이라는 대상에게 정확히 맞아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백야』의 ‘나’를 사로잡았던 페티시가 ‘눈물’, ‘브루넷’, ‘순백의 피부’였다면, <투 러버스>의 레너드를 사로잡은 것은 <이창>에서 제프리가 그랬던 것처럼, 창문 너머로 보이는 희미한 그림자이며, <현기증>의 스카티가 그랬던 것처럼, 외형을 감싸고 도는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미셸 역을 맡은 배우, 귀네스 펠트로(Gwyneth Kate Paltrow)의 ‘금발’, ‘귀족적 이미지’, ‘창백한 얼굴’은 레너드를 사로잡는 페티시가 된다. 그리고 이 페티시는 가질 수 없음(untouchable), 엉망진창(mess), 퇴폐(décadence)라는 단어와 연결되면서 레너드의 욕망을 더욱 자극한다. 프로이트는 “페티시가 발동하는 원인으로 성 대상에 매겨진 신체적 가치가 심리적인 측면으로까지 확장되어 나타나며 그로 인해 페티시에 탐닉하는 인간은 말 그대로 얼이 빠져 상대방의 판단에 맹목적으로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맹목적인 사랑은 권위의 중요한 원천이 된다.”라고 주장한다.
성적 관계에서 우위에 선 ‘권력자’ 미셸은 자신이 친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완벽히 제압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 그를 창가로 불러낸다. 그리고 가슴을 보이며 자신을 향한 그의 페티시가 깨지지 않도록 꽉 잡는다. 미셸에게 사로잡힌 레너드는 그녀와 샌프란시스코로 도망가기 위해 비행기표를 예약한다. 그리고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으로 청혼 반지를 장만한다. 미셸과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그는 점점 초조해진다. 그는 소년들이 탈출할 때, 으레 그런 것처럼 여행 가방을 창문 밖으로 던져놓고 태연하게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엘리베이터에서 샌드라 가족이 새해맞이 파티를 위해 집을 방문한다. 그는 계단으로 숨어 그들을 피한다. 낌새를 알아차린 엄마가 레너드 앞에 나타난다. 엄마는 자식이 또다시 위험한 선택을 할까 두려워 그를 고이 보내준다. 하지만 기다리던 그녀가 오지 않자, 레너드는 또다시 불안에 휩싸인다. 레너드는 자동 응답기에 약속을 상기시키는 음성을 남긴다. 그래도 연락이 없자, 그는 미셸의 모습이 자주 비치던 창문을 향해 작은 돌을 던져본다. 그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드디어 미셸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저는 안 가요. 유산한 사실을 말했더니 로널드가 가족을 떠나겠다고 부인에게 말했어요. 로널드만 아니었다면 당신과 함께 잘해보려 했는데…."
새해맞이를 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레너드는 혼자서 브라이튼 해변을 걷는다. 드디어 미몽에서 깨어난 그는 품에서 반지가 들어있는 작은 상자를 꺼내 멀리 모래사장에 던져버린다. 그리고 바닷가로 다가가 차가운 물에 발을 적신다. 그는 또다시 죽으려고 하는 것인가?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 주머니에서 손을 빼다가 레너드는 장갑 한 짝을 떨어뜨린다. 그동안 그는 샌드라가 준 장갑을 끼지도 않았고 그 존재조차 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준 장갑이 떨어져 바닷물에 뒹굴고 있다. 이 너무나도 기본적인 상징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 내리는 이 밤에 저 멀리 보이는 저 그림자
날 울리고 가네. 누가 나를 울렸나 이 늦은 밤길에서
남아 있는 건 저 가로등과 작은 나의 모습뿐. 흘러내리는
이 눈물에 담겨 있는 그때 그 사연 가슴 깊이 새겨 놓은 그 맹세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데. 내 주머니에 있는
‘노란 너의 리본에 묻어 있는 너의 머리칼’ 나를 더 슬프게 해
아마도 김범룡의 ‘내 주머니 속의 사연’의 주인공도 ‘노란 리본에 묻어 있는 머리칼’ 때문에 다시 그녀에게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레너드는 위 노래 주인공의 페티시인 ‘머리칼이 묻어있는 노란 리본’ 대신, 물에 젖은 장갑을 줍는다. 그리고 모래사장을 뒤져 반지 상자를 챙긴다. 몽상에서 깨어난 그는 이제 집으로 향한다. 미셸에게 주려고 했던 반지는 그네들이 좋아하는 서프라이즈 선물이자 샌드라를 위한 청혼 반지가 될 것이다. 마치 오래 준비한 것처럼, 반지를 건네면서 레너드가 운다. 그의 피앙세 샌드라가 “당신 울어요?”라고 묻자, 그는 “응 너무 행복해서 울어요.”라고 답한다. 레너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동한 그녀 역시 레너드를 따라서 운다.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레너드가 치른 유대인들의 성인식, ‘바르 미츠바’가 마무리된다.
* 이 글은 필자가 쓴 「<투 러버스 Two Lovers>, 고전주의와 하이퍼-텍스트의 절합」(『현대영화연구』 51호, 2024)의 일부 내용을 가져와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