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자기객관화
<범죄도시 4>에서 형사 마석도가 용병 백창기(김무열)를 처리하는 피니시 기술은 니킥이다. 신기했다. 주먹이 아니라 다리라니! 그 이유는 배우 마동석의 몸이 이미 많이 망가져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알려진 대로 그의 무릎은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그간 마동석은 무릎, 척추, 어깨 등 몸 곳곳에 부상을 입고 재활을 하고, 재차 다치면 또 회복해왔다. 이 때문인지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마석도의 다리 가동 범위를 줄이고 상체를 활용한 복싱 액션의 비중을 늘려온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1편에서 종종 추격전을 벌였던 마석도는 3편에선 다채로운 복싱 콤비네이션으로 범죄자들을 상대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4편에선 지금껏 주먹 하나만 믿고 온 마석도가 무려 특수부대 출신 용병을 무릎 타격으로 끝장냈다. 이 액션 디자인이 내게는 정확한 자가 진단을 통해 대중의 기대감을 역이용한 영리한 접근으로 보였다. ‘설마 그 아픈 무릎을 사용할까’ 싶은 심리를 정확히 뒤집은 셈이다.
그러니까 마동석은 자신에 대한 정확한 자기객관화를 바탕으로 한계를 돌파하거나 수용한다. 어떻게 보면 약점마저도 유리한 국면으로 끌고 가 전환하는 전략이 돋보인다. 이처럼 촘촘한 설계로 빚어낸 마동석의 <범죄도시> 시리즈는 4편 역시 천만을 돌파하며, 최근 몇 년 새 한국 영화계의 독보적인 승리자이자 개척자가 됐다. 씨네21도 마동석 특집호를 발간했다. 제작자이자 배우인 만능 영화인 마동석의 행보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마석도 대신 마동석에 가까워지는
이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면, 거듭 확장되는 <범죄도시> 시리즈를 통해 대중들이 ‘마석도’보다는 ‘마동석’에 더 가까워진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와 소통하는 존재는, 마석도가 아니라 마석도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마동석 그 자체다. 다른 출연작을 유심히 살펴봐도 그가 맡은 배역은 언제나 마동석이라는 존재 뒤로 밀려난다. 우리가 지금껏 박웅철(<나쁜 녀석들>), 장동수(<악인전>), 성주신(<신과함께> 시리즈) 등을 대할 때 그 캐릭터를 마동석이 다루는 방식에만 신경 썼지, 해당 세계관 속에서 그들이 존재감 내지는 생명력을 얻거나 잃는 자세한 경위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2004년 마석도 형사가 공항 화장실을 박살 내며 장첸(윤계상)을 때려잡은 지 어느덧 14년이 지났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마석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니 알 수 없다고 표현하는 게 적합하겠다. 네 편의 <범죄도시>가 세상으로 나오는 동안, 마석도를 연기한 배우 마동석 개인의 몇몇 성격과 특성들이 마석도에게 이식된 채 전사의 몇 조각처럼만 운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4편의 마석도는 왜 범죄자를 검거해야만 했나. 시리즈 내내 마동석은 시나리오 개발 등에 관여하면서 마석도에게 나쁜 놈들 잡는 데 이유가 있냐는 식의 매우 단순한 명제를 행동의 명분으로 부여해왔다. 물론 뒷받침되는 동기도 있었다. 1편의 마석도를 움직이는 힘 가운데 하나는 바로 조선족 소년 왕오와의 관계에서 나온다. 장첸이 소년을 다치게 하자, 마석도는 분노에 휩싸여 장첸을 처단했던 걸 기억해 보자. 4편에서도 이 같은 구조가 차용된다. 마동석은 백창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피해자와 그의 어머니를 마석도의 동력원으로 삼고자 했다. 문제는 이 모든 게 해결사로서 그의 정체성을 부각하는 도구로만 쓰이지, 마석도와 관객을 잇는 통로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마석도의 표면에만 익숙해지고 더 나아가 중독됐을 뿐, 그가 누군지 속속들이 파악할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다.
자기 반영 요소가 빚어낸 셀링 포인트
마동석과 영화. 이렇게 두 가지 소재를 머금고 논할 때 손쉽게 끌어올 수 있는 논리는 바로 마동석이 그의 출연작에서 어떤 방식으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구축하고 변주해오는지 따져보는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신체 특징이나 외형의 고유성을 배역과 연동해 정체성을 구축하는 시도 자체는 그다지 새로운 담론이나 화젯거리는 아니다. 아놀드 슈왈제너거 같은 액션 스타뿐 아니라 강동원 같은 소년미를 지닌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마동석 역시 그 점을 충실히 활용하는 영화인이고, 그 전략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실시간으로 유효한 상황이다.
이때 문제는 캐릭터 빌드업뿐 아니라 세계 확립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는 데에 있다. 마동석 본인의 의지와 상관이 있든 없든 말이다. 세계관을 다져올리는 작업은 관객과 작품이 소통할 여지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그가 관여하는 출연작에선 언제나 마동석의 자기 반영적 요소가 전면에 드러나 셀링 포인트로 변모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령 <이터널스>의 길가메시를 마주했던 관객들이 영화 커뮤니티나 유튜브 등을 통해 어떤 반응을 내놓았던가. 그들은 죽음을 맞는 길가메시를 보면서 후속작 또는 연계되는 작품에서 마동석의 ‘귀싸대기’나 ‘어퍼컷’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어 아쉬움을 토로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길가메시에 대한 궁금증이 이미 논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길가메시를 연기한 마동석을 둘러싼 이모저모가 궁금할 뿐이다. 결국 관객들이 마동석의 출연작을 음미할 때는 그가 배역을 어떻게 소화하는지 집중하기 힘든 환경에 직면한다.
오히려 그가 배역을 어떻게 ‘마동석화’하는지 살펴보는 편이 더 손쉽게 영화와 접속하는 방법이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는 마동석이 굳이 새롭게 이미지 변신을 하려 들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는 여러 차례 복수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나는 그저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하겠다”는 뜻을 전한 바 있다. 신체 특징을 바탕으로 하는 시원한 액션 위에 코미디과 인간미를 얹어낸 특유의 ‘마동석표 캐릭터’는 대중들의 높은 관심도가 유지되는 한, 계속해서 우리 곁을 맴돌 테다. 제작 과정 전반에 참여했던 <이웃사람>을 거쳐 <범죄도시>를 지나 <황야>에 이르기까지. 기획 및 제작, 시나리오 개발과 캐스팅 및 편집 등 연출을 제외한 거의 전 영역에 몸담은 채 소처럼 영화를 찍어내는 마동석은 결국 자신이 선택한 항로가 옳았다는 걸 대중의 선택으로 입증해냈다.
‘정당화된 폭력’과 ‘괴리감’이 빚어내는 시너지
대중이 마동석에게 기대하는 건 무엇인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그의 육체 이미지다. 이때 마동석은 관객들에게 스며들 때 해당 요소를 활용할 뿐 아니라 그 점을 역이용하면서 투 트랙으로 접근한다. 이걸 한 단어로 집약하면 ‘괴리감’이다. 그가 연기하는 배역이 예측 가능한 행동 범위에서 연기를 이어가다 문득 귀엽거나 깜찍하다는 등 빈틈처럼 느껴지는 면모를 보여줄 때, 거기서 발생하는 낙차에서 피어나는 괴리감이 바로 마동석의 구축해온 매력의 핵심이지 않나.
괴리감이 빚어낸 낙차는 곧 마동석을 둘러싼 환경과 연동된다. 그를 지배하는 건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이 신체에서 촉발되는 폭력 이미지다. 그런데 재밌게도 마동석이 그가 연기하는 주요 배역들을 제도권의 질서와 규율이 견고하게 자리한 세계 속에만 머무르게 한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이건 억측이 전혀 아니다. 만약 그가 기획하는 작품이라면 제작 단계부터 본인의 의도와 호응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테고, 그런 과정에 관여하지 않는 경우라고 해도 들어온 시나리오를 검토한 뒤 연기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이 될 때 작업에 참여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건 지극히 상식적이다. 다시 말해 마동석이 선택한 캐릭터의 스테레오 타입 중 하나인 경찰(<범죄도시>)은 특정 기준과 상황 속에서만 폭력을 활용할 수 있지, 그것들을 무분별하게 휘두를 수는 없으며, 깡패(<나쁜 녀석들> 등) 역시 폭력을 잘못 사용했다가는 영영 사회와 격리되기 때문에 상황을 가려가면서 판단해야 한다. 결국 마동석은 여러 제약조건에 둘러싸인다. 어쩌면 타고난 육체의 힘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마동석은 모든 이해관계와 논리를 무시하는 무법자가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가 연기하는 배역의 폭력이 정당화되기 위해선, 그 폭력이 이끌어내는 유무형의 변화가 사회적 합의하에 납득 가능한 수준의 결과물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리즈를 거듭하는 범죄도시에서 마석도가 내뱉는 대사 “나쁜 놈들은 잡아야 돼”는 비단 해당 시리즈 내부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그가 연기하는 배역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악인전>의 장동수는 조직폭력배 두목이라는 ‘나쁜 놈’이지만,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잡기 위해 어떤 명분을 내세웠는가. 역시 대사 한 마디에 모든 게 함축되어 있다. “나도 나쁜 놈이지만 저런 새끼는 살려두면 안 되는 거라고!” 그러니까 마동석의 필모그래피를 지배하는 논리가 있다면, 그건 ‘정당화된 폭력’이다. 하지만 이건 폭력을 허용하는 게 아니라, 폭력을 눈감아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선한 시민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악인을 처단해야 하기에(<범죄도시> 시리즈, <악인전> 등) 폭력이 응징의 수단으로서 용인될 수 있으며,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성난 황소>, <신과 함께-인과 연> 등)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할 명분이 생겨나는 셈이다.
이때 그의 폭력을 눈감아주는 관객들이 스스로가 불편한 마음을 정화해야 하는 환경에 놓인다는 점을 기억하자. 폭력이 도구인 점은 알겠는데,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데 대해 윤리적인 민감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지 않나. 바로 여기서 마동석의 ‘빈틈’은 관객의 니즈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마동석의 허술한 면모나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엉뚱하고 귀여운 언행들 말이다. 이 빈틈들은 단순한 요깃거리가 아니라, 그를 재정의하는 성격 요소로 작용한다. ‘거칠게 남을 때려눕혀도 사실 저 사람은 여리고 따스한 속내를 가진 것 같다’는 식으로 인식의 조정이 일어난다. 결국 관객들이 마동석의 출연작 속 캐릭터들을 대할 때, 인물 각각에 가까워지는 대신 오히려 언행의 주체인 마동석이라는 존재와 소통할 기회만 늘어나는 셈이다.
끝내, 마동석과 마주하기
올해 2월 마동석의 인스타그램에서 화제를 모았던 한 게시물을 떠올려 보고자 한다. 마동석이 뚱한 표정으로 휴대폰 액정을 터치하고 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휴대폰에는 헬로키티 케이스가 씌워져 있으니 험상궂은 아저씨와 귀여운 고양이가 대비를 자아내 이목을 끈다. 이 게시물이 올라가자 누리꾼들은 마동석의 출연작 속 명대사를 패러디하는 댓글을 도배했고, 언론 등에서도 기사로 실어 나르며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대중에게는 마석도나, 길가메시나, 박웅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연이 있든지 딱히 중요하지 않다. 그저 마동석이 그 영화에 출연했고, 그와 접속할 수 있었던 경험이 중요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범죄도시 4>의 마석도가 ‘디지털 문맹’처럼 묘사됐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날로그와 육체의 충돌로 빚어낸 세상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던 마석도는 고도화된 기술로 둘러싸인 디지털 시대에 적응할 수 없다. 이 명백한 한계 속에서도 마석도는 어떻게든 항로를 개척해 백창기를 때려잡았다. 영리한 설계자 마동석의 의중을 짚어보자면, 마석도에게 부여된 이 특징들이 그의 인간미를 더욱 부각해 주는 효과를 자아낼 테다. 개봉 이후 실제 관객 반응을 보더라도 주요 유머 포인트로 먹혀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마석도가 아닌 마동석을 목격했다. 한계를 극복하고 뚜벅뚜벅 나아가는 마석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국 영화판에서 각종 어려움을 뚫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개척하는 마동석의 모습과 자연스레 겹쳐 보였다. 마동석은 멈출 생각이 없다.
글‧송상호
영화평론가, 경기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글을 쓰고 있다. 2021년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수상.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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