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호 구매하기
[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Say My Name! 그들이 갈고리 살인마를 소환하는 이유, 니아 다코스타의 <캔디맨>
[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Say My Name! 그들이 갈고리 살인마를 소환하는 이유, 니아 다코스타의 <캔디맨>
  • 김채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4.05.27 09: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도시 전설의 영화화를 위한 조건들

 

  코미디언 심형래를 당대 최고의 어린이 스타로 만들어준 <영구와 땡칠이>(1989)는 영화사에 등재되진 않았지만, <서편재>(1993)에 앞서 100만 명을 동원한 작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흥행했다. 이후 시리즈로 이어진 <영구와 땡칠이> 덕택에 파산 직전이던 대원미디어는 기사회생했으며, 여세를 몰아 《소년 챔프》라는 주간지를 창간했고 이 잡지에서 연재하던 ‘슬램덩크’가 폭발적으로 흥행하면서 이 회사는 업계 최강자로 떠올랐다.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는 4편을 끝으로 더 이상 선보이지 못했지만 전작들의 엄청난 흥행으로 인해 심형래는 <영구와 흡혈귀 드라큐라> 이후 본격적으로 연출을 겸할 수 있는 입지를 마련할 수 있었고 감독 남기남 역시 심형래와 결별한 이후에도 10편 이상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한 희대의 괴작 <홍콩할매귀신>(1991)은 1980년대 후반 유행했던 ‘괴담’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며, 어떤 소재라도 영화로 만들었던 남기남의 세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일명 도시 전설(Urban Legend)이라 불리는 ‘홍콩할매귀신’류의 괴담은 민담(folklore)의 일종으로서 산업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에피소드에 공포와 익살이 섞여 대중에게 퍼진 것이다. 미리암 웹스터 사전은 도시 전설을 “소문에 근거하여 진실로 널리 유포되는 오싹한 이야기 또는 일화”라고 정의하며, 브리태니카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이 아닌 특이하거나 유머러스한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도시 전설은 친구의 친구(FOAF=a friend of a friend)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같은 간접적인 담화가 도시의 특정한 장소나 자동차, 비행기, 전화 등과 같은 기술적인 산물과 결합하는 경우가 잦다. 민속학자인 해롤드 부룬밴드(Harold Brunvand)는 1981년 미국 전역에 떠돌던 이야기를 모아, 『사라진 히치하이커: 미국 도시 전설과 의미 The Vanishing Hitchhiker: American Urban Legends and Their Meanings』라는 저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또한 ‘Urban Legend’를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가 총 7편이 넘고 TV 시리즈는 이보다 훨씬 많은 작품이 제작되었다. 이외에 미국 도시 전설의 삼대장이라고 불리던 ‘애완용 악어가 하수구에 버려진 이야기’, 부룬밴드의 저서 제목이기도 한, ‘사라진 히치하이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갈고리 살인마 이야기’는 다양한 버전이 존재할 정도로 이 장르는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

도시 전설의 일반적인 주제는 기술, 범죄, 사기, 음모론, 질병, 재해, 도플갱어, 오인된 정체성, 죽음 등과 연관되어 있다. 부룬밴드는 도시 전설이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강력한 호소력을 갖춘 일상적인 이야기”, “실제적인 신념에 근거”, “의미 있는 메시지나 도덕규범의 표출”이라는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많은 도시 전설 대부분이 잊히거나 회자되지 않는 이유는 부룬밴드의 주장대로 세 가지 규범을 모두 내재한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남기남의 괴작 <홍콩할매귀신>은 눈 씻고 봐도 도시 전설이 갖춰야 할 규범 중 어느 것도 충족하지 않는다. ‘홍콩할매귀신’이라는 괴담은 처음부터 초등학생들을 잡아가는 귀신 이야기에서 출발했는데, 어느 순간 점차 여기에 살이 붙으면서 도시 전설의 외형을 갖춰나갔다. ‘홍콩할매귀신’ 괴담은 “홍콩으로 가려던 할머니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비행기기 추락한다. 그런데 할머니가 죽기 직전 자신이 데리고 있던 고양이와 몸이 합체되어 반인반수의 괴물로 거듭나 아이들을 잡아간다.”라는 허무맹랑한 플롯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구체적으로 대한항공 비행기라는 디테일이 첨가되어 ‘실제적인 괴담’으로 둔갑한다. 하지만 홍콩으로 가던 비행기가 추락한 경우는 유사 이래 한 번도 없었기에 이 괴담은 ‘팩트’에서 한참 벗어난, 그야말로 실제성이 부재한 허황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홍콩할매귀신’은 1980년대 우리 국민을 충격으로 몰고 갔던 몇 번의 항공기 재난과 당시 뉴스 사회면을 장식하던 인신매매와 유괴사건에 대한 트라우마가 섞여 도시 전설의 형태로 발전했다.

<홍콩할매귀신>을 감독한 남기남은 사회정치적인 배경과 도시 전설의 밀착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지 어린이 관객을 유인할 목적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본편에서 영구는 사람으로 변신한 너구리 요괴와 결혼하여 ‘홍콩할매귀신’을 처단한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으레 ‘망태 할아버지’ 이야기를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들며 행동 교정을 시도했던 것처럼, 1980년대 후반의 학부모들은 ‘사라지는 아이들’ 혹은 오락실에 정신이 팔려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 자식들을 걱정한 나머지 ‘홍콩할매귀신’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공포와 괴담이 뒤섞인 이야기는 영화가 손을 내밀기 쉬운 이슈였지만 사회문제와 결합한 진정한 도시 전설은 밀레니엄 직전, <여고괴담> 시리즈까지 기다려야 했다.

 

2. 캔디맨, 캔디맨, 

 

  클라이브 바커(Clive Barker)의 <헬레이저 Hellraiser>(1987) 시리즈가 금시초문이라면 그리고 이 시리즈의 주인공 ‘핀헤드(Pinhead)’ 엘리엇 스펜서(Elliot Spencer)를 모른다면 진정한 공포 영화의 팬이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바커는 1985년 헬레이저 시리즈의 첫 번째 소설을 발간했고 이를 토대로 영화를 제작해 흥행에 성공했다. 이에 고무된 그는 이듬해 『The Forbidden 금단』이라는 단편 소설을 선보였다. 바커는 꼬리를 무는 소문, 그리고 갈고리로 사람을 사냥하는 살인자가 등장하는 떠도는 이야기에다가 ‘블러디 메리(Bloody Mary)’ 전설에 살을 붙여 수많은 도시 전설 중에서도 진정한 ‘전설’을 만들어냈다.

 

캔디맨(1992) 포스터

  런던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버나드 로즈(Bernard Rose)는 9살에 수퍼 8밀리로 처음 영화를 만들었으며, 15살 무렵에는 3분짜리 작품을 단편 영화제에 출품해 수상했고 이후 이 작품은 BBC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로즈는 막 개국한 MTV의 가능성을 엿보았고 영화제작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로즈는 당시 최고 인기 가수였던 프랭키 고스 투 할리웃, UB 40, 로이 오비슨의 뮤직 비디오로 업계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BBC에서 몇몇 TV용 영화를 만들어 내공을 쌓은 후, 32살에 이르러 드디어 자신의 최고 히트작인 <캔디맨 Candyman>(1992)을 선보였다. 클라이브 바커의 공포 시리즈를 좋아했던 로즈는 『금단』을 읽자마자 반해 그에게 연락해 판권을 따냈다. 그리고 바커의 양해를 구해 영화의 무대를 리버풀에서 시카고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시카고는 노예 제도에 얽힌 아픈 전설이 여전히 구전되며 마피아의 소굴이자, 당시 범죄율이 미국에서 가장 높은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북부(백인)와 남부(흑인)로 나뉜 도시 구획의 명시적 이질성 그리고 백인 구역에 자리한 흑인 게토 ‘카브리니 그린(Cabrini-Green)’의 존재는 로즈가 영화의 무대를 옮긴 주요한 이유였다. 또한 그들이 가장 미국적인 도시라고 일컫는 시카고는 ‘Trick or Treat(장난칠까 아니면 맛있는 것 줄래?)’를 외치면 미리 준비한 캔디를 주는 할로윈 이벤트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연결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바커의 원작에 미국적인 색채를 입힌 <캔디맨>(1992)은 소름 끼치는 살인마 ‘캔디맨’의 디자인이 영화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오스카가 허락한다면 아카데미 트로피를 텍사스 전기톱으로 잘라서 5등분해 나누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말했던 봉준호의 수상 소감으로 인해 덩달아 주목받았던 <텍사스 전기톱 학살 The Texas Chain Saw Massacre>(1974~) 시리즈, 이 작품의 주인공 ‘가죽 얼굴(Leather face)’은 슬래셔 무비 캐릭터의 시초였다. 여기에 자극받아 제작된 <할로윈 Halloween>(1978~) 시리즈는 ‘무차별 살인’이라는 정신 나간 기획의 당위성을 고려해 살인마, 마이클 마이어스(Michael Myers)를 과묵한 정신병자로 설정했다. <할로윈> 시리즈의 배턴을 이어받아 1980년대를 수놓은 <13일의 금요일 Friday the 13th>(1980~) 시리즈는 현재까지 극장 상영판 기준 총 12편이 출시되었고 시리즈의 안티 히어로 제이슨 부히스(Jason Vorhees)는 스크린 랜트(screenrant.com)의 집계에 따르면, 총 152명을 죽인 살인마 중의 살인마였다. 기형아 제이슨(1편은 제이슨의 엄마가 살인자)은 캠핑장 주인이 밀애를 즐기느라 자신을 구해주지 않아 죽음에 이르자, 무차별적으로 캠핑 온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복수를 자행한다. <할로윈> 시리즈의 아류작이었지만 <13일의 금요일>은 잔인한 신체 훼손을 쾌감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잇단 슬래셔 무비의 인기에 편승해 1984년부터 제작된 <나이트메어 Nightmare>(1984~) 시리즈는 살인의 현장을 현실이 아닌 꿈속으로 설정해 인기를 얻었다. 주인공 프레디(Freddy Krueger)는 기존의 슬래셔 무비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음침하면서도 유머 감각을 갖추고 있었으며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이 시리즈는 정신병자들에게 집단 강간당한 수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고아원에 버려진 후, 불에 타 죽은 프레디가 자신을 죽인 사람들의 꿈에 나타나 복수극을 펼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슬래셔 무비 제작자들은 이처럼 부정적인 쾌감에 따른 죄의식을 떨치고자 나름의 이유를 설정하는데 골몰했다.

 

가죽 얼굴의 전기톱, 제이슨의 하키마스크,
프레디의 칼날 장갑, 엘리엇의 핀헤드

  베트남전이 끝나갈 무렵, 미친 도살자 가족의 잔인한 학살 풍경을 전시했던 <텍사스 전기톱 학살>은 배타적 가족주의를 미국의 정서로 환유하면서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 이후로 슬래셔의 계보를 이은 작품들은 한결같이 개인적인 원한이나 복수의 차원에서 학살극을 벌임으로써 스스로 이 장르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가죽 얼굴의 전기톱’, ‘제이슨의 하키 마스크’, ‘프레디의 칼날 장갑’ 그리고 ‘엘리엇의 핀헤드’라는 기상천외한 아이콘을 대체할 새로운 캐릭터를 구상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텍사스 전기톱 살인>을 잇는 사회, 정치적 의미를 영화 속에 구현하지 않는 한, 슬래셔 무비는 B급 영화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는 장르가 될 운명이었다. 슬래셔 무비가 진퇴양난에 빠진 바로 그때 등장한 버나드 로즈의 <캔디맨>은 아이콘과 의미를 모두 갖춘 보기 드문 슬래셔 무비로서 <텍사스 전기톱 살인>의 진정한 적자였으며 도시 전설을 화면으로 옮긴 최초의 시도였다.

 

3. 버나드 로즈의 <캔디맨>(1992) 이야기

 

  일리노이 대학 사회학과 교수인 남편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꾸려가는 헬렌은 도시 전설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다. 헬렌이 관심을 가진 괴담은 19세기 이야기 ‘캔디맨’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며 당시 꽤 명성이 드높았던 화가 다니엘 로비타이유(Daniel Robitaille)는 백인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그들 사이엔 아이가 생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성의 아버지는 다니엘의 오른손을 자르고 온몸에 꿀을 발라 수만 마리의 벌들에게 쏘여 그를 죽게 만든다. 그리고 다니엘의 시체는 나중에 흑인 게토 카브리니 그린이 건설될 부지에서 불태워진다. 이 오래된 전설은 지금도 회자되면서 카브리니 그린에서 발생한 몇 차례의 살인 사건을 주민들은 캔디맨의 소행이라고 여긴다. 캔디맨에 얽힌 괴담을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위해 카브리니 그린을 방문하던 중, 헬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인 남자에게 폭행당한다. 당국은 당시 주변에 있던 남자들 중, 헬렌의 증언과 의견을 반영해 한 남자를 캔디맨으로 특정하고 그를 살인죄로 기소한다.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다시 카브리니 그린으로 간 헬렌은 캔디맨에게 공격당해 부상을 입었다고 주장하는 소년을 만난다. 헬렌은 이 소년에게 캔디맨 이야기는 사람들이 만든 허상이라고 말하고서 주차장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진짜 캔디맨이 등장하여 “신도들이 내 존재를 믿기에 캔디맨이 존재하는 것이다. 네가 나를 믿지 않으니 직접 나타났다. 이젠 네가 희생양이 되어야겠다.”라고 말한다. 놀란 헬렌은 기절한 이후 어찌된 영문인지 앤-마리라는 미혼모가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카브리니 그린의 한 아파트에서 깨어난다. 헬렌이 눈을 뜨자, 앤-마리의 애완견은 목이 잘려 있고 아들 앤소니가 사라진 상태다. 앤-마리는 헬렌이 이 사건의 범인이라고 여겨 울부짖으며 칼을 들고 그녀에게 달려든다. 두 사람이 몸싸움을 벌이던 중 경찰이 들이닥치고 앤-마리가 휘두르던 칼을 빼앗아 들고 있던 헬렌은 기소된다. 그녀는 무죄를 주장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남편이 등장해 보석으로 풀려나 집으로 귀가한 헬렌은 카브리니 그린 곳곳을 촬영했던 사진을 보던 중 희미하게 찍힌 캔디맨을 발견하고 떠돌던 전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캔디맨을 다섯 번 외친다. 그러자 진짜 캔디맨이 등장해 그녀를 위협한다. 이때 헬렌의 논문을 도와주던 친구가 집에 방문하게 되고 캔디맨은 친구를 갈고리로 죽인다. 캔디맨에게 대항하기 위해 손에 칼을 들고 있던 헬렌. 때마침 집에 도착한 남편은 이 광경을 보고 놀란다. 결국 헬렌은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의사와 면담을 하게 된다. 의사는 헬렌이 자신의 무죄를 아무리 주장해도 믿지 않고 캔디맨의 존재를 설명해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결국 헬렌은 캔디맨을 소환하고 그는 의사를 살해한다. 헬렌은 기지를 발휘해 정신병원을 탈출해 집으로 달려가는데, 그곳에서 남편은 제자와 새로운 삶을 준비하면서 집을 예쁘게 꾸미고 있다. 이에 실망한 헬렌은 집을 나와 거리를 떠돌다가 다시 카브리니 그린으로 향한다. 헬렌은 그곳에서 재단에 누워있던 캔디맨과 마주한다. 헬렌은 분노에 사로잡혀 갈고리로 캔디맨의 목을 찌르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면서 헬렌을 반긴다. 헬렌은 캔디맨에게 실종된 앤-마리의 아이를 돌려달라고 울부짖는다. 그러자 캔디맨은 자신에게 복종하면 아이는 무사할 것이라고 말한다. 캔디맨은 주술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은 헬렌을 재단으로 데려간다. 헬렌은 그곳에서 캔디맨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수만 마리의 벌들이 살점을 모두 먹어치운 뼈만 남은 앙상한 가슴, 그의 입에서 벌들이 기어 나오고 캔디맨은 헬렌에게 키스를 한다. 헬렌이 다시 기절하자 캔디맨은 아이를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진다. 주술에서 깨어난 헬렌은 벽에 쓰여 있는 글씨(It was always you Helen), 자신을 닮은 여자 그리고 백인들이 다니엘(캔디맨)을 고문하는 장면을 그린 벽화를 보면서 캔디맨과 자신이 운명적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윽고 헬렌은 온갖 쓰레기 더미가 산처럼 쌓여있는 카브리니 그린 앞마당으로 걸어간다. 헬렌은 쓰레기 더미 안에서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간다. 주민들은 매년 크리스마스 직전 이 쓰레기 산을 태우면서 주술적인 의식을 벌인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이 공간 안에 아이와 헬렌 그리고 캔디맨이 있는 줄 모르고 불을 지른다. 헬렌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이 안위를 돌보지 않고 앤-마리의 아이 앤소니를 구하고 죽는다. 캔디맨 역시 거대한 불길 속에서 산화한다. 남편 트레버와 그의 새로운 애인 그리고 신부와 지인 몇 명만 참석한 헬렌의 초라한 장례식이 끝날 무렵, 저편에서 카브리니 그린의 주민들이 그녀를 추모하려 다가온다. 이윽고 헬렌에게 맨 처음 캔디맨의 존재를 알려주었던 소년이 갈고리를 그녀의 무덤에 넣어준다. 장례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트레버는 상념에 빠져있다. 젊은 애인은 헬렌과 달리 요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매사에 투덜대기만 한다. 그는 행복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눈물짓는다.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자책하던 그는 거울을 보면서 헬렌의 이름을 다섯 번 부른다. 그러자 헬렌이 나타나 남편을 갈고리로 죽이고 이 장면을 지켜보던 철부지 여자는 절규한다.

 

4. 카브리니 그린(Cabrini-Green)과 시카고

 

캔디맨(1992), 카브리니 그린에서 바라본 시카고 다운 타운

  시카고에는 두 개의 메이저리그 팀(컵스와 화이트 삭스)가 있고 이 팀들의 팬은 지역에 따라 나뉜다. 주로 백인이 거주하는 북쪽은 컵스 팬이 다수를 차지하고 흑인 비율이 높은 남쪽은 화이트삭스를 응원한다. 북쪽은 최고급 부티크가 몰려 있고 고층 건물이 즐비하며 마천루가 숲을 이룬다. 카브리니 그린은 가장 번화한 지역에서 직선거리로 1킬로미터도 되지 않는 곳에 자리한 특이한 흑인 게토였다. 시카고 주택청의 공공 프로젝트로 1940년대부터 건립된 카브리니 그린은 이탈리아계 미국인 수녀, 성 프란시스 카브리니(Saint Frances Cabrini)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으며 애초에는 이탈리아 이주민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이후 원래 거주자들이 떠나면서 가난한 흑인들이 임대료가 저렴한 카브리니 그린의 주인이 되었다. 갱단이 경찰 숫자보다 9배 많다는 통계가 보여주듯, 당시 시카고는 범죄율이 높기로 악명이 자자했고 점차 게토화 되어가는 카브리니 그린은 그중에서도 강력 범죄의 온상으로 지목되었다.

  카브리니 그린에 관한 에피소드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시카고의 제 50대 시장이었던 제인 번(Jane Byrne)이 재임 2주년 되었을 때 벌였던 홍보 스턴트(Marketing Stunts)였다. 대중들을 깜짝 놀라게(stunt)하는 충격 요법으로 소비자의 이목을 끌어 매출 증대를 노린 이 마케팅 기법은 잘 활용하면 브랜드 홍보에 크게 기여한다. 제인 번은 재임 기간 중에 범죄율이 급등하자, 기발한 홍보 스턴트를 떠올렸다. 그녀는 1992년 출간한 자서전에서 희대의 홍보 스턴트를 계획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고층 건물과 저층 건물, 타운하우스가 함께 자리 잡은 거대한 거주지에 들어서자 나는 적막함을 느꼈다. 점심시간이었는데도 운동장과 공원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아이들은 물론 경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며칠 후 나는 어린 소녀가 집단 성폭행을 당한 이곳에 다시 들러야 했다. 그때 나는 갑자기 이곳으로 이사를 와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용감한 시장은 남편을 설득하여 미시간 호숫가에 자리 잡은 안락한 멘션을 세주고 대신 악명 높은 카브리니 그린의 15층짜리 빌딩의 4층에 경호원 두 명과 함께 입주했다. 대중들은 제인 번의 결정에 환호했다. 당시 제인 번을 취재했던 캐롤 마린이라는 기자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그 장소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시장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그녀의 계획은 정말 대담한 것이었다.”라고 시장의 결정을 환영했다. 그녀가 머무르는 동안 카브리니 그린의 고장 난 엘리베이터들이 수리되었고 쓰레기가 수거되었으며 폭력과 범죄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시장이 살던 4층 건물엔 두려움에 떨면서 방치된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문을 두드려댔다. 제인 번은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하고 카브리니 그린을 박차고 나왔다. 그녀가 이곳에 머문 기간은 고작 3주였다. 나중에 그녀는 자서전에서 카브리니 그린에서의 생활을 “사는 것은 불편하지 않았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 경험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제인 번의 홍보 스턴트는 원대한 구상에서 시작되었지만 3년도 3개월도 아닌 고작 3주간의 ‘버팀’으로 인해 카브리니 그린이 당면한 문제의 심각성만 부각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시장의 철수 이후 카브리니 그린은 전보다 더한 지옥으로 변해갔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죄지은 자가 간다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의 마지막 단계는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 불리는데 이 지옥은 다른 말로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고 한다. 고통이 영속되는 무간지옥에 이르는 길이 곧 무간도(無間道)다. 무간지옥보다 더 잔인한 지옥이 있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혹자는 카브리니 그린을 현세에 존재하는 최악의 지옥이라 말한다. 범죄, 폭력, 마약이 난무하는 게토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카브리니 그린에서 동북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미국 3대 도시인 시카고 최고의 번화가와 마천루가 자리 잡고 있으며, 남한 절반 크기의 미시간 호수 위를 호화로운 요트들이 그림처럼 떠다닌다. ‘천국이 내다보이는 창문이 있는 지옥’이 바로 이곳이다. 클라이브 바커가 점점 계층화되어가는 리버풀을 배경으로 『금단』을 집필했지만, <캔디맨>의 감독 버나드 로즈가 시카고의 카브리니 그린으로 로케이션을 바꾼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5. 니아 다코스타의 <캔디맨>(2021)과 원작의 차이

 

캔디맨(2021) 포스터

  서른을 갓 넘긴 니아 다코스타(Nia DaCosta)에게 미국 영화의 기린아 조던 필(Jordan Peele)은 <캔디맨>의 리메이크이자 시퀄(Sequel)인 이 작품을 왜 맡겼을까? 그녀가 영화학과로 유명한 뉴욕대를 졸업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흑인 감독들의 영원한 고향인 뉴욕 브루클린 태생이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그녀가 연출한 <Livelihood>(2014), <Celeste>(2014) 같은 단편영화나 넷플릭스의 범죄 시리즈인 <Top Boy>의 한 에피스드에서 가능성을 엿봤기 때문일까? 아마도 이 영특한 제작자는 다코스타가 가진 배경과 열정 그리고 재능을 모두 고려했을 것이다. 2012년에 닻을 올린 조던 필의 제작사 몽키포(Monkeypaw Productions)는 그 동안 다양한 작품을 출시했다. <겟 아웃 Get Out>(2017), <어스 Us>(2019), <놉 Nope>(2022)은 자신이 감독했지만, <블랙클랜스맨 BlacKkKlansman>(2018)은 존경하는 대선배 스파이크 리(Spike Lee)에게 그리고 자신과 함께 TV 코미디 시리즈를 만들었던 피터 아텐시오(Peter Atencio)에게는 <키아누 Keanu>(2016)의 메가폰을 맡겼다. 이후에도 필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재능 있는 감독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산업’과 ‘정신’을 철저히 분리하여, 인종 문제를 다룬 작품은 언제나 동료 흑인들에게 연출 기회를 주었다. 몽키포는 장르를 가리진 않지만 시나리오가 인종 이슈에 연관될 때, 필은 언제나 흑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다룬다.

 

캔디맨(2021), 카브리니 그린
캔디맨(2021), 카브리니 그린

  카브리니 그린은 2011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아직 방치된 건물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곳은 더 이상 악명 높던 흑인 게토가 아니다. 카브리니 그린을 떠나게 된 거주자들은 불결한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공동체 유대와 상호 신뢰를 쌓았다고 말하곤 했다. 이 특이한 장소는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임대료가 매우 낮았고 도심 접근성이 어느 지역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해체 이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시된 대안적 공간은 특별한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가난한 공동체가 송두리째 뿌리 뽑히는 것을 한탄하면서 과거의 향수를 다양한 매체에 토로하기도 했다. 필과 다코스타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했다. 그들이 거울을 보면서 캔디맨을 다섯 번 외치면 어디선가 나타나서 사람을 살해하는 오래된 슬래셔 캐릭터를 21세기에 다시 꺼내든 이유는 연대의 필요성과 더불어 소환하면 언제 어디서나 이유를 불문하고 나타나는 캔디맨의 편재성 때문이었다.

  “흑인의 삶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사회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무렵, 필과 다코스타는 새로운 공포 영화를 구상하고 있었다. 필은 자신이 <캔디맨>에 도취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어렸을 때 공포 팬이었지만 흑인 프레디 크루거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즈의 <캔디맨>은 매우 대담한 시도라고 생각했고 영화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현실에서 흑인은 공권력의 피해자이지만 영화에서는 단 한 번도 거창한 살인마로 등장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슬래셔 무비에 출현한 최초의 흑인 살인마에 대해 무한한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일종의 대리만족이거나 현실에 대한 울분의 표출일 것이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의 단언대로 미국은 ‘폭력의 역사(A History of Violence)’ 그 자체다. 미국 사회에 만연한 폭력은 자신을 보호하는 어떤 과격한 수단마저 옹호하면서 총을 통한 정의를 실현했으며 한편 폭력에 대한 공포는 적대적인 타자들을 양산했다. 아시안에 대한 두려움을 일컫는 황색공포(Yellow Peril), 수많은 서부극에서 적으로 등장하는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불리던 토착민, 그리고 미디어가 그려낸 괴물 같은 흑인들. 이중에서 흑인은 명확한 이유도 없이 여전히 범죄자로 특정되면서 악마의 씨로 여겨졌지만 막상 그들은 슬래셔의 주인공으로 격상된(?)적은 없었다. 필과 다코스타가 <캔디맨>에 끌린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제 필과 다코스타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추앙하던 원작자, 버나드 로즈의 유지를 받들되, 새로움을 추가하는 것이다. 캔디맨은 벌떼가 발하는 엄청난 소음, 피고름이 가득한 썩어 문드러진 육체 그리고 손을 대신하는 갈고리라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콜라주로 탄생했으며 여전히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다. 로즈의 <캔디맨>은 백 년 전 괴담의 두 주인공인 다니엘과 그의 백인 연인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21년 필과 다코스타는 ‘캔디맨’을 한 인물로 특정하지 않고 분화시켰다. 새롭게 추가된 캔디맨, 셔먼 필즈(Sherman Fields)는 1977년 경찰의 폭력으로 숨진 인물이다. 다코스타의 <캔디맨>에서 모든 사건의 트리거에 해당하는 캐릭터, 윌리엄은 주인공 앤서니 맥코이(Anthony McCoy)에게 셔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에 따르면 셔먼은 아이들에게 캔디를 나눠주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 할로윈 축제 때, 한 백인 소녀가 받은 사탕 속에 면도날이 숨겨져 있었는데, 경찰은 셔먼을 범인이라 단정해 그를 폭행해 숨지게 했다. 하지만 몇 주 후에 면도날이 든 사탕이 연이어 발견된다. 윌리암은 셔먼의 은신처를 경찰에게 알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따라서 그에겐 캔디맨을 부활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윌리암은 원조 갈고리 살인마에게 납치되었다가 헬렌에 의해 구조되어 이제 성인이 된 앤소니에게 사건의 전모를 알려 그를 각성시키려 한다.

 

캔디맨(2021)의 캔디맨

  30년 전 사건을 전혀 모른 채, 촉망받는 예술가로 성장한 앤소니는 운명처럼 캔디맨에게 이끌려 그를 주제로 ‘Say My Name’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시리즈를 선보이면서 평단의 주목을 받는다. 캔디맨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그를 소환할 때, 벌에 쏘인 상처로 인해 앤소니는 점점 원조 캔디맨이었던 다니엘처럼 외모가 변해간다. 자신을 구해주었던 헬렌에 관한 기록을 탐독하던 그는 캔디맨의 존재를 진실로 믿게 된다. 몇 차례의 잔혹한 살인 사건이 발생하자, 시카고에는 캔디맨의 전설이 다시 회자되고 시험 삼아 그를 소환한 사람들은 시체로 변해간다. 억울하게 죽은 셔먼에게 부채의식을 갖고 있던 윌리암은 앤소니를 제 3의 캔디맨으로 만들기 위해 그의 정신을 완전히 사로잡으려 한다. 이 와중에 앤소니의 애인 브리아나가 등장하자 윌리암은 그녀를 죽이려 하지만 오히려 당하고 만다. 사건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이제 완전히 캔디맨으로 변한 앤소니를 총으로 쏜다. 경찰은 브리아나를 협박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경찰차에 구금된 브리아나는 룸미러를 보면서 캔디맨을 소환하자 그는 경찰들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브리아나 앞에 등장한 캔디맨은 자신이 목격한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라”라고 지시하고 사라진다.

 

6. 필과 다코스타는 거울을 보며 누구를 소환했던가?

 

  슬래셔 무비의 주인공인 살인마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무차별성이다. 그가 사람을 죽이는 데는 이유가 있지만 살인 대상은 남녀노소, 신분,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필과 다코스타가 디자인한 새로운 캔디맨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재미삼아 소환하는 사람들만 죽이는데, 우연처럼 그들은 모두 백인이다. 필과 다코스타는 원조 캔디맨과 새로운 캔디맨 중 누가 더 공평한지를 대중에게 묻는다. 원조 캔디맨은 분노로 인해 ‘묻지마 살인(Motiveless Crime)’을 저지른다면, 새로운 캔디맨은 자신을 조롱하거나 협잡하는 인간(백인)만 사냥한다. 아무나 죽이는 무차별성 그리고 원인과 이유에 입각한 살인의 공정성을 의제로 삼음으로써 새로운 <캔디맨>의 제작자들은 20세기 슬래셔 무비의 세계관과 작별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한 공정의 기준에 불편을 느낀 많은 사람들은 리부트된 <캔디맨>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Black Lives Matter”를 “All Lives Matter”로 대체하려 들었다. 혹시나 새로운 <캔디맨>이 이러한 논쟁을 의도했다면, 그들의 전략은 들어맞았다. ‘Black’은 ‘Woman’, ‘Asian’, ‘Native American’, ‘the disabled’로 얼마든지 자리바꿈이 가능하며 이는 수많은 담론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필과 다코스타는 단순히 흑인의 권리를 옹호할 목적으로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공정함과 정당성 문제 이외에 논란은 덜하지만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슈를 생각해야만 했다.

  그들이 정치적 담론과 더불어 주목한 것은 자신들의 영역인 ‘예술계’였다. 필과 다코스타는 대중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계의 구성 방식과 작동 원리를 서브 플롯화하면서 스파이크 리나 존 싱글턴(John Singleton)으로 대변되는 과거의 전투적인 흑인 영화의 전통을 빗겨갔다. 이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큐레이터와 딜러들은 주인공 앤소니에게 흑인다움을 선정적으로 포장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작품을 만들라고 은연중에 압박한다. 이 말을 들은 앤소니는 캔디맨 괴담을 더욱 파헤치고 그 내용을 작품에 반영하기에 이른다. 또한 그들은 캔디맨에 관한 괴담이 다시 유행하면서 앤소니의 작품이 회자되자 이를 재빨리 이용하여 대중의 이목을 끌려하다가 모두 캔디맨에게 살해된다.

 

캔디맨(2021)의 앤소니

  로즈의 <캔디맨>은 ‘도시 전설’ 자체에 주목한 작품이었다. 주인공 헬렌의 남편이자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교수인 트레버는 영화의 오프닝에서 “도시 전설은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캔디맨>의 모든 것을 한 문장에 담고 있다. 버나드 로즈의 원작은 거울 모티프를 활용하여 트레버가 발화한 두려움과 무의식을 설득력 있게 펼쳐나간다. 이 뛰어난 슬래셔는 식사 장면, 거주지, 여가와 휴일을 보내는 방식 등 가능한 모든 대조와 차이를 동원해 인종 문제를 가시화한다. 도시 전설을 파헤치는 주체는 비록 헬렌이라는 백인 여성이지만 그녀는 인종 문제를 수면위로 밀어 올려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다. 그녀는 마침내 자발적으로 캔디맨 신화에 동참하면서 납치된 (흑인)아이를 구하고 불길 속에서 캔디맨과 함께 장렬히 산화한다. 하지만 헬렌을 이은 캔디맨의 적자이자 새로운 캔디맨인 앤소니는 헬렌이 공동체를 위해 희생했던 것과 달리, 자신과 캔디맨의 연관성을 끊임없이 회의한다. 그는 “Black Lives Matter”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성공한 예술가로 살아가려 한다. 그는 결국 캔디맨의 신화에 포섭되지만 그것 또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예정된 운명에 의한 것이었다.

  한밤중에 거울 앞에서 ‘블러디 메리’를 세 번 부르면, 혹독한 전제 정치를 했다는 메리 1세(블러디 메리)가 나타나 발화자의 눈을 할퀴어 빼간다는 전설에서 착안한 <캔디맨>은 카브리니 그린이라는 무대를 만나 진정한 도시 전설로 거듭났다. 원본 <캔디맨>의 주인공을 백인 여성에서 흑인 남성으로 바꾸고 카브리니 그린 대신 깔끔하고 화려한 미술관과 고급 아파트로 무대를 옮긴 새로운 <캔디맨>은 흑인의, 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 영화를 꿈꾸었다. 필과 다코스타는 무차별성을 차별성으로 바꾸면서 공정함의 딜레마를 제시했고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분별 있는’ 반영웅의 슬래셔 캐릭터를 선보였다. 뉴욕 태생이며 시드니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비평가 케바 요크(Keva York)는 미래를 예언하는 다음과 같은 비평을 영화 개봉 직후에 남겼다. “겁에 질린 브리아나가 자신을 포섭하려는 경찰들의 협박을 물리칠 때쯤, 나는 그녀(니아 다코스타)가 MCU(Marvel Cinematic Universe)에 영입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야만 했다.”

  고전적인 슬래셔 무비의 주인공 캐릭터가 진정한 공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후, 잔혹한 악당에서 복수의 천사로 도시에 재림한다. 이 정도면 언제나 (반)영웅 서사에 목마른 MCU가 다코스타를 소환한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필과 다코스타의 <캔디맨>은 흑인 여성 감독 영화로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박스 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요크의 예언대로 그녀는 2년 후, <더 마블스 The Marvels>(2023)를 통해 마블 영화의 최연소 감독이 되었다. 그들이 영화 촬영 틈틈이 거울을 보면서 장난삼아 소환한 대상이 어쩌면 ‘캔디맨’이 아닌 MCU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 상상은 도시 전설이 될 리 만무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성공담은 명백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 필과 다코스타는 진정한 할리우드의 전설이 될 수 있을까?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