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2003년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기로 회자된다. 한국영화의 규모와 같은 양적 성장은 물론이고, 작품성과 다양성 등 영화의 질적 성장 또한 유독 도드라지는 해였기 때문이다. 일례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그들의 필모그래피에서 작가주의를 아로새겼다. 뿐만 아니라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과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권칠인 감독의 <싱글즈>,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 등은 충무로식 상업영화의 가능성을 더욱 공고히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해 말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는 그동안 한국의 상업영화가 단 한 번도 도달해 본 적 없는 흥행 스코어를 내면서 한국영화 최초의 천 만 영화가 되었다.
이렇게 2003년은 한국영화계에 오래간만에 찾아온 화려한 황금기였다. 그런데 흔히 '황금기'라고 하는 것에는 '관객 동원 수'와 같은 스코어(숫자)가 동반되기 마련이다. <잘못된 만남>이 수록된 가수 김건모의 3집(1995)은 그의 전성기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앨범인데,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이 앨범이 발매 당시 25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듯이 2003년 한국 영화의 황금기에도 그러한 일반적 통념에 벗어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는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2003)가 있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제작비 대비 관객 동원이 크게 이뤄지지 않아 흥행에 실패한 작품임에 명백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한국영화 르네상스기를 주도한 2003년의 여러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은 장준환 감독만의 장르적 상상력과 그 중심에 자리잡은 B급 정서의 골계미 덕분이다. 다시 말하면, 상업적으로는 실패작인 <지구를 지켜라>가 역설적이게도 장르영화로서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감독에 의해 정교하게 의도된 B급 정서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개봉 당시 포스터처럼 재기발랄한 코믹극일 것만 같지만 실제로는 B급 정서로 현실을 비틀며 권력의 잔혹성과 현실의 참혹함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이 장준환식 블랙코미디는 현실에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을 법한 '병구'의 머리 속에서 시작된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병구(신하균)는 조만간 외계인에 의해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 믿고 있다. 그래서 병구는 지구의 멸망을 막기 위해 외계인을 색출해내고자 온 신경을 쏟는다. 그러던 어느 날, 병구는 평소 안드로메다의 왕자로 의심하던 강 사장(백윤식)을 납치하여 외계인임을 자백받기 위해 머리털 밀기, 생채기 난 곳에 물파스 바르기 등 기상천외의 고문을 한다. 그렇게 강 사장이 병구의 광기로 인한 희생양이 될 것만 같은 순간, 강 사장은 병구의 뒤를 캐낸 경찰의 도움으로 구출된다. 이렇게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안도하는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불가사의한 사건이 발생하여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끝장난다.
보통 상업영화에서는 현실의 불평등 및 부조리로 인한 울분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염세주의를 권력으로 인해 고통당하던 약자의 승리로 해결한다. 이른바 '사이다' 스토리라고 여겨지는 이러한 서사는 관객들에게 아찔한 대리만족을 선사하고, 관객들은 그러한 이야기에 열광하므로 영화 제작자 입장에서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야기 구조이다. 이런 문화 소비 정서는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서 철저하게 응징당하는데, '병구'의 승리로 끝날 것만 같았던 이야기가 영화의 말미에서 완전히 전복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강자가 최후 승자로 남는 이야기가 되는 것인데, 이는 대중들의 문화 소비 정서에 위배되기는 하나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의 권력들과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떠올려 본다면 <지구를 지켜라> 속 장준환식 블랙코미디는 부자연스럽다기보다 오히려 더 현실적이다.
결론적으로, <지구를 지켜라>는 병든 지구의 모습처럼 어딘가 모자라고 행색이 초라한 병구라는 인물과 과거 정·재계 권력자들의 형상을 조합한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외계인의 대립이 주된 서사이다. 그 속에서 마치 병구의 망상으로만 여겨졌던 모든 것이 이야기의 말미에서 전복되는데, 그것은 장준환식 블랙코미디가 리얼리티로 전복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지구를 지켜라>의 이러한 전복은 결과적으로 진부한 주제와 미덕에 기괴함을 끌어들여 오히려 그것을 더욱 낯설어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장준환 감독의 이러한 세계관은 과연 인간이란 무엇으로 인간이라 정의되는가 하는, 인간성을 둘러싼 현실의 잔혹함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지구를 지켜라>가 나오기 전까지 상상력을 유보당했던 충무로식 장르영화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기에 충문했다.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응용언어학자. 한국어교육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하며 담화분석과 대중문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교육원을 수료했으며, 무궁화 스토리텔링 공모전 동화 입선, 서울국제사랑영화제(SIAFF)에서 기독교 영화 비평 대상 수상,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 등을 했다. 만화평론상, 대종상,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심사위원 및 영평상 집행부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한국어학과 초빙교수 및 한국어교육원장,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집행부, 한국문법교육학회 편집이사 등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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