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생산하는 대중문화 콘텐츠를 K-콘텐츠라고 지칭하는 이 시대. K-콘텐츠 중에서도 주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소비되던 한국 영화는 이제 전 세계에서 훨훨 날아오르고 있다. 그 배경에는 그동안 쌓아온 한국영화만의 독창성과 꾸준함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생충>(봉준호 감독, 2019)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과 아카데미상 주요 부문 석권 그리고 관록 넘치는 배우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수상 등도 한국영화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COVID-19) 감염병 사태와 함께 급부상한 오티티(over the top, OTT)의 영향력 또한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오티티 서비스를 통해 글로벌 구독자들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콘텐츠에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접근이 가능해졌고, 거기에는 한국영화 또한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영화는 내수적으로 산업의 축소와 극장 개봉작의 연이은 상업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시장에서는 여전히 건재하다. 한국 영화산업의 글로벌 확장은 장르적 다양성에도 영향을 미쳐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 드라마 일색의 장르는 조성희 감독의 <승리호>(2021)와 최동훈 감독의 연작 <외계인 1부, 2부>(2022, 2024) 등 규모가 큰 SF물이 등장했고, 이원석 감독의 <킬링 로맨스>처럼 특정 장르를 더욱 세분화하는 이른바 B급 병맛 감성의 코미디물도 나타났다. 최근에는 IT 기술의 발전과 함께 공포/스릴러 장르 또한 신선하게 정련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는데, 여기서는 장르 데뷔작임에도 자신만의 장르적 클리셰를 창조하면서 2010년 이후 한국형 스릴러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준 작품 하나를 다루고자 한다.
그 영화는 바로 나홍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추격자>(2008)로, 이 작품이 나오기 전까지 충무로식 스릴러물은 두 가지 큰 과제를 안고 있었다. 첫째로, 전 세계 장르 영화의 성지 할리우드나 이웃나라 일본의 영화에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한국영화의 스릴러 장르에서는 인물들의 과거나 관계에 집착하다 결국 이야기의 완성도는 물론이고 스릴러의 묘미인 긴장감과 불안감마저 놓치기 일쑤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형 스릴러물에서는 흔히 이 장르에서 인서트나 상황 전환의 장치로 활용되는 점프 스케어(jump scare), 즉 무엇인가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하며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이 관습적 장르 장치조차 무의미한 짜증 유발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관습적 장르 장치를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조차도 장르 문법으로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추격자>는 이렇게 한국형 스릴러물이 장르적 완성도를 온전히 채우지 못하던 시기에 등장한다.
이 영화는 그 흔한 점프 스케어를 남용하지 않고도 극도의 긴장감과 불안감을 조성한다. 또한, 할 것을 다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극에 핍진성을 부여하면서 관객들에게 현실적 공포를 전달한다. 500만이 넘는 관객들에게 엄청난 스릴러적 상흔을 남기는 데 성공한 그 이야기는, 한 경찰관 출신의 성매매 업주가 감쪽같이 사라진 업소 여성을 찾으며 점입가경으로 흐른다.
어린 딸과 함께 살아가는 김미진(서영희)은 궁핍한 생활에 못이겨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업주 엄중호(김윤석)가 연결해 준 성매매 콜에 응한다. 그렇게 조용한 주택가의 한 저택으로 들어간 미진은 그 곳에서 성매수자 지영민(하정우)을 만난다. 그러나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자리를 뜨려는 미진에게 영민은 선한 생김새로 포장하고 있던 짐승 같은 살인마의 본성을 드러낸다. 한편, 중호는 돈을 지불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춘 미진을 찾던 중 연쇄 살인마 영민의 실체를 알게 된다. 경찰에 신고까지 하며 영민의 자백을 받아내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게 중호는 미진을 구하기 위해 공권력의 도움도 무력화시키는 연쇄 살인마를 상대로 사투를 벌인다.
<추격자>의 줄거리는 비교적 단선적이지만 거기서 오는 장르적 감성은 기존의 어떤 한국형 스릴러물보다 현실감이 넘친다. 그 중심에서는 소시민으로서의 엄중호라는 캐릭터가 있다. 미진을 찾아 나선 이도, 살인마를 처단한 이도 결국 포스터 속 문구처럼 ‘경찰도 검찰도 아닌’ 이 땅의 소시민 중호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중호처럼 영화 같은 조력자도 없는 관객들은 자신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폭력 앞에 맨몸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추격자>의 이러한 캐릭터적 특성은 배우들의 거친 호흡은 물론이고 신체의 미세한 떨림조차 그대로 살린 섬세한 연출과 더불어 극의 전반에 현장감과 긴박감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짐승성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데 일조하며, 결과적으로 악의 평범성에 힘을 실어 준다.
이렇게 <추격자>가 엄중호와 지영민이라는 남성 캐릭터를 통해 인간의 짐승성과 악의 평범성이라는 영화적 미덕을 시사한다면, 그것으로 형성되는 스릴러적 공포감은 미진이라는 여성 캐릭터를 통해 극적으로 강화된다. 이유 없는 폭력을 가까스로 모면해도 온전한 도움 하나 얻을 곳 없이 자신에게 엄습해 오는 극도의 긴장과 불안을 오롯이 혼자서 감당해내야만 하는 미진. 그 모습은 마치 막혀 있을지도 모를 출구를 향해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안고 막연히 달리는 동시대인의 삶을 보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추격자>의 긴장과 불안은 극이 마무리되어도 끝날 기미 없이 영원할 것만 같아 더욱 두렵고 섬뜩해 진다.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응용언어학자. 한국어교육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하며 담화분석과 대중문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교육원을 수료했으며, 무궁화 스토리텔링 공모전 동화 입선, 서울국제사랑영화제(SIAFF)에서 기독교 영화 비평 대상 수상,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 등을 했다. 만화평론상, 대종상,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심사위원 및 영평상 집행부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한국어학과 초빙교수 및 한국어교육원장,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집행부, 한국문법교육학회 편집이사 등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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