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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나는 왜 이렇게 빨리 달렸던 걸까?-<걷기왕>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나는 왜 이렇게 빨리 달렸던 걸까?-<걷기왕>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4.07.0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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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열풍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최근 유행하는 걷기는 둘레길이나 산티아고 순례와 성격이 조금 다르다. 정확하게는 맨발 걷기 열풍이다. ‘맨발로 걸으면 건강에 좋다’는 입소문이 바람처럼 빠르게 번진 덕분이다. 지자체들도 경쟁적으로 맨발 걷기용 황톳길을 만드느라 바쁘다. 걷기는 개인의 성장 측면에서도 혹은 인류 발전의 관점에서도 분명히 주목할 만한 행위이다. 그런데 이 걷기가 경쟁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그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규칙을 만들고 순위를 정하는 순간, 걷기는 그 순수한 의미를 잃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영화 <걷기왕>(2016)을 주목할 만하다. <걷기왕>은 경쟁의 초월이라는 2000년대 스포츠영화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이만복은 인천 강화제일고등학교의 학생이다. 이만복은 특이한 체질을 지니고 있다. 4세 때 우연히 발견된 선천적 멀미 증후군이다. 그래서 이만복은 교통수단을 탈 수 없다. 버스든, 경운기든, 오토바이든 탈 것을 이용하기만 하면 멀미를 한다. 이만복은 할 수 없이 왕복 4시간 걸리는 학교를 걸어서 다닌다. 이만복의 담임교사가 이 사실을 알고 체육 선생님에게 이만복을 추천하고, 이만복은 경보를 시작한다.

경보는 특이한 스포츠 종목이다. 달리기와 걷기의 중간쯤 된다. 정해진 거리를 최대한 빨리 걸어야 한다. 단, 선수는 절대로 달리면 안 된다. 하지만 학교를 걸어서 다니는 것과 스포츠 종목으로 경보를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래도 이만복은 열심히 훈련한다. 육상 선수 출신 선배인 수지와 갈등하는 서사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만복은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서 열리는 제99회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한다. 차를 탈 수 없으므로 걸어서 경기장에 도착한다. 이만복의 서울행에는 수지가 동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수지의 상처가 드러난다.

 

<걷기왕>의 주제는 결말의 경기 장면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스포츠영화의 전형적인 플롯이다. 이만복은 500m 거리를 왕복하는 10km 코스에 출전한다. 그리고 경기 초반부터 선두로 치고 나간다. 체육 교사의 신신당부를 무시하고 중반까지 1위를 달린다. 결국, 이만복은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다. 체력이 달려 숨이 거칠어지고, 어깨가 올라가고, 얼굴이 찌푸려진다. 이만복이 폭주하자 다른 선수들도 속도를 내기 시작하고, 마침내 속도 경쟁이 시작된다. 폭주하는 이만복을 비웃던 ‘베테랑’ 선수들도 덩달아 속도를 낸다.

그러다가 마지막 1바퀴를 남기고 사달이 난다. 선수들이 줄줄이 트랙에 쓰러진다. 한 선수가 넘어지는 바람에 이만복도 덩달아 쓰러진다. 그 순간, 이만복은 트랙에 누워 하늘을 보며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인상적인 독백을 한다. “아, 근데 나 왜 이렇게 빨리 달렸던 걸까? 어쩌면 그냥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 자신도 모르게 경쟁의 세계에 뛰어들었던 이만복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이만복은 경기 진행 요원이 “계속 뛸 거예요, 말 거예요?”라고 묻자 “아니오. 그만할래요” 대답한다. 그러고는 아스팔트에 그냥 큰 대자로 눕는다.

 

이만복은 원래 별다른 꿈도, 열정도 없는 천하태평의 학생이다. 그런데 주변 인물이 이만복을 가만두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은 담임선생님이다. 이 담임선생님은 말끝마다 ‘꿈과 열정’을 내세워 이만복을 압박한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라면서 이만복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만복은 결말에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담임선생님으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꿈과 열정 강박증, 성공 신화에 매몰되지 않는다. 이만복의 마지막 대사는 경쟁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력한 질문이자 저항이다. 이만복은 경보를 그만둔 후 원래의 이만복이 된다. 손가락 사진으로 비행기를 백 번 찍으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고, 수업시간에는 잠만 자고, 그러다가도 학교 앞 떡볶이집 자리를 차지하려고 운동장을 숨 가쁘게 달려간다. 이때의 이만복은 그 누구보다 해맑고 행복한 여학생이다.

 

<걷기왕>에는 담임선생님과 대립하는 인물이 또 있다. 이만복의 단짝 친구인 윤지현이다. 담임선생님은 꿈과 열정, 인내를 입에 달고 사는 인물이다. 그런데 윤지현은 이만복과 달리 담임선생님에게 당당하게 맞선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뭘 자꾸 참고 견디라고 하는 건데요”라고 말하거나, “저는 그냥 공무원 돼서 칼퇴하고 집에서 맘 편히 맥주나 한잔 때리고 싶어요. 아 뭐, 꿈이 어쩌고 열정이 어쩌고 저는 그런 거 딱 질색이에요. 그냥 적당히 하고 싶다고요.”라고 대꾸한다. 윤지현의 대사는 이만복이 경보 대회에서 경주를 포기하고,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으냐고 질문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걷기왕>에서 이만복과 윤지현은 스포츠에서 그리고 삶에서 무엇이 진짜 소중한 가치인지를 묻는다. 그런데 스포츠영화에서 ‘진정한 승리’는 1위도, 승리도, 목표 달성도 아니다. 스포츠영화의 이러한 주제는 주인공이 최동원, 선동열 선수와 같은 슈퍼스타이든 이만복과 같은 평범한 여고생이든 똑같이 표현된다. 그러고 보면 스포츠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승리하는 결말은 의외로 많지 않다. 설령 주인공이 승리한다고 해도 그 승리는 다른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의 하나일 뿐이며, 경기에서 패한 인물이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걷기왕>이 경보라는 종목을 선택한 점은 절묘하다. 경보는 달리면 안 되는 스포츠 종목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인터넷신문 '로컬데일리'에도 실려 있습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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