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글에는 심각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 <인사이드 르윈>의 이야기
르윈 데이비스(오스카 아이)는 ‘팀린과 데이비스’라는 포크 듀엣으로 활동하다가 파트너, 마이크 팀린이 조지 워싱턴 다리에서 떨어져 자살하자 솔로로 전향한다. 르윈은 당시 비트 세대의 아지트와 같았던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의 가스등 카페(Gaslight Café)에서 가끔 노래하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해 의기소침해 있으며, 지인들 집 소파를 빌려 하룻밤을 유숙하는 처량한 신세다. 어느 날 공연을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온 르윈에게 카페 주인 파피(맥스 카젤라)는 밖에 정장 차림을 한 남자가 기다리니 가보라고 한다. 후문으로 나온 르윈을 남자는 마구잡이로 폭행하고 사라진다. 르윈은 자신에게 호의적인 고파인 교수(이단 필립스) 집에서 그날 밤을 보낸 후, 그가 부탁한 고양이를 데리고 뉴욕 거리를 전전한다. 르윈은 저녁이 되자, 다시 하룻밤을 허락해줄 친구 진(캐리 멀리건)의 집으로 향하지만 이미 트로이(스타크 샌즈)라는 또 다른 가수가 소파를 선점한 상태다. 잠자리 문제로 옥신각신하던 중, 진은 르윈에게 임신했다고 쓴 쪽지를 트로이 몰래 건네준다. 저녁 무렵 가스등 카페에서 진과 그녀의 남편 짐(저스틴 팀버레이크) 그리고 트로이 세 사람이 즉석에서 노래하는 것을 보고 난 후, 장면이 바뀌면 르윈은 진의 집에서 잠을 깬다. 르윈이 트로이를 배웅하는 순간 고파인 교수가 맡긴 고양이가 창문을 통해 사라져버린다.
공원을 걷던 르윈과 진은 말싸움 중이다. 누구 아이인지 묻는 르윈의 질문에 진은 알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그에게 온갖 험담을 퍼붓는다. 결국 르윈은 진에게 낙태할 수 있는 의사를 소개시켜주기로 하고 시술 비용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한다. 르윈은 누이(지니 세랄레스) 집을 찾아가 또 다시 하루를 의탁하고 아버지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접한다. 누이는 아버지 집에 있던 르윈의 짐을 찾아 돌려주려하는데, 그는 필요 없다고 거절한다. 르윈은 고파인 교수와 통화하면서 고양이를 잘 데리고 있다고 거짓말하며 그를 안심시킨다. 교수는 짐이 레코딩을 하려는데, 갑자기 기타 세션이 펑크를 내, 대타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진의 수술비가 급하게 필요했던 르윈은 연주에 따른 저작권을 포기하고 200달러만 챙긴다. 르윈은 짐을 위해 기타 세션을 하면서 안면을 튼, 알 코디(아담 드라이버)의 집에서 며칠간 유숙하게 된다. 다음날 다시 만난 르윈과 진은 또 다시 언쟁중이다. 그녀는 아무런 계획 없이 사는 르윈이 못마땅하고 르윈은 예술가답지 않게 속물적인 진의 삶의 방식을 경멸한다. 대화를 하던 중 잃어버린 고양이가 커피숍 밖 유리창에 서성거리자 르윈은 재빨리 고양이를 데리고 온다.
잠시 같이 지내던 알이 엄마 차를 빌려 돌아오고 그는 친구가 시카고를 가는데 차를 쓰기로 했다고 말한다. 진의 집에서 유숙할 때, 트로이에게서 들었던 시카고의 뮤직홀, 뿔의 문(The Gate of Horn)과 거물 프로듀서 버드 그로스맨(F. 머레이 에이브러햄)이 생각난 르윈은 시카고로 연주 여행을 떠나는 재즈 뮤지션인 롤랜드 터너(존 굿맨)와 그의 비서 조니 파이브(가렛 헤드룬드) 일행에 합류하기로 한다. 시카고로 출발하기 전, 르윈은 진의 낙태를 시술할 의사를 찾아서 면담을 하다가 전 여자 친구였던 다이앤이 2년 전에 아이를 낙태를 하지 않고 고향인 오하이오의 애크런(Akron)으로 가서 출산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양이를 전해주려고 고파인 교수를 찾아간 르윈은 그곳에서 2살배기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고 있는 그린펑 부부가 건넨 아이 사진을 보고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심난해진다. 이때 고파인 교수는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르윈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르윈은 마지못해 마이크와 듀엣 시절의 애창곡 ‘Fare Thee Well’을 부른다. 르윈의 노래에 심취해있던 고파인 부인이 후렴구를 부르자, 르윈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막말하고 이에 충격 받은 부인은 울부짖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르윈이 짐을 챙겨 떠나려는 순간, 갑자기 고양이를 안고 나타난 부인이 이 고양이는 암고양이고 겉모습만 같을 뿐, 자기네 고양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릴없이 고양이를 떠안은 르윈은 롤랜드 일행과 함께 드디어 시카고 여정에 오른다.
포크 음악을 폄하하는 거만한 롤랜드는 사사건건 르윈의 신경을 건드리고, 과묵한 조니는 자신이 비트 세대의 대변자인양, 피터 오를로프스키(Peter Orlovsky)의 시를 암송하는 것을 제외하곤 입을 닫고 여정 내내 운전만 한다. 중간에 들린 휴게소 화장실에서 일을 보던 르윈은 "너 뭐하고 있니?(What Are You Doing?)"라는 낙서를 보다가 밖에서 들린 쿵 소리에 문을 열고 나간다. 화장실 바닥에 헤로인을 과도하게 투여한 롤랜드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르윈은 비서 조니를 부른다. 그러나 조니는 태연하게 롤랜드를 차에 싣고 시동을 건다. 일행은 비오는 밤길을 운전하다 피곤한 나머지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자고 있다. 이때 경찰관이 다가와 다짜고짜 음주운전을 했다면서 조니를 연행한다. 뒷좌석에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롤랜드가 앉아있고 조니는 경찰에 끌려가면서 차 열쇠까지 가져가버려 르윈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르윈은 고양이와 롤랜드를 차 안에 그대로 두고 지나가는 차를 세워 시카고로 향한다.
가까스로 ‘뿔의 문’에 입성한 르윈은 마침내 대중 음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실력자, 버드 그로스맨을 만나게 된다. 르윈의 노래를 들은 버드는 그의 음악이 상업성이 없다면서 솔로보다는 트리오를 제안한다. 버드의 제안을 거절한 르윈은 교대운전을 조건으로 동행을 허락한 낯선 남자의 차를 얻어 타고 뉴욕으로 출발한다. 남자 대신 눈길을 운전하는 르윈의 시야에 ‘애크런’이라는 도로 표지판이 들어오자 그는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작은 동물을 치게 되어 놀란 르윈은 차 밖으로 뛰쳐나오고, 상처 입은 고양이는 눈 덮인 덤불숲으로 사라진다. 뉴욕에 돌아와서 누이 집에서 하루를 보낸 르윈은 선원 조합으로 향한다. 음악을 그만두고 아버지처럼 배를 타기로 결심한 그는 주머니를 털어 회비를 내고 조합원 자격을 갱신한 후, 요양원에 있는 아버지를 뵈러간다. 아버지(스탠 카프)는 르윈이 이리저리 말을 걸어도 눈만 깜빡이면서 응답하지 않는다. 르윈은 기타를 꺼내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불렀던 청어떼(The Shoals of Herring)라는 곡으로 침묵에 잠긴 아버지를 깨우려한다. 그러나 르윈의 노래에 감동한 것처럼 보이던 아버지는 바지에 오줌을 싸고 있다.
진을 찾아간 르윈은 이제 음악은 그만두고 배를 타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진은 가스등 카페에서 400회 기념 공연을 하는데, 주인에게 노래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으니 놓치지 말라고 충고한다. 진은 머뭇거리는 르윈에게 그 자리에는 타임스 기자도 취재차 찾아올 것이라고 전한다. 자신을 위해주는 진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던 르윈은 진심으로 고맙지만 사양한다고 말하고서 선원 조합 대기실로 향한다. 그러나 잃어버린 회원증 재발급을 위해 또 다시 85달러를 내야한다는 말에 수중에 한 푼도 없던 르윈은 어쩔 수 없이 가스등 카페로 향한다. 기념 공연 하루 전날, 촌스런 차림새로 촌스럽게 노래하는 중년 여인의 수준 낮은 공연을 지켜보던 르윈은 그녀를 조롱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한바탕 소통을 벌인 탓에 카페에서 쫓겨난 르윈은 다시 고파인 교수 댁을 방문해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한다. 자살한 동료 마이크 이야기가 나와서 감정이 복받친 나머지 언행을 억제하지 못했다는 말에 고파인 교수는 이해한다며 다독거리고 또 다른 학계 동료들에게 르윈을 소개한다. 부엌에서 나온 고파인 부인은 르윈의 무례를 다 잊은 듯 그를 안아준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자 의아해하는 르윈에게 부인은 수고양이 ‘율리시즈’가 제 발로 집을 찾아왔다고 말한다.
아침이 되고 소파에서 자고 있는 르윈의 배 위에 율리시즈가 앉아있다. 르윈은 고양이가 도망치려하자 얼른 문을 닫는다. 그리니치 빌리지를 걷던 르윈은 동물들의 여행을 다룬 디즈니 애니메이션, <머나먼 여정 The Incredible Journey> 포스터를 흘깃 쳐다본다. 이윽고 무대에서 선 르윈은 오프닝에서 연주했던 ‘Hang Me, Oh Hang Me’와 ‘Fare Thee Well’을 최선을 다해 부르고 내려온다. 가스등 카페 주인에게 어제의 일을 사과하자, 주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반응하고 밖에서 정장을 입은 남자가 기다리니 찾아가보라고 한다. 자신을 이어 무대에 선 새로운 포크가수가 부르는 ‘Farewell’이 조용히 무대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면서 르윈은 카페 뒷문으로 나간다. 사내는 입을 함부로 놀린다는 이유로 르윈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후, “내 아내는 노래를 하고 싶었을 뿐이야.”라고 말하며 사라진다. 남자가 탄 택시를 향해 르윈은 인사(Au Revoir)를 건넨다.
1. <인사이드 르윈>의 공백
<인사이드 르윈>에 대한 평가는 좋은 편이다. 이 영화는 일반 관객 대상으로 진행한 2016년 BBC 앙케이트에서 21세기 최고의 영화 11위,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영화에서도 공교롭게 같은 순위인 11위에 등극했다. 그러므로 <인사이드 르윈>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겸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2013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이 작품을 두고 누군가는 인간의 내면을 통찰력 있게 다룬 영화로 기억하고, 누군가는 오스카 아이(Oscar Isaac)이 부른 노래에, 또 다른 누군가는 화면 전체에 감도는 우울한 분위기에 매료되었다고 토로한다. 이 영화의 미덕이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고양이 율리시즈를 초현실주의와 연결하거나 예술영화의 오래된 관습을 언급함으로써 작품의 감흥을 고차원적으로 표현한다. 앞서 나는 <인사이드 르윈>의 줄거리를 거의 트리트먼트 수준으로 분해해서 늘어놓았다. 길고 긴 줄거리 작성은 많은 사람들이 상찬하는 이 작품에 감동을 느끼지 못한 이유를 알고 싶은 개인적인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단 하나의 쇼트와 사소한 라인이라도 놓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광명(?)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극장을 나서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만족한 듯 보여, 시나브로 불안이 엄습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고 파스빈더(R. W. Fassbinder)도 주장하지 않았던가? 이해할 수 없는 것보다 두려운 것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코엔 형제는 나랑 궁합이 맞지 않는 것 같아.” 두려움에 맞서는 유일한 방어 기제로 내 자신을 위로하며 애써 <인사이드 르윈>을 외면한지 어언 10년, 나는 오래된 숙제를 해야겠노라 마음을 다잡으며 영화를 다시 접했다. 내러티브를 완벽하게 재구성하려고 시도했고, 이해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체를 조망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도 좀처럼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의 주인공 르윈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에게 구타당하고, 고양이를 구한다. 이는 ‘좋은 사람’을 소개하는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인물 구축법이다. 이런 멋진 극작법에 근거한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야기에 감동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공백 때문일 것이다. 진이 임신한 아이의 아빠는 남편인 짐인가? 르윈인가? 네 번 등장하는 고양이는 같은 고양이인가? 다른 고양이인가? 지하철에서 르윈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남자는 누구인가? 마이크는 왜 자살했는가? 고파인 교수 부부는 마이크의 부모인가? 그린펑 부부가 내민 사진은 다이앤이 출산한 르윈의 아이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롤랜드와 조니 시퀀스는 어떤 이유로 등장한 것인가? 르윈이 마지막에 가스등 카페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 이유는 진이 정말 카페 사장 파피와 '잤기' 때문인가? ‘뿔의 문’의 경영자이자 프로듀서인 버드 역에 <아마데우스>에서 천재 모차르트를 향한 질투심으로 눈이 멀어버린 살리에리(머레이 F. 에어브러햄)를 등장시킨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영화 내내 등장하는 공백들 중에 오롯하게 메워진 것은 중절모를 쓴 정장 사내가 르윈을 폭행한 이유 이외엔 없다. 그 이유 역시 우리를 헛헛하게 만든다. 오프닝과 클로징에서 정확히 반복된 이 장면을 두고 니체의 영원회귀를 떠올리던 순간, 그 수미상관은 아내가 노래하는 것을 방해한 르윈에 대한 남편의 징벌로 귀결될 뿐이다.
우습게도 나는 가장 큰 떡밥(?)이 회수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로 모든 공백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삭제한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번 이상의 테이크로 모든 OST를 진지하게 불렀다는 오스카 아이의 퍼포먼스에 감응하고, 전설적인 촬영감독 로지 디킨스(Roger Deakins)의 뒤를 이어 형제의 파트너로 등극한 브루노 델보넬(Bruno Delbonnel)의 매력적인 촬영술에 탄복한 나머지 이 모든 구멍을 스스로 봉합해버린 것이 아닐까? 이 공백들은 관객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훈제 청어(Red Herring)거나, 이야기에 동기를 부여하지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린 맥거핀(Macguffin)이다. 그도 아니면 예술이론에 정통한 사람들에게 익숙한 ‘초현실주의’의 기초적인 문법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코엔 형제는 지적인 감독으로 유명세를 떨쳤으며, 데뷔 때부터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불량스러운 장난으로 악명이 높았다. 밀러스 크로싱(Miller's Crossing)의 모자, <바튼 핑크 Barton Fink>를 수놓았던 온갖 미스테리들, <허드서커 대리인 The Hudsucker Proxy>의 다양한 서클 그리고 여전히 꿈에 볼까 무서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에 등장하는 안톤 쉬거의 정체! 형제는 훈제 청어, 맥거핀 혹은 그냥 악취미에서 출발한 이러한 공백들을 영화 속에 기입하는 이유를 “비평가를 놀리기 위해”라고 답한 적이 있다. 만약 형제가 여전히 그렇다면, 우리는 프린스턴 대학 철학과 출신의 머리 좋은 괴짜 에단(Ethan)의 장난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뉴욕 대학 영화과 출신 조엘(Joel)의 술수에 바보처럼 놀아난 셈이다. 비교적 저렴한 백오십만 달러를 투자해 당시 햇병아리였던 프란시스 맥도먼드(Frances McDormand)와 홀리 헌터(Holly Hunter)를 포섭해 만든 <블러드 심플 Blood Simple>을 개봉했던 1984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40년 동안!
2. <인사이드 르윈>의 공백을 채워보자.
코엔 형제의 팬들은 이 공백의 존재 때문에 그들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관객을 수렁에 빠트리지 못하는 코엔은 더 이상 코엔이 아니므로 이러한 구멍들은 그들 영화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구멍에 딱 들어맞는 벽돌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이것도 저것도 약간의 가능성을 지니므로 우리는 각자의 벽돌로 공백을 충실히 메워야 한다. 우리는 영화에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던 마이크가 왜 브루클린 다리가 아닌 조지 워싱턴 다리에서 추락했는지 실제적 자료들을 동원해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고파인 부부가 버릇없는 르윈을 왜 그리도 환대하는지, 마이크의 부모를 그들로 연결시키면서 이유를 추측해볼 수도 있다. 근거들은 영화 속에 널려있으며 반대 근거들 역시 즐비하다. 롤랜드와 조니가 등장하는 시퀀스는 1960년대 대중음악 씬을 공부하면 어느 정도 해결된다. 촌스런 음악이라고 치부되던 포크는 비트 세대가 등장하면서 점차 인기를 끌기 시작해 재즈를 위협했다. 롤랜드는 이런 시간적 배경 속에서 여전히 재즈가 위세를 떨치고 있던 시카고로 연주 여행을 가는 중이다. 마치 차원의 포털을 여행하는 것처럼, 일행은 얼어붙은 이슬비, 희미해지는 호박색 햇살, 그리고 시시각각 다양한 채도를 자랑하는 눈보라 속을 뚫고 지나간다. 거만한 재즈맨은 르윈과 친구 마이크, 무엇보다도 포크 음악을 멸시한다. 그가 생각하는 포크는 우크렐레를 뚱땅거리면서 C-D-G 코드 세 개를 반복하는 단순한 ‘카우보이 노래’일 뿐이다. 롤랜드는 끊임없이 "똥"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다가 똥을 싸야 하는 장소, 화장실에서 똥 대신 입에서 거품을 분출하며 기절한다. 재즈맨이 보기에 포크 음악도 똥이지만 “그 지팡이가 엉덩이까지 들어갈까요, 아니면 조금 튀어나올까요?”라고 거친 대거리를 하는 르윈도 똥이다. 르윈과 불장난을 했던 진 역시 그를 지속적으로 똥과 연결하고, 그가 손대는 모든 일이 똥처럼 변한다면서 그를 마이더스의 바보 형제(Midas’s Idiot Brother)라고 경멸한다. 그들의 말대로 르윈이 하는 모든 행동은 엉망진창이다. 그는 친한 친구의 아내와 바람을 피고 수입을 보장하는 저작권 대신 200달러만 챙기며, 선원증과 고양이를 잃어버린다. 설상가상 자신의 후원자에겐 막말을 늘어놓는가 하면, 타인의 무대를 방해한 벌로 흠씬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결과적으로 그가 계획했던 거의 모든 일은 언제나 어그러진다. 똥,똥거리는 재즈맨과 진의 경멸은 르윈이 처한 상황과 행동의 결과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르윈은 화장실 벽에 누군가가 쓴 낙서를 잊지 못한다. “What Are You Doing?”
고양이가 네 번 등장하는데 우리는 어쩌면 이 녀석들을 다 같은 고양이라고 해석하면서 물리학자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의 이론을 끌어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녀석은 암놈인지 수놈인지 알 수 없고 뉴욕에도, 시카고에도, 오하이오의 애크론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양이의 편재성(偏在性), 이 얼마나 완벽한 양자 역학의 결과물인가? 게다가 이 녀석의 이름은 율리시즈란다. 율리시즈는 호머(Homer)의 『오디세이』를 비롯해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아이네이스』,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서양인들이 신앙처럼 섬기는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소설 제목이 아니던가?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자 이타카의 왕인 율리시즈, 그는 20년간 에게 해를 떠돌면서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그리운 페넬로페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떠도는 긴 여정’을 율리시즈의 라틴어 이름인 ‘오디세이’라고 칭하며, 태양 탐사선과 <은하영웅전설>에 등장하는 전함에도 갖다 붙이지 않았던가.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두 주인공 스티븐 데덜러스와 리오폴드 블룸의 단 하루 일과를 다룬다. 그들은 잠에서 깨어난 뒤, 여러 가지 볼일을 보고 다음 날 새벽에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든다. 놀랍지만 이것이 『율리시즈』 줄거리의 전부이며, 르윈의 일과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율리시즈란 이름의 고양이, 이 고양이와 함께 했던 르윈 데이비스 그리고 시카고로의 이틀간의 여정은 우리에게 르윈을 율리시즈로 환치하도록 강요한다. 이토록 친절한 은유법을 관객이 간과할까 염려한 코엔은 영화 후반부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포스터(머나먼 여정: 실화를 바탕으로 한 환상적인 드라마라고 부연하며 포스터 맨 앞에는 고양이가 그려져 있다)를 통해 다시 한 번 고양이, 르윈 그리고 율리시즈의 상관성을 부각한다. 인생을 길, 항로, 여정에 비유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일비재하다. 물론 고양이와 르윈의 오디세이는 신화 속 인물 율리시즈의 모험과는 결이 다르다. 율리시즈는 긴 여정 끝에 고향에 돌아오게 되고 원하는 것을 얻지만 코엔의 인물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인사이드 르윈>이 “실패한 오디세이아인가?”라는 질문에 형제는 가볍게 대꾸한다. “성공한 오디세이아는 너무 흔해빠졌으니까!”
조이스는 책 출간 무렵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율리시스 속에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춰 두었기에, 앞으로 수 세기 동안 대학 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며 분주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불멸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만약 코엔 형제가 조이스와 같은 의도에서 <인사이드 르윈>을 제작했다면, 우리는 그들을 미워해도 될 것이다. 감히(?) 조이스를 스스로에게 비견한 것이 그 첫째 이유이며, <인사이드 르윈>이 『율리시즈』와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기엔 텍스트에 숨겨진 수수께끼가 너무 성기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조이스의 작품만큼, 코엔의 <인사이드 르윈>을 필사적으로 탐독하지는 않을 것이다. 독립영화계와 할리우드를 오가면서 40년 내공을 쌓은 형제가 이를 몰랐을까? 어쩌면 우린 코엔에 대한 오해를 접어야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조이스가 될 생각이 없었고 <인사이드 르윈>을 『율리시즈』와 비견할 의도도 없었다. 율리시즈의 여정은 돌긴 하지만, 결국 원이 아닌 목적지로 향하는 직선이었고 르윈의 여정은 똥 같은 반복이 지속되는 원형의 뫼비우스다. 그래서 우리는 <인사이드 르윈>을 오디세이와 '연결할 결심'과 헤어져야 한다.
3.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전기 영화인가?
토드 헤인즈(Todd Haynes)는 <아임 낫 데어 I'm Not There>(2007)를 통해 밥 딜런(Bob Dylan)의 전기를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헤인즈는 전기 영화의 전범을 따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전기 영화는 관객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기 위해 인물을 영웅으로 그리거나 신화화하기 마련이다. 역경을 딛고 마침내 성공을 거두는 플롯에 관객은 감정이입할 것이며, 이를 위해 감독은 인물의 삶을 연대기로 구성하여 유기적인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따라서 전기 영화는 일반적으로 가장 대중적 양식인 멜로 드라마의 충실히 공식을 따르게 되고 인물이 삶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이 녹아들게 된다. 영웅주의에 신물 난 관객을 위해 제작자가 간혹 반 영웅 서사를 전면에 내세우기도 하지만, 이 역시 영웅주의 드라마투르기를 비튼 것으로써 결국 전기 영화는 영웅주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딜런이 그 동안 자신에 관한 전기 영화를 허락하지 않았던 이유는 사실에 기반을 둔 메인 플롯에 다소간의 허구를 혼합한 드라마투르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인즈가 딜런을 설득한 무기는 기묘한 방식의 추정(presumption)이었다. <아임 낫 데어>에는 진짜 딜런이 단 한순간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딜런이 거기에만 없을 뿐(I’m not there), 헤인즈가 떠올린 추정 속에는 무수히 존재한다. 딜런의 거짓말까지 소환하여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딜런으로 진짜 딜런을 추정하려는 헤인즈의 작품에서 영감을 떠올렸을까?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은 그리니치 빌리지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자, 지금은 잊힌 존재인 데이브 반 롱크 (Dave Van Ronk)의 삶을 약간의 사실과 대부분의 허구를 섞어 재구성한 것처럼 보인다.
롱크의 별명은 맥두걸 가의 시장(Mayor of MacDougal Street)이었다. 맥두걸 가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중심을 통과하는 거리 이름이므로, 우리는 이 근사한 별명을 통해 그가 비트 세대의 포크 뮤지션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롱크는 딜런이 1961년 가스등 카페에 등장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전부터 이곳을 지킨 터줏대감이었다. ‘Van’이라는 네덜란드 식 미들 네임의 이미지와는 달리, 아일랜드계였던 롱크는 영화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짐 앤 진(Jim & Jean) 이외에 토니 팩스턴(Tom Paxton), 패드릭 스카이(Patrick Sky), 필 옥스(Phil Ochs), 조니 미첼(Joni Mitchell) 그리고 딜런이나 피터 폴 앤 매리(Peter, Paul And Mary) 같은 1960년대 포크 뮤지션들과 교류하면서 독특한 이력을 쌓았다. 심지어 딜런은 자신의 첫 앨범에 롱크가 편곡한 ‘House of the Rising Sun’을 수록했고, 이 곡은 1964년 애니멀즈(The Animals)가 리메이크 하여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초창기 포크 음악은 단어 뜻 그대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음악을 통기타로 편곡하여 부르는 경우가 잦아서 원작자라는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대중음악 팬들에게 ‘House of the Rising Sun’은 딜런의 원곡보다 에릭 버든(Eric Burdon)의 ‘짐승 같은’ 보컬이 너무도 강렬했기에 애니멀스의 리메이크 버전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저작권 개념이 없던 롱크는 시중에 흘러 다니던 전통 음악을 채보하여 이 곡을 포크 송으로 만든 장본인이었지만, 추후 어떤 이득도 볼 수 없었다. 우리의 예상보다 시류에 민감했던 딜런은 이 곡의 저작권자로 자신을 등재해 현재까지도 ‘추앙’받고 있다. 롱크 사후 2년 후인 2004년에 출간된 회고록, ‘Chronicles: Volume One’에서 딜런은 다음과 같이 롱크를 평가하기도 했다.
나는 반 롱크의 음반을 듣고 꽤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그의 레코딩 중 일부를 구절구절 그대로 베끼기도 했다. 롱크는 울부짖으면서 속삭일 수 있었고, 블루스를 발라드로, 발라드를 블루스로 바꿀 수도 있었다. 나는 그의 스타일을 좋아했다. 그는 뉴욕의 전부였다.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롱크는 진정한 거리의 왕이었다.
영화 속에서 롱크는 르윈 데이비스로 분해서 등장하지만, 사실 르윈과 롱크는 비슷한 점이 거의 없다. 롱크는 르윈과 달리 대중적인 포크가 아닌 흑인 음악을 접목한 포크-블루스에 천착했으며, 말년에는 톰 웨이츠(Tom Waits)에 버금가는 탁성으로 유명했다. 조니 미첼은 수많은 ‘Both Sides Now’ 커버 중에 여전히 롱크의 버전을 최고로 친다. 또한 롱크는 죽을 때까지 무정부주의자로 살았고, 르윈과 달리 사회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진 행동가였다. 게다가 롱크는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된 1961년에 이미 결혼한 상태였으며,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짐과 진’ 듀엣과는 특별한 접점도 없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팀린과 데이비스’라는 듀엣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고 미키 우즈(Mickey Woods)가 부른 ‘Please Mr. Kennedy’에 세션으로 참가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극중 짐이 노래를 부르고 알이 화음을 넣은 장면에서 르윈이 기타 세션으로 참여한 후에 단돈 200달러만 받고 저작권을 포기한 내용은 ‘House of the Rising Sun’에 얽힌 딜런과의 에피소드를 패러디한 것이다. 이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 롱크의 전처였던 테리 탈(Terri Thal)은 ‘빌리지 보이스’에 영화가 그리니치 빌리지와 롱크에 대해 제대로 묘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심지어 롱크와 교분을 나눈 그 시절 친구들은 롱크가 남에게 소파를 빌려줄지언정 그가 남의 소파를 빌리지는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코엔 형제는 롱크 사후에 출간된 회고록 ‘The Mayor of MacDougal Street: A Memoir’의 저작권을 공동 작가인 엘리야 월드(Elijah Wald)에게 구입했다. 하지만 형제는 “몇몇 에피소드만 가져왔으며 영화에 영감을 준 가장 큰 줄기는 롱크가 부른 곡들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 곡들마저 원본 그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사이드 르윈>은 헤인즈의 <아임 낫 데어>처럼 허구를 통해 1960년대 그리니치 빌리지를 주름잡았던 인물인 데이브 반 롱크를 그린 것일까? 헤인즈가 ‘추정’으로 진짜 딜런을 재현하려 했지만, 코엔 형제는 롱크라는 인물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면 비트 세대와 대중적인 포크 음악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당시의 풍경을 심도 있게 그리려 했을까?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허구적 요소가 너무 많아 다큐멘터리로서의 가치를 재고하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4. 도대체 영화에 삽입된 OST가 어떻기에?
지인 중에 <인사이드 르윈>의 OST를 자주 듣는 분이 있다. 그는 오스카 아이삭의 노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이삭에 반한건지 아니면 티 본 버넷(T Bone Burnett)의 프로듀싱에 매혹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지금도 유튜브를 통해 아이삭을 섭렵하고 있다고 하면서 영화의 OST가 도대체 어떤지 궁금하게 만든다. <인사이드 르윈>은 그 흔한 오프닝 시퀀스도 없이 르윈이 ‘Hang Me Oh Hang Me’를 부르면서 바로 본론에 들어간다. 이 노래는 롱크의 앨범에 수록된 곡이고, 포크 음악이 으레 그렇듯이 미 대륙에 오래전부터 떠돌던 노래를 채집한 것이다. <인사이드 르윈>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르윈과 롱크의 직접적인 연결점이기도 한 이 곡은 교수형을 애원하는 사람의 심정을 노래한다. 세상의 풍파에 시달리던 남자가 이젠 무덤에 들어가고 싶다고 읊조리는 가사는 르윈의 곤궁한 처지를 대변하며, 한편으로는 그가 겪을 고난을 미리 펼쳐 보인다. 시퀀스가 바뀌면 르윈은 고파인 교수에게 하룻밤 유숙을 허락해준 것에 대해 감사 메모를 남기고 있다. 이때 ‘Fare Thee Well’이 디제시스 밖에서 들린다. 이 노래의 가사는 ‘Hang Me Oh Hang Me’에서 죽음을 간청하던 남자가 세상을 하직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쓴 연시(戀詩)처럼 들린다.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강을 건너 당신에게 날아가겠다고 말하던 시적 화자는 느닷없이 “Muddy river runs muddy and wild. Can't give a bloody for my unborn child”라고 울부짖는다. “세상이 너무 험난해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피를 흘릴 수 없다.”라는 의미심장한 라인 이후에 연인에게 잘 지내라며 작별(Fare Thee Well)을 고한다. ‘Hang Me Oh Hang Me’와 ‘Fare Thee Well’을 영화의 서두에 배치한 이유는 시카코의 ‘뿔의 문’에 들러 버드 면전에서 부르던 ‘The Death of Queen Jane’을 통해 살짝 윤곽이 드러난다. 이 노래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민간에 전승되던 곡이고 헨리 8세(Henry VIII)의 세 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Jane Seymour)가 아들을 낳고 사망한 사건에서 유래한다. 가사는 제인이 헨리에게 제왕 절개라도 해서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부탁을 그리고 있지만 며칠 동안 산고에 시달리던 왕비의 소원이 이뤄졌는지 여부는 영화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코헨이 르윈 데이비스의 내면 탐험(Inside Llewyn Davis)을 위해 포크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형제는 ‘The Death of Queen Jane’을 ‘Hang Me Oh Hang Me’와 ‘Fare Thee Well’과 연결시켜 두 명의 잃어버린 자식(가사에서는 unborn child로 표현된다)을 떠올리는 르윈의 심리 상태를 그린다.
롱크가 언더그라운드의 왕이었다면 딜런은 오버그라운드의 황제였다. 가스등 카페를 거쳐 간 수많은 포크 가수 중에 딜런 만큼 성공을 거둔 이는 없었다. 이제 그가 쓴 가사는 미국 학생들의 영문학 교과서로 통하는 노턴 문학 입문(Norton Introduction to Literature)에도 수록되었고 2016년에는 고대하던 노벨상도 수상했다. <인사이드 르윈>의 후반부에는 딜런의 전설이 시작된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르윈 혹은 롱크는 마지막 무대일 수도 있는 400회 기념 공연에서 자신의 최고 히트곡인 ‘Hang Me Oh Hang Me’와 ‘Fare Thee Well’을 부르고 퇴장한다. 카페 주인 파피가 열창한 르윈을 박수로 맞으면서 밖에 누군가 기다리니 가보라고 한다. 르윈은 후문으로 가는 도중 자신의 뒤를 이어 볼멘소리로 노래하는 신참내기에게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부르는 노래가 자신이 마지막으로 불렀던 곡에 대한 화답처럼 들린다. 제목도 ‘Farewell’이며 가사 역시 의미심장하다.
So it’s fare thee well my own true love. We’ll meet another day, another time. It ain’t the leaving that That’s a-grievin’ me. But my true love who’s bound to stay behind(잘 가요 내 사랑, 우리 다른 날, 다른 시간에 만나요. 나를 슬프게 하는 건 이별이 아니라 뒤에 남을 진정한 사랑이에요.)
당연하게도 코엔은 음악을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용도뿐만 아니라,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로 사용하기도 한다. 존재의 이면을 탐색하는 노래들은 대부분 칙칙한 회색인데, 그런 어두운 색채로 영화 전체를 채우는 것은 코엔답지 못하고 이는 결코 그들이 자랑하는 블랙 유머의 배경으로 기능할 수도 없다. 우리가 아는 코엔이라면, 무거움 다음에는 상대적으로 가벼움을 동원하여 균형을 맞춰야 한다. ‘Please Mr. Kennedy’는 코엔의 균형 감각이 돋보이면서 현실을 적당하게 비튼 선곡이라고 할 수 있다.
Please Mr. Kennedy I don't wanna go(please don‘t shoot me into outer space)...Bubble helmet, Flash Gordon boots, Nowhere up there in gravity zero I need to breathe, don't need to be a hero. Are you reading me loud and clear?(케네디 씨 제발요. 저는 가기 싫어요(제발 저를 우주로 보내지 마세요)... 버블 헬멧, 플래시 고든 부츠가 있다 해도 무중력 상태의 저 위 어디에서도 숨은 쉬어야 해요. 영웅이 될 필요는 없어요. 내 말 잘 들려요?)
원래 이 곡은 미키 우즈(Mickey Woods)가 1961년에 출시했고 가사는 <인사이드 르윈>에 수록된 버전과는 달리 베트남 전쟁에 자신을 파병하지 말아달라는 병사의 심리를 노래한다. ‘Please Mr. Kennedy'가 발표되던 1961년 5월, 케네디는 부통령 린든 존슨과 합의해 400여명의 특수부대를 사이공에 파견했고, 이 뉴스로 인해 군인들 사이에는 전쟁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다. 하지만 우즈는 모타운의 베리 고디(Berry Gordy)가 발굴한 흑인 가수이며 원곡은 포크 장르와는 거리가 멀다. <인사이드 르윈>의 음악을 총괄한 티 본 버넷은 극의 통일성을 위해 원곡을 포크 스타일로 편곡한 후, 저스틴 팀버레이크(Justin Timberlake)와 코엔 형제가 개사한 가사를 덧붙여 영화 OST에 수록했다. 형제는 우주 개발과 대중음악으로서 포크의 서막이 오른 시기가 겹치는 것에 착안해 이 엉터리 리메이크를 마치 실제 존재하는 곡인 것처럼 작품에 삽입했다. 그래서 그런지 철저히 계산된 OST, 다양한 맥락을 알아야만 이해되는 가사들로 점철된 노래들에 쉬이 감동하긴 어려웠다. 만약 감동적인 요인이 있었다면 그것은 촬영하는 동안 모든 곡을 수백 번 연습하며 서른 번이 넘는 재촬영에도 불평하지 않았던 오스카 아이삭의 직업 정신이거나 몽환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사실적인 브루노 델보넬의 프레이밍 아니었을까? 어쩌면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1960년대, 가스등 카페, 비트 세대, 그리니치 빌리지, 롱크가 회고록에서 증언한 것처럼 “그 시절 남편 아닌 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경우도 허다했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극단적인 자유분방함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아닐까? 물론 이 경우에 노스텔지어란 단어는 어불성설이다. 경험하지 못한 시절에서 느끼는 향수는 아네모이아(Anemoia)다. 영화가 부리는 마법 중에 가장 근사하면서도 허망한 속임수인 아네모이아는 그 동안 영화를 지탱해온 큰 줄기였다.
5. 너 뭐하고 있니? (What Are You Doing?)
르윈은 그냥 고양이가 아닌 '낭만 고양이'로 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생선가게를 털지 않기 위해 그러니까 대부분의 고양이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지 않기 위해 '거미줄로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는 낭만적인 고양이'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언제나 열패감과 똥 덩어리 취급이 전부였다. 심지어 누군가는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왔던 것처럼, 화장실 낙서를 통해 “너 뭐하고 있니? (What Are You Doing?)”라고 조롱한다. 이 어이없는 장치를 고안한 사람은 에단 코엔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에단의 아이디어를 “맨날 똥 싸는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넌 뭐하는 사람이야? 너는 왜 인생을 그렇게 낭비해?”라고 해석해야 할까? 만약 이 조롱이 유일한 해석이라면, 처량한 르윈은 지금까지 세상의 '그저 그런' 고양이들처럼, 주는 사료나 먹고 집안에서 빈둥거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생선가게나 기웃거려야 한다. 르윈은 "What Are You Doing?"을 꿈이랍시고 기타나 뚱땅거리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긴 세상 혹은 신이 한 충고라고 여긴다. 이제 음악을 포기한 르윈은 아버지처럼 어부가 되기 위해 선원 조합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거부당한다. 그렇다면 세상과 신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땅에 눌러 붙어 있으라고 말하는 것인가? 코엔의 영화는 꿈꾸지 않는 삶의 방식을 “그냥 존재한다(just exist)”라고 표현한다. 르윈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그냥 존재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 삶의 방식의 끝은 바지에 오줌(똥)을 싸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중이다. 그런 삶을 거부하고 꿈이 쫒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던 르윈에게 ‘What Are You Doing?’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그냥 존재하는 삶에 발을 내딛기 전, 르윈은 꿈을 키웠던 가스등 카페로 향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르윈은 전혀 가수 같지 않은 중년 여인이 부르는 올드패션 스타일의 포크 음악을 듣게 된다. 누군가에겐 꿈이었던 가스등 카페에 저 중년 여인은 옆 동네에 가실 가는 차림새로 올라가 학예회에서나 부를법한 노래로 '신성한' 무대를 더럽히고 있다. 르윈은 여인이 자신은 물론, 가스등 카페와 포크 음악까지 모욕했다고 여긴 나머지 여인을 향해 고함을 지른다. 다음 날, 정신을 차린 르윈은 낭만 고양이로 살던 시절과 작별 의식을 치르듯,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라 최선을 다해 노래한다. 이어지는 플래시백, 또는 초현실주의 혹은 영원회귀 그것도 아니면 해롤드 레미스(Harold Ramis)의 <사랑의 블랙홀 Groudhog Day>의 오마주로 불려도 상관없을 그 쇼트가 우리를 기다린다. 르윈을 흠씬 두들겨 팬 다음 정장 사내는 “내 아내는 노래하고 싶었을 뿐이야.”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이제야 우리는 ‘What Are You Doing?’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여인은 그저 존재하는 것처럼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 뭐하고 있니?’는 조롱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살아가라, 즉 그냥 존재하라는 의미인 셈이다. 그렇게 산 존재는 결국 똥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세상에 똥이 아닌 게 없다. 아버지의 삶도 결국은 똥이 되었고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제 르윈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노래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일깨운 사내에게 잘 가(Goodbye)라는 말 대신 다시 보자(Au Revoir)를 외친다. 이 인사는 혹시 존재하는 방법을 망각하면, 그때 또 찾아와 혼내달라는 부탁인 셈이다.
"What Are You Doing?"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꾸지람 섞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아무리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도 비로소 그 결과를 통해서만 자신이 선택했던 방향이 옳았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미래의 결과를 예단하며 마냥 “잘 하고 있다.”라고 남에게 혹은 자신에게 덕담을 건넬 수 없다. 그러므로 'What Are You Doing?’은 ‘똑바로 살아라.’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살아라'. 즉, 존재하라는 의미이다. 그 결과가 비록 똥이 된다 하더라도. <인사이드 르윈>은 한 명의 밥 딜런만 주목받는 세상에 백명의 주목받지 못한 르윈들을 조명하므로 '따뜻한' 영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악동, 코엔 형제는 어쩌면, 그것 보다 그들 역시 자신을 돌아보며 끊임없이 서로에게 ‘What Are You Doing?’을 연발하는 것으로 서로의 존재 방식을 확인할 것이다. 잠시 숙연해지는 어느 때에 누군가의 삶을 그리는 자신들의 직업 역시 그냥 존재하기 위한 또 다른 방식이었음을 <인사이드 르윈>을 통해 의뭉스럽게 고백한다. 우리에겐 단지 존재했던 그들의 방식이 겉보기에 성공으로 보였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노래하고 춤추고 곡식을 수확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What Are You Doing?’을 듣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자.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열심히 존재하는 중이니까.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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