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마지막 영화 <희생>(1986)의 주인공 알렉산더는 배우로 일하다 은퇴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살아간다. 알렉산더에게는 아름다운 집과 아내와 딸 그리고 너무나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있다. 그럼에도 알렉산더는 기술 발전이 초래할 위험성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우울해하며, 돈과 소비주의와 인공적인 것들로 가득 찬 세상에 염증을 느낀다. 심지어 알렉산더는 인류 종말을 초래할 재난을 예감하며 깊은 근심에 빠진다. 그런데 유독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것처럼, 텔레비전의 보도를 통해 3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진다. 그리고 바로 뉴스가 진짜라고 입증하듯 폭격 소리 같은 게 들리더니 전기가 끊어진다. 아마도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인류의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다.
깊은 절망에 빠진 알렉산더는 한밤중에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한다. “주님, 당신을 믿는 이들, 믿지 않는 모든 이들을 구하소서.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집도, 사랑하는 아들도 버리겠습니다. 평생 말하지 않고 살겠습니다. 제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전쟁 이전으로) 되돌려주신다면, 약속한 모든 것을 지키겠습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인 듯 우편배달부 오토가 느닷없이 방문한다. 오토는 사실이지만 설명이 안 되는 사건을 모으는 수집가이기도 하다. 오토는 “이 모든 일이 끝나길 원한다면 마리아(알렉산더 집에서 일하는 하녀)에게 가서 동침하고 소원을 빌면 된다”면서, “마리아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특별한 여자”라고 황당무계한 말을 한다(타르코프스키의 설명에 따르면, “<희생>은 우화 같은 영화다”). 알렉산더는 오토가 “미쳤다”고 생각하지만, 달리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마리아를 찾아간다. 가는 길에 주저하기도 하는데, 마리아와 마주했을 때 알렉산더는 오토의 말을 진심으로 믿게 된다. 그는 마리아에게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한다. 마리아는 그의 애원을 받아들인다. 이때 두 사람이 동침하는 침대는 중력에서 벗어나 공중에 둥둥 뜨게 되는데, 정신적인 갱생과 영혼의 정화를 의미한다.
다음 장면에서 알렉산더는 자신의 집 거실 소파에서 깨어난다. 전쟁 같은 사건은 아예 일어나지 않은 듯, 모든 게 평소의 아침과 마찬가지다. 알렉산더가 지난 밤 겪은 모든 일이 진짜가 아니라 악몽 같기도 하다. 악몽이 아니라면, 알렉산더의 소원이 이루어진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환희에 찬 알렉산더는 바로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실천한다. 자신의 집을 불태우고 침묵(여기에는 현대인들이 빈말을 너무 많이 하는 데 대한 분노도 담겨있다) 한 채 가족의 곁을 떠나간다.
아마도 오토와 마리아를 제외한 알렉산더의 가족과 지인들은 그가 미쳤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광인(狂人)’(또는 성스러운 바보)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인물은 타르코프스키 영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스토커>(1979)의 스토커, <노스텔지아>(1983)의 도메티코를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스토커는 ‘금지구역’으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인물이다. 스토커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일을 하는 이유는 금지구역에 소원을 들어준다는 ‘비밀의 방’이 있기 때문이다. 스토커는 그 비밀의 방에서 오로지 타인을 위해 소원을 비는 성자 같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비밀의 방은 진심 없이 입으로만 나불대는 소원이 아니라 무의식의 차원에 숨겨진 소원을 들어준다. 예를 들면, 죽은 형을 되살리고 싶은 소원을 이루려고 비밀의 방에 들어갔던 호저라는 인물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엉뚱하게도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의식에서는 알지 못했지만, 무의식에서 정말 원했던 건 형의 부활이 아니라 돈이었기 때문이다. 스토커는 이번에도 희망을 품고 작가와 과학자를 금지구역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 어떤 소원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 비밀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인다. 스토커는 그들을 보며 또다시 절망을 느낀다. 만일 그가 알렉산더를 만났다면, 소망을 이루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희생>은 거의 30년 만에 재개봉될 예정인데, 영화가 만들어진 지는 거의 40년이 되어간다. 타르코프스키는 소련 당국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1984년에 서방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그는 서방 세계에서 어떤 희망도 발견하지 못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고, 물질문명과 소비주의와 감각적인 쾌락에 젖어 있는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는 “대다수 현대인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아니면 위대한 것,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시간의 각인>, 271쪽)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암 선고를 받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인류의 미래를 깊이 근심하는 예술가로서 <희생>을 남겼다.
이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접하게 되었을 때, 시대착오적인 영화로 평가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겪은 예술가의 편집증이 낳은 작품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행하게도 타르코프스키가 근심했던 세상은 나아지기는커녕 전방위에 걸쳐 점점 더 나빠지는 중이다. 왜냐하면 원고를 쓰는 현재 폭염이 기승을 부리며 전례 없는 더위를 시전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 더위가 올해 여름이 앞으로의 여름에 비하면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거나, 지구온난화로 인한 임계점이 무너져 기후가 되돌릴 수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거라는 등의 흉흉한 경고가 실현되는 증거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에 온갖 비관적인 전망까지 난무하는 중이다. 그리하여 세상(인류)의 종말이 진짜 눈앞에 다가왔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정신적 발전은 물질적 발전보다 열등하며 우리는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것은 인류의 발전 과정이 조화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영적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최근 지구상의 삶은 우리 개인의 자아를 가능한 빨리 구원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삶을, 나아가 예술을 부정하도록 만들어버린 듯 보인다.… 사실 우리 미래의 가장 큰 우려는 전쟁이 아니라 인간 생존을 위한 생태적 틈새가 점차 파괴된다는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예술과 구원의 문제는 점점 중요해지고 있으며 제때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다.”(<타르콥스키, 기도하는 영혼>, 121~124쪽)
사진 출처: 엣나인필름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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