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끝은 어디로 귀결 되어야 할까. 어떤 사안 혹은 인물에 대한 분노는 대게 그 일이 얼마나 황당하게 일어났는지, 혹은 그 사람이 얼마나 뻔뻔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며 순식간에 타오른다. 사실 이는 상당한 에너지일텐데, 이후 이 에너지가 어떠한 결말에 닿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이것이 무엇을 바꿀 수 있었는지, 혹은 그 누군가를 확실하게 처벌할 수 있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이라도 할 수 있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곱씹기 힘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분노를 자아내는 것은 매우 쉬우면서도 강력해서 그 순간의 분노 이상을 떠올리기 어려운 까닭이다. 분노만으로 마음은 충분히 움직였고 그렇기에 어떤 사안에 가닿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 이것 역시 분노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일지 모른다. 특히 모두가 합의한 공분을 사는 일이라면 더더욱 분노 그 자체가 도드라질 생각할 확률이 크다. 영화 <행복의 나라>가 등에 업은 것은 이처럼 합의된 분노의 자극이다. 그러나 이는 실체가 없는 곳을 향하며 분노의 의미조차 공허하게 만든다.
영화 <행복의 나라>는 분명 실제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1979년 10월이라는 시간, 궁정동 안가에서의 대통령 사망과 그를 저격한 중앙정보부장, 그의 명령으로 내란 혐의를 받고 재판장에 선 유일한 현역 군인과 그를 구하기 위해 재판에 뛰어든 변호사, 이 모든 상황을 빠르게 종결시키려는 합수부장 등에 맞춰진 포커스는 실제의 사건과 인물을 연결시키는 데에 무리가 없다. 이미 <그때 그 사람들>(2005)이나 <남산의 부장들>(2020), <서울의 봄>(2023) 등에서 설명한 바 있던 10.26에 대한 정보는 <행복의 나라>에서도 비슷하게 제공되며 이 작품이 어떤 사건을 중심에 두었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하는 것이다. <행복의 나라>가 조금은 다른 방향을 선택한 것은 10.26 이후, 무수히 이름이 오르내렸던 이가 아닌 그를 수행하던 현역 군인과 그를 살리려는 변호사라는 다른 인물로의 접근이었다. 깊이 설명되지 못했던 인물에 대한 미시적 접근, <행복의 나라>는 그것에 관심을 기울인 듯 했다.
이기는 것이 중요한 변호사 정인후(조정석)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박태주(이선균)와의 갈등, 더 큰 인물에 집중하면서 곧 잊힐 군인을 변방에 둔 변호사들과 이를 꼬집는 인후의 대사 등은 이 작품이 승리를 염두에 둔 채 흐린 눈으로 보았던 무수한 시선들을 대척에 둔 것처럼 보였다. 거대한 신념 아래 쉽사리 적군과 아군을 가르고, 아군이라면 모든 것을 수용하려던 일련의 태도들은 정인후의 분투와 박태주의 희생에서 조금은 새로운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다른 시각을 기대하게 했던 <행복의 나라>는 몇몇 대사를 금세 날려버리고 곧 분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갑작스레 과도한 허구가 끼어들고 한 사람을 향해 분노하라는 메시지가 앞장서며 과잉으로 나아간다. 전상두(유재명)는 바로 이 분노를 위해 서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전상두를 향한 분노로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전상두가 도드라지는 영화의 전후반 두 장면, 그러니까 변호를 위해 모였던 정인후가 우연히 전상두를 마주쳐 대화하는 전반부의 장면과 박태주를 살려달라며 골프장을 찾아온 정인후가 전상두에게 애원하는 후반부의 장면은 정인후를 깔아 뭉게려는 전상두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 장면들은 정인후로 대변되는, 그러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었이고 처음의 태도가 어떠했든) 신념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이를 지킬만큼 힘을 지니지 못했던 당대의 많은 이들과 이를 힘으로 찍어누르려는 한 인물과의 대립, 혹은 그의 핍박을 보여주기 위해 구성된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면의 과잉에서도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장면들은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들, 소위 ‘실제사건을 바탕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구성’한 부분에 속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전상두로 떠올릴 수 있는 인물에 대한 반감은 이미 디폴트에 가깝다. 숨겨지지 않았지만 끝까지 은폐하려 했고 무책임한 말로를 보여주었던 이에 대한 적개심은 충분히 쌓여있다. <행복의 나라는>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반한 한 적개심을 활용하면서도 그 방향을 허구로 돌리면서 가공된 인물을 향한 분노에 닿게 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영화 속 전상두라는 인물을 향한 분노는 마치 그 시기의 부조리에 대해, 혹은 비인간성에 대해 함께 분노하며 역사적 상황에 개입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지만 실상은 허구를 향하며 그 무엇과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심박수 챌린지에서 숫자로 표시되는 분노들은 어떤 과거에도 개입할 수 없는 낭비된 감정일 수밖에 없다. 영화가 계엄사령관(이원종)의 증언이 12.12로 인해 좌절되었다는 설정으로 다시금 전상두를 향한 분노를 유발하는 것은 바로 이 낭비의 극점을 찍는다.
이에 따라붙을 질문은 물론 알고 있다. <행복의 나라>는 영화이며 다큐가 아니라는 것, 당연하다. 전혀 다른 인물로 누군가를 대신하고 어떤 시기를 재소환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정교한 사실을 전달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모순적으로 역사를 이용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작품은 왜, 어떤 부분에서는 역사적 사실로 편의를 누리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역사적 사실이 거세된 채 해석되길 바라는가? <행복의 나라는>는 자막으로 알려준 시공간, 비슷한 이름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인물들로 이 작품 속에서 의문을 떠올릴 수 있는 많은 것들, 왜 대통령을 저격한 이를 쉽게 사형수로 규정하려하지 않는지, 무슨 이유로 인물들이 갈등하는 것인지와 같은 복잡한 문제를 설명하지 않은 채 영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분명 역사에 빚을 진 이 영화에서 정인후와 전상두의 갈등만을 허구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결과는 과연 적절한가?
최근 5공 유니버스라는 용어가 생길 만큼 이 시기를 그리는 작품들이 많아졌고, 영화를 통한 시대와의 교감, 혹은 학습이 유희처럼 자리했다. 흥미로우면서도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현상인 듯하다. 과거를 그리는 많은 영화들은 사실 속에 허구를 구성할 수밖에 없고 이 경계는 교묘히 무화되면서 특정한 이미지와 감정을 남긴다. 이때의 감정의 부스러기들 속 분노는, 환희는, 혹은 불안은 그 시대를 향한 역사 의식인 듯 자리하기 쉽다. 이 사이에서 그 상황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영향을 미쳐 현재에 이르게 됐는지와 같은 역사에 대한 적절한 접근은 상실되기 쉽다. <행복의 나라>가 허구를 향해 분노하게 하는 것, 이는 이 상실을 끌어내는 가장 위험한 방법일지 모른다.
** 극 중 박태주와 이선균 배우가 겹쳐 보이는 것, 과거엔 떠올릴 필요 없었던 유사함이 지금에 읽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없었어도 좋았을 그 기시감을 배우이기에 남길 수 있던 것, 아니 남길 수 밖에 없던 것도 슬픈 일이다. 아마도 박태주가 견뎌낼 수 없던 것은 그도 견딜 수 없었던 듯하고, 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것은 박태주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듯 하다. 한 배우가 이렇게 기억되기로 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행복의 나라>(2024)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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