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출과 연기
영화 <더 파더>(플로리안 젤러 감독, 2021)에서 '시간'과 '기억'은 모두가 영원을 염원하지만 언제인가는 어두운 방 벽면에 걸린 액자 속 그림처럼 정지될 것으로 그려진다. 인생의 시작은 찬란하고 그 과정은 다채로우면서도 그 끝은 처연할 것이라는 불안. 그것은 탄생 이후 죽음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시간'과 '기억'에 대한 근원적이고도 막연한 감정이다.
플로리안 젤러는 이 작품 <더 파더>를 다분히 연극조로 연출함으로써 그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보편적인 정서임에도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이라 여겼던 그 감정이, 플로리안 젤러 특유의 냉소적 연출과 앤서니 홉킨스, 올리비아 콜맨이라는 두 명배우의 절제되고 호소력 있는 연기로 객관화되어 보는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2. 죽음에 대한 근원적 불안
<더 파더>에서 앤서니(앤서니 홉킨스)의 '시간'과 '기억'은 어두컴컴한 영국식 공동주택이라는 공간 안에 배치되어 있다. 앤서니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주요 공간으로 설정된 이 집밖을 나서지 않음에도 스스로는 그것에 큰 답답함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내 집(my flat)'임을 강조하며 떠나줄 것을 종용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앤서니는 자신의 딸 앤(올리비아 콜맨)에게만큼은 친밀감을 표시하지만 앤은 그런 상황이 그리 기쁘지만은 않다.
사실 관객들의 입장에서 앤서니는 명백히 자신의 집에 갇혀 있다. 극의 종반까지도 그것이 강제된 것인지 자발적인 것인지는 모호하게 진행되지만 극 직전까지 앤서니의 모습은 마치 중세 시대 초상화처럼 그 공간에 정지되어 있는 듯 보인다. 심지어 사람들과의 교류 없이 홀로 음악을 듣거나 창밖을 내려다보는 장면에서는 그 공간에 박제되어 배치된 정물화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것은 정지된 채 현실적이지만 이미 지나고 없는 것들에 대한 영원을 기원하며 사실적인 그림으로 옮겨 놓은 르네상스 화풍의 풍경화나 바니타스 정물화를 떠올린다. 이는 아마도 플로리안 젤러가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시간'과 '기억'이란 것의 속성이 아닐까?
3. 생에 대한 근원적 욕망
영화 속에서 인지장애로 불안과 망상에 시달리는 아버지 즉, 앤서니에게 안정감을 선사하는 존재로 그의 딸 앤이 등장하지만 그녀가 앤서니의 생활 반경 내에 있는 실존 인물인지 아니면 단지 그 아버지(the father)의 왜곡된 기억이 만들어낸 환각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앤서니에게는 휴식과도 같은 앤 또한 플로리안 젤러 감독이 창조해 놓은 앤서니의 어두운 방 즉, 카메라 옵스큐라 속에서 만져질 듯 만져지지 않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앤이라는 존재는 현실과 망상의 매개체와도 같다. 그녀는 앤서니로 대변되는 인간의 나약함을 극복하고 안정적인 일상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생의 의지를 발동시킨다. 동시에 언제 다시 불안정한 상태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불안을 형성하며, 그 때문에 안정적인 일상에 대한 광적 집착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점에서 앤이라는 존재는 한 인간의 삶을 일대 혼돈으로 뒤흔들어 놓는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앤이 아버지의 집으로 올 때마다 앤서니에게 주는 안정감은 그에게 불안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불안은 결국 죽음 앞에서 나약하기만 한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 무한한 슬픔에 빠지게 한다.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응용언어학자. 한국어교육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하며 담화분석과 대중문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교육원을 수료했으며, 무궁화 스토리텔링 공모전 동화 입선, 서울국제사랑영화제(SIAFF)에서 기독교 영화 비평 대상 수상,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 등을 했다. 만화평론상, 대종상,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심사위원 및 영평상 집행부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한국어학과 초빙교수 및 한국어교육원장,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집행부, 한국문법교육학회 편집이사 등으로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