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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장손> 가부장제의 붕괴 속에서 찾는 가족의 진실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장손> 가부장제의 붕괴 속에서 찾는 가족의 진실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4.09.09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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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장손>은 3대 대가족의 내밀한 역사를 통해 세대, 젠더, 계급 갈등이 충돌하는 가장 한국적인 가족의 초상을 스크린에 펼쳐낸 오정민 감독의 첫 장편영화이다."

 

영화 <장손>은 한 가족의 미시사를 통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흔적을 드러내며,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각 세대가 마주한 갈등과 상처를 깊이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주인공 김성진(강승호)은 할머니 오말녀(손숙)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가족 간의 갈등과 숨겨진 비밀을 마주하며, 장손으로서의 부담과 개인적 자아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영화는 전통적인 유교 가부장제의 붕괴와 그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들이 겪는 감정적 동요를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족이라는 공간, 갈등의 집합체

<장손>은 한 가족의 내부 갈등을 통해, 대한민국 가족의 구조적 변화를 냉철하게 조망하며, 가족이라는 틀이 어떻게 해체되고 변모하는지를 다층적으로 탐구한다. 이 영화는 단순히 가족 드라마에 그치지 않고, 세대 간 갈등, 근현대사의 상흔,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불안을 동시에 다루는 서사적 깊이를 지니고 있다.

 

특히 영화는 세대 간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선택한다. 할아버지 승필은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가족을 지켜온 상징적 인물로, 그의 시대적 상흔은 가족 구성원들에게도 전해진다. 아들 태근과 딸들은 각기 다른 세대의 가치를 상징하며, 그들이 겪는 내면의 갈등은 곧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압축판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단순한 가족 이야기를 넘어, 세대와 젠더, 계급 간의 갈등을 동시에 다루는 큰 집의 형체를 가지고 있다.

 

계절을 통한 서사적 전개: 자연과 인간의 공존

영화의 비주얼 측면에서 <장손>은 계절의 변화를 서사의 중요한 장치로 활용한다. 여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계절의 흐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의 내면과 관계 변화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중요한 도구로 작동한다. 여름의 밝고 활기찬 장면들에서는 가족 간의 표면적 화목함이 드러나지만, 가을과 겨울로 접어들면서 인물들의 감정선이 더욱 날카롭게 변하며, 가족의 갈등은 절정에 이른다. 감독은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이러한 감정 변화를 시각화하며, 자연의 무심함과 인간의 복잡한 감정 세계를 교묘하게 대비시킨다.

오정민 감독은 이 영화에서 계절을 단순한 시간의 흐름으로 취급하지 않고, 서사적 장치로 활용하여 인물들의 내적 갈등과 사회적 변화를 드러낸다. 특히 가족사진을 찍는 여름 장면에서 따뜻한 자연 풍경과 화목한 분위기가 담겨 있지만, 그 속에는 각자의 내면에 감춰진 갈등과 불안이 스며들어 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카메라는 더욱 정적이고 냉정하게 변하며, 가족 내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여름의 동적인 카메라 움직임에서 겨울로 가면서 점점 정적인 픽스 쇼트로 변화하는 연출 방식은 영화의 몰입도를 높이며, 인물들의 내적 혼란과 고독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죽음’이라는 커다란 사건보다는 이를 직면하는 인물들의 일상 풍경에 주목한다.

- 오정민 감독

 

캐릭터의 다층적 해석: 명암이 공존하는 인물들

<장손>의 인물들은 선악으로 단순히 구분되지 않는다. 각 인물들은 명암이 공존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지며, 영화는 그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탐구한다. 주인공 성진은 장손의 책임과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로, 그의 고민은 단순히 개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세대와 가족, 사회적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성진의 할아버지 승필은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가족을 지키려는 인물로, 그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은 가족 내 갈등을 일으키지만, 동시에 그가 지닌 시대적 맥락을 이해하게 만드는 복합적인 감정선을 제공한다​.

영화는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로 더욱 빛난다. 주인공 성진을 연기한 강승호는 장손의 책임과 배우로서의 꿈 사이에서 갈등하는 복잡한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손숙, 오만석, 차미경 등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에 현실감을 더해주며, 각 인물은 단순히 선악으로 구분되지 않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이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상처와 트라우마가 영화 전반에 걸쳐 서서히 드러나며 관객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특히, 이 영화의 장점은 영화 속 제사 의식과 장례 장면은 전통적인 한국 가족의 모습을 세밀하게 담아내면서도, 그 속에서 희극적 요소를 놓치지 않고 있다. 갈등과 슬픔이 공존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때로는 유머를 통해 관객에게 숨 쉴 틈을 주며, 웃음 속에 숨겨진 깊은 슬픔을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이러한 균형 잡힌 연출은 관객이 무거운 주제 속에서도 부담 없이 영화를 즐길 수 있게 한다.

 

세대의 퇴장과 새로운 길

영화 <장손>은 죽음을 통해 가족의 재결합을 시도하지만, 그 재결합은 곧 분열을 의미한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비롯된 가족의 만남은 오히려 갈등의 폭발로 이어지며, 가족의 해체는 필연적인 결말처럼 다가온다. 특히 유산 문제는 가족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하며, 이 영화는 물질적 가치가 가족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예리하게 분석한다. 감독은 가족 구성원들이 돈과 유산을 둘러싸고 벌이는 갈등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결말은 할아버지 승필의 퇴장과 성진의 새로운 시작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며, 세대 간의 충돌과 화해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장례식이 끝난 뒤 성진이 밝은 햇빛을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가 가족의 유산을 받아들인 동시에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반면, 할아버지 승필이 산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세대의 퇴장을 암시하며, 전통적 가부장제의 끝을 상징한다. 이러한 장면은 관객에게 묵직한 여운을 남기며,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각자 나아갈 방향을 찾는 것이야말로 삶의 큰 질문임을 상기시킨다.

영화 <장손>은 한국 가족 영화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세대 간 갈등과 가족 해체라는 현대적 문제를 깊이 있게 탐구한 작품이다. 오정민 감독은 가족을 주제로 대한민국의 역사적, 사회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단순한 가족 드라마를 넘어선 사회적 비판을 담아냈다.

 

<장손>의 서사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 오즈 야스지로의 <꽁치의 맛>,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처럼 한 가족의 미시사를 통해 사회의 거시사를 조명하는 작품들과 맥을 같이 한다. 또한 임권택의 <축제>, 박철수의 <학생부군신위>처럼 한국의 전통 장례문화와 풍자, 해학을 결합해 슬픔을 이겨내려는 태도까지 담아내며,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독립영화계에서 '웰메이드 인디버스터'로 평가받는 <장손>은 현대 가족 드라마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감독의 에너지와 부단한 노력이 응축된 결과물이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영화학박사. 전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전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전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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