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들은 몇 가지 루틴을 고수해왔다.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괴이한, 괴상한 존재들을 스크린에 적극 개입시킨 뒤 그들의 세계를 축조해서 관객들과 공유하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이트메어 앨리>는 얼핏 보기엔 그의 작법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때 <나이트메어 앨리>는 관객들이 스스로 괴상한 존재(뱀파이어 헌터, 헬보이, 어인, 기인 등)를 찾을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델 토로 세계를 확장하는 변곡점이 된다. 각종 특수분장을 하고 그래픽 조작을 동원해야만 기인이 된 채로 스크린에 현현하는 게 아니라, 그 어떤 존재이든 기인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스탠턴이 정해진 운명의 수렁 속으로 제발로 걸어들어간다. 극의 초반부에서 스탠턴은 약과 술에 취해 사리분별이 어려워진 기인을 보면서 복잡한 속내를 드러냈다. 그런 그는 스스로 기인이 된다. 결심이든 선택이든 강요든 운명이든 간에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의 잘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다. 관객인 우리가 각자 스탠턴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 누군가에게 스탠턴은 야망에 눈 먼 이로, 누군가에겐 한심한 인간 말종일 테다. 이 질문이 유효한 이유는 바로 <나이트메어 앨리>가 관객들의 능동적인 감상을 유도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쉽게 말해 영화가 스탠턴을 세계 내부의 사람들과만 소통하는 차원에만 가둬놓지 않고, 그를 관객과 연결하는 지점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는 것.
감시자의 존재를 환기하는 <나이트메어 앨리>는 시종 영화 안팎의 경계를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은 설계된 인생을 살고 있었다. 트루먼만 제외하고 그의 삶을 바라보는 이들은 모두 그가 텔레비전 쇼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프리 가이> 속 가이의 삶도 마찬가지다. 게임 유저를 포함한 외부의 존재는 가이가 오픈 월드 게임 속 NPC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스탠턴의 경우엔 어떠한가. 스스로 어떤 길로 가고 있는지 인지한 채 파멸로 이르는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수렁에 잠식되고 있는가? 사실 이건 논의 대상일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우리가 그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하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운명론이나 자유의지를 따지는 작업은 거칠게 말하면 의미가 없다. 이 삶이 스탠턴의 선택이든 아니든, 관객들은 각자가 마주한 스탠턴의 모습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그런 맥락에서 <나이트메어 앨리>는 인간의 지각 체계를 종종 건드리는 장면들을 통해, 관객들이 스스로 스탠턴의 삶을 판단해보라고 시험하고 있다. 극중 그린들이 거짓말 탐지기를 이용해 스탠턴이 사기꾼인지 아닌지 판별하려는 신을 살펴 보자. 이 상황에서 거짓말 탐지기를 통해 나타난 신체 생리 변화 데이터를 들이밀 때, 스탠턴이 기지를 발휘해 실체가 있는 거짓을 실체가 없는 거짓으로 덮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맥박이나 호흡 등 신체 리듬의 미묘한 변화는 측정기라는 매개물을 거쳐서 인간에게 인지될 수 있다. 의뢰인은 스탠턴이 영매인지 사기꾼인지 감별하기 위해 측정이라는 행위를 도입한다. 이때 ‘측정 가능한 것’이 제대로 측정되는 순간, 스탠턴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균열을 내고 있다. “지금 여기 혼령이 있다”고 말이다.
측정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직면한(정확히는 직면했다고 착각한) 인간은 규명하던 작업을 모두 내려놓고 혼란에 빠지거나 압도당한다. 극중 인물들은 스탠턴의 술수에 넘어가, 망자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믿는다). 신체 변화라는 실체감은 진실임에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휘발되어 버리는데, 스탠턴이 만들어낸 허황된 거짓의 감각은 그 어떤 때보다도 실감 나게 사람들을 쥐어삼킨다. 문제는 이 구간에서 극중 인물들뿐 아니라 관객인 우리들 역시 스탠턴에 대한 판단이나 생각을 각기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스탠턴이 거짓을 연기하는 것인지, 정말 그 순간에 빙의된 건지 (정확히는) 알 길이 없지 않나. 그러니 그의 면모에 대한 판단의 근거를 관객들이 능동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영화가 감독의 테마를 충실히 계승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가 늘 그래왔든 <나이트메어 앨리> 역시 몸과 관련된 물질적인 감각과 결부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델 토로의 세계는 언제나 표면에 드러나는 시각 요소나 물질적 감각이 감상자의 인지 체계를 조종하거나 때로는 압도하는 영화였지 않나. 그런 점에서 <나이트메어 앨리>는 같은 테마를 다루더라도, 그 속에서 얼마든지 변주가 가능하다는 점을 세련되게 드러내는 델 토로 세계의 확장판이 되겠다. 그러니 <나이트메어 앨리>는 괴이한 존재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아도, 판타지 세계관을 공들여 구축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런 요소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그 경로를 탐색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는 셈이다.
글‧송상호
영화평론가, 경기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글을 쓰고 있다. 2021년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수상.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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