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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무것도 없다 <수유천>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무것도 없다 <수유천>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4.11.11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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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빨갱이니?” 홍상수 영화에서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이 단어를 듣게 되는 <수유천>(2024)은 <밤과 낮>(2008)에서 유학생 경수(이선균)에게 김일성에 관해 묻는 성남(김영호)의 대사 이후로 가장 정치적인 소재를 등장시키는 영화이다. 그 정치성은 북한 사람인 경수처럼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단역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주연 중 하나인 시언(권해효)이 정치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몇 년째 일을 못 하는 인물로 등장하며 이러한 인물의 전사(煎史)가 이야기 구조의 한 축을 담당하여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예컨대 시언은 대학 교수인 조카 전임(김민희)의 부탁을 받아 학생들이 참여하는 촌극의 연출을 맡게 되는데, 그가 연출을 맡았다는 사실과 촌극의 내용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대학 총장으로부터 담당자인 전임과 그녀의 상사인 정교수(조윤희)가 문책을 받는다. 또한, 시언이 받았던 정치적 탄압은 그가 맡은 연극의 원래 연출자였다가 배우 세 명과의 스캔들로 잘린 준원(하성국)이 받는 비난과 대구를 이루며 공명하게 된다.

하지만 32편의 장편 필모그래피가 쌓이는 과정에서 이전 작품들이 쌓아온 일관성에 어긋난 형식이나 내용의 변화가 홍상수가 구축해 온 영화 세계를 무너뜨리거나 해치는 경우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수유천>의 정치성 역시 알레고리와 같은 특별한 의미화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단지 하나의 소재이자 인간 삶과 사회에 늘 반복되는 사건으로서 사랑과 죽음, 술과 담배와 같은 일상적인 상황으로 존재한다. 전에 없이 인물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밤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물안에서>(2023)에서 초점이 맞지 않는 화면을 보았던 관객이라면, 밤 장면에서 어둠이 인물들의 얼굴을 집어삼키고 목소리로만 대화하는 것 같은 이 장면이 기이하게 다가올지언정 특별한 변화라 강조하기 어려울 것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수유천>의 핵심은, 홍상수의 영화가 늘 그렇듯, 이야기 구조이다. 전임이라는 주인공이 있고, 그녀는 자신이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이며 한강에서부터 수유천으로 거슬러 오르는 연작을 작업하고 있다. 전임이 하류에서 상류로 물의 흐름과 반대로 강의 구조를 보는 것처럼, 자신의 일상에서 겪게 되는 사건에서도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오르며 인간 삶의 구조를 마주하게 된다. 시언이 40년 전 촌극을 만들었던 과거와 현재가 대구를 이루고 준원의 상황과 거울처럼 마주 보게 되는 것과 같이,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는 삼촌의 모습을 관찰하는 전임 또한 자기 작품과 현실의 사건이 구조적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둠으로부터

과거는 우연한 계기로 10년 만에 만나게 되는 전임과 시언처럼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나타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둠으로부터 와 통제되고 평온한 삶의 울타리 넘어로 침입한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고초를 겪었던 시언은 현재 강릉에서 책방을 하며 평온함을 이루는 것에 만족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첫사랑에게 큰 잘못을 저질러 상처를 줬다고 고백하는 시언은 그것을 오래전 일이라고 위로하는 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맞아 근데 내가 기억하니까, 있었던 일이니까, 내 기억 속에는 그대로 있으니까, 난 그대로 느껴, 오늘만 해도 그렇다.” 과거는 언젠가 망각 속에 잊힐 것이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소환되거나, 현재에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내가 볼 수 없는 시각의 저편, 시간의 아득함, 어둠으로부터 나타난다.

40년 전에 썼던 시언의 촌극이 현재에 다른 인물들을 통해 다시 소환될 때에도 그렇다. 어두운 극장에 명확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음이 들리고, 배우의 등장과 함께 그림자와 어둠이 걷히며 과거의 이야기가 다시 현재에 나타난다. 명확한 시대를 특정하지 않는 촌극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가족이 있고, 남성들은 부재한다. 그들이 있는 장소가 집인지, 지하실인지, 방공호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이 재난적 상황에서 제한된 식량을 갖고 그 상황이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전쟁인지, 이 촌극이 쓰였던 40년 전을 떠올린다면 군사 정권의 만행이 일어난 상황인지 아니면 미래에 일어날 인류 위기의 재난 상황인지 특정할 수 없을 뿐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어둠 속에서 나타난 이것은 과거이면서 기억이기도 하고, 전임과 촌극 스캔들의 피해자들이 밤에 잔디밭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을 생각하면, 현재이기도 한 것 같다. 나아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미래의 일이기도 하다. 다시 영화의 오프닝을 떠올리면, 촌극의 시작과 함께 들렸던 알 수 없는 굉음과 같은 소리를 들었음을 상기시킬 수 있다. 분명 그것은 오토바이가 내는 배기음 소리이지만 그 소리가 촌극의 굉음과 비슷하게 들린다. 때문에 그 소리 아래 개천을 관찰하던 전임이 겪고 듣고 보는 준원과 시언의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는 현재에 속한 현실적인 사건이면서,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인 비현실적인 사건처럼도 느껴진다.

이를테면 촌극의 방공호와 같은 여대에 두 명의 남성이 들어온다. 만나는 사람 없느냐는 질문에 “현재의 평화와 깨끗함이 좋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끼리 붙어사는 것이 쉽지 않다.”라고 답하는 전임에게 이 두 남성은 평화를 해치고 깨끗함을 흐트러트리는 존재다. 대신 그 존재들은 그럼으로써 전임을 일상의 외부, 달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 인간의 시야 바깥 외화면의 공간으로 이끈다. 시언의 과거와 같은 준원과, 준원의 미래와 같은 시언이 한 장소에 있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한낮의 밝은 빛 아래에서는 하나의 쇼트 안에서 존재할 수 없는 두 인물이다. 오로지 빛이 온전히 닿지 않아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밤의 어둠 속에서 만나 외화면 바깥으로 나가 대화를 나눈다. 시언은 그들에 이끌려 어둠으로 들어가고 자신이 볼 수 있는 한계, 규정지은 것의 바깥을 본다.

 

출처: 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아무것도 없다

<수유천>은 거칠게 압축하면 전임이라는 예술가가 강으로 비유되는 인간이 속한 세계의 흐름과 구조를 보려 하는 영화이다. 거창하게 하늘 위에서 조망하듯 그것을 거만히 보려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개천을 관찰하고, 노동하듯 인간의 작은 시야에서 볼 수 있는 삶의 조각들을 이어붙여 보려고 한다. 그렇게 그녀가 보게 되는 세계란 평화로움과 깨끗함을 유지할 수 없는 부조리한 곳이자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무언가다. 블랙리스트와 그와 관련된 총장의 문책, 사랑에 진심인 사람이 세 명을 동시에 사랑할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말하는 말들이 다 없어지면 좋아할 수도 있죠”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 빨갱이니?”라고 가족들 앞에서 삼촌을 모독한 엄마를 향한 비난에 화를 내기도 하고, 어머니 같다던 정교수는 직업적 위치를 이용해 하급자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며, 전임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삼촌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함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거대한 시간 안에서 끝없이 반복된다.

그런 세계에서 전임은 평화롭고 깨끗할 수가 없다. 어두운 밤 중에 작은 불빛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편해져라” 기도하듯 외치는 것은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과거에 눈에서 피가 날 때, 붕대를 감은 상태에서 파란 하늘을 보았고 그 후 모든 일이 운이 좋고 잘 풀렸다고 하지만, 실제 전임의 삶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로 가득하다. 그렇기에 그녀는 다시 보려고 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한계의 바깥, 어둠의 저편에 있는 것들을 보고자 한강에서 중랑천으로, 중랑천에서 수유천으로 거슬러 현실 저편을 보려 한다. 마침내 엔딩에서, 그것을 확인하려는 듯, 외화면 저편 어딘가로 전임이 사라졌을 때, 기묘한 불안감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 결국 전임이 나타나며 한 말은 다름 아닌 “아무것도 없어요”이다. 그녀는 힘을 주어 다시 한번 말한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이때 아무것도 없다며 미소짓는 전임의 표정은 묘한 위안을 안긴다. 우리 관객에겐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그녀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기는 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강 상류, 근원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어느 시대에나 비슷하게 반복되는 인간의 삶의 끝, 세계의 근원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비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것도 없다면, 이 모든 후회와 불안과 괴로움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면, 그 사실이 평화롭고 깨끗하게 살 수 있는 작은 동력이자 위로가 될 수 있다.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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