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아무리 ‘저급한’ 기쁨과 ‘고급스러운’ 기쁨을 떠들어봤자 예술은 당신에게 냉랭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상류지역에서 뿐 아니라 하류지역에서도 활동하기를 원하며,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이상 자신을 조용히 내버려두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연극을 위한 작은 지침서(Petit Organon pour le théâtre )>(L’Arche, Paris, 1970,1948)에서
“오래 전부터 나는 가능한 모든 풍경을 소유하고 있다고 으스댔고, 회화 및 현대 시의 저명인사들을 가소롭게 여겼다. 나는 문 위의 장식, 배경그림, 곡예단 천막, 간판, 서민적인 채색삽화 등 하찮은 그림들을 좋아했고, 교회의 라틴어, 철자를 무시한 에로틱 서적, 우리 선조들의 소설, 요정이야기, 어린 시절의 작은 책, 오래 된 오페라, 순진한 리듬 등 유행 지난 문학을 좋아했다.” -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철(Une saison en enfer)>(Livre de poche, Paris, 1998(1873).)에서.
이 책에 언급된 작품들은 저항문화와 대중문화 중 어디에 속하든 간에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나같이 초라하고 부적절하고 유치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적절하고 진지한 상류문화가 아닌 서민문화 혹은 천민문화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처럼 악명 높은 문화적 배경에서 세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형성되고, 세상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이 탄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TV 출연을 염두에 두지 않고 노래를 부르고, 예술적 품위의 관례에 개의치 않고 대중을 위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곧 공식적인 예술에 수반되는 진부함, 스타일, 목적성, 자기검열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저평가되는 장르들은 형태에 대한 배반이며, 의미에 대한 배반이다. 그것들은 형태를 새롭게 하며, 의미에 질문을 제기한다.
그렇다고 이 장르들이 엘리트의 여론에 기계적으로 역행하는 건 아니다. 또 다른 형태의 속물주의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 장르들의 상업성 짙은 졸작마저도 다수의 숨겨진 욕망을 초월적으로 구현한 작품인양 간주하고, 그것을 흥행 성공의 요인으로 파악하자는 것도 아니다. 본질적으로 ‘상품’이라는 건 여론의 비위를 맞추고 유혹하는 데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중문화의 상당 부분이 조작적이고 소외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1)
그러나 대중문화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과감성과 효율성을 겸비한다면 역설적이게도 흥미진진하면서도 시야를 밝혀주는 작품들을 탄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을 편견 때문에, 아니면 팬들로 이뤄진 군중과의 동화를 꺼린다는 이유로 멀리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진부하거나 평범하거나 정말 조악한 대중문화 작품도 나름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에서 롤랑 바르트에 이르는 위대한 전통적 비평가들도 지적했듯, 이러한 작품들에 찬사를 보내는 사회의 정신상태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엘리트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관객, 독자, 청자는 수동적이지 않다. 조종을 일삼는 산업이 마음대로 모양을 빚을 수 있는 진흙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작품을 조망하는 능력에는 수용자들 간의 격차, 특히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항상 능동적인 자세로 작품을 받아들인다. 자신의 관심사, 감수성, 당시에 품고 있던 의문에 따라 작품을 해석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고, 변형한다.
인정받은 주류 문화의 주변부에서 멸시당하면서도 꽃을 피우는 문화가 있는데, 이 문화는 때로는 방금 언급한 대중문화를 구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기에 반기를 들기도 한다. 이른바 ‘마이너’ 문화이다. 무시당하던 그런 형태의 문화를 높이 평가한 대표적인 이들이 초현실주의자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활발하게 행동한 저항문화 운동가들이다. 이들은 기존 모델과 거리를 두는 한편, 어린 시절의 추억 속 상상과 비슷한 상상세계와의 관계를 즐겼다. 그러니까 자유롭게, 아무런 강박관념도 없이, 모든 질서와 관습에서 해방된 채 오로지 쾌락에만 관심을 가졌다. 비즈니스 세계도 이러한 작품들의 매력을 간파했다. 록음악과 만화가 전복적이라고? 누군가 이렇게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웃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나쁜 장르’를 수거한 다음 변형하고 중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새로운 품위를 지니게 됐다고 흥미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새롭게 탄생한 ‘나쁜 장르’가 문화를 다시 창조하고 전복하고 해방시키는 데에 앞장서게 된다.
(2) Lawrence W. Levine, <상위문화, 하위문화. 미국에 등장한 문화적 위계질서의 등장(Culture d’en haut, culture d’en bas. L’émergence de hiérarchies culturelles aux Etats-Unis)>, Roger Chartier, La Découverte, Paris, 2010.
(3) Victor Hugo, <William Shakespeare>, Flammarion, Paris, 2003(1864).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