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문화에 편입되는가?”라는 질문은 일견 엉뚱해 보이나, 언제나 뜨거운 쟁점이었다. 정치적 결정과 담화에 있어서 문화는 요리에서부터 정원에 이르기까지 연관돼 언급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축제가 열려 사람들이 열광을 하고, 문화 격차를 우려하며, 문화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타인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펼친다. 문화는 분명 만병통치약처럼 쓰이는 개념이지만, 그만큼 그 의미가 모호하기도 하다.
‘문화’라는 단어를 참으로 흔하게 쓰는 사회의 유력인사들에게 이 단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공식적인 연설에서 빠지지 않고 찬미되는 단어의 조합이 문화와 민주주의라는 것은 파악하기 쉽다. 유럽평의회가 단호하게 “민주주의의 심장이자 영혼”이라고 선언한 문화는 오늘날 정책의 고결함을 보장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므로 2015년 유럽연합이 입찰공고를 내며 사용했던 표현을 빌면, “화해와 분쟁 해결과 민주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문화를 언급하고 진흥하는 일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반면 예술에 대해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아무 말이 없다. 2012년 대선 1차 투표에서 다수표를 받은 프랑수아 올랑드와 니콜라 사르코지는 예술관련 사안을 숙고해 봐야겠다, 아니 적어도 예술교육과 예술애호가들을 위한 활동개발을 지원하고 이에 발 맞춰 예술업계의 임시직 문제에 대한 방침을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예술은 (축제가 취소돼 발생된 손실 계산처럼) 경제적 역할이나 자기계발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의미의 ‘문화화’를 논할 때 외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호의적인 시선으로 보면, 위선이라는 악덕이 미덕에게 보내는 경의의 표현이듯 예술에 대한 망각이나 위정자들 간에서 용어의 본래 의미가 퇴색된 것은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가 예술에 보내는 경의의 표현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민주주의가 그토록 찬양하는 ‘문화’는 지배적인 표현에 따르자면 ‘관계를 형성’하는 합의의 동인으로서의 문화다. 문화는 마찰과 반목을 뛰어넘어 시민들을 ‘연결’한다. 문화야말로, 새로운 ‘정신적 보완책’이다. 정신의 집단 고양을 나누기 위한 실질적 평등이 결여된 ‘민주주의’를 잊을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할 보완책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간략한 정의의 예술에 대해 반드시 논의해야 할 때 등장하는 개념도 바로 이것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통상관념 사전>에서 “사회도덕으로 인한 경각심을 누그러뜨린다”고 한 음악에의 정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반드시 정치적 사고력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해도, 예술가는 자신이 하는 일, 일을 하는 환경, 구현하는 양식과 가치의 의미에 대해 자문할 필요성에 직면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언제나 정치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예술가는 취향을 비롯한 모든 사안에 대한 규범에 의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샤를 보들레르의 말처럼 모든 미학은 도덕이자 정치이고, 그 역도 성립한다.(1)
양식을 결정하는 모든 선택은 입장을 취하는 것이며, 그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바라며 거부하는지 보여주는 관점을 택하는 것이다. 한 예술가가 자신이 지각하고 이해한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해 말하고 싶은 바에 형태를 부여하기로 할 때, 그는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나 합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합의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누구도 거슬리게 하지 않고 기존질서에 아무 의혹도 제기하지 못한다면 그의 예술은 힘을 가지지 못하며, 차라리 광고나 홍보기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엘리트들이 표방하는 가치를 강화하는 일에 기여하는 유명한 현대미술계 스타들의 작품처럼 말이다.
사실상 하나의 기술이나 계획안, 아니면 성공한 모델의 사본이 아닌 실질적인 자기 예술을 하는 예술가는 본인의 정치적 소신과 무관하게 ‘혼돈을 일으키는 존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술가는 현재 만들어진 표상에 의문을 품고, 그것의 진실은 물론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와 대조하고, 금이 가게 하며, 불안하게 만들고, 다양한 현실의 가능성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거리를 두고 기존 관점에서 벗어나 바라보라”고 제안하면서, 우리의 표상에 말 그대로 무질서를 야기한다. 그러면서 우리 내면의 새로운 열망을 일깨운다. 이런 의견의 불합치가 기쁨이며 무기다. 예술은 우리에게 ‘단 하나의 진짜 현실’로 주어진 것이 실상 부족한 것, 거짓된 것이라는 충격을 주면서 미래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예술이 직접 세계를 변화시킬 수는 없어도, 우리에게 세계를 변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할 수는 있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기자 겸 영화감독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빅토르 위고는 “좋은 취향이란 바른 질서를 위해 마련된 대비책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 24~28면/ ‘문화와 저항’관련 기사들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격월 자매지 <마니에르 드 부아(Maniiére de voir)> 8,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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