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사상에서 공동체적 심판에 대한 믿음이 오랫동안 일관된 위치를 차지했다. 거장 로레토아프루티노의 대벽화, 15세기. 산타마리아 델 피아노, 이탈리아. |
신의 심판은 일신교에서 신의 권위나 동양의 성전에서 갈마법(불교에서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혹은 전생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받는 응보를 가리킨다. 산스크리트 Karman의 의역으로, 음역해 갈마(羯磨)라고도 함-역주)에 따라 죽은 자의 운명을 가르는 과도기 단계다. 신의 심판으로 내세에서 영생을 살거나 지상에서 다른 몸으로 재탄생 할 운명이 결정된다.
죽음이 인생의 종착역은 아닐 것이다. 종교에서는 죽음마저 현세에서 내세로 향하는 과도기 단계라고 본다. 그러나 표현이 다를 뿐,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조건이 따른다. 현세의 삶과 그에 대한 평가에 달려있는 이를 두고 기독교도는 ‘최후의 심판’, 이슬람교도는 ‘심판의 날’이라고 부른다.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는 이 심판과 판결은 신의 영역에 속한다. 이 심판에서 초월적 존재를 보면, 이 종교들(기독교, 이슬람교)과 아시아 민간신앙 간의 확연한 차이점을 알 수 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어떤 신도 갈마의 내재법에 규정된 해탈(열반)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영생을 위한 통행증
고대 이집트인의 <사자의 서>에서는 한 장(章)이 통째로 영생의 신인 오시리스(Osiris)가 집행하는 신의 법정에서 죽은 자를 심판하는 내용에 할애됐다. 이 심판은 불사의 신들이 살고 있는 왕국으로 가기 위한 최종단계로서, ‘심장의 저울질’ 장면에서 삽화로 표현됐다. 당시 고대 이집트인에게 심장은 양심이 자리하는 곳이었다. 반대쪽 저울판에는, 우주의 질서와 동시에 진리와 정의를 구현한 마아트(Maât)여신을 상징하는 깃털 하나를 올려놓았다. 장례의식의 신인 아누비스(Anubis)가 저울을 달고, 지식과 기록의 신인 토트(Thot)가 그 결과를 기록한다. 저울 가까이에 흉악한 피조물도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집트인들은 이 피조물을 암무트(Ammout)라고 불렀다. 악어의 머리를 갖고 있는 암무트는 죽은 자의 심장이 마아트 여신의 깃털보다 무거운 것으로 밝혀질 경우, 죽은 자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상상하게끔 한다.
정결의식
하지만 고대 이집트에서 불멸의 삶을 향한 관문은 심장의 무게나 측정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았다. 죽은 자가 오시리스 신 앞에서 오랫동안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은 자는 죄를 자백하기는커녕, 어떠한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말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은 자는 고백함으로써 이전의 삶에서 저지른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심판은 결코 속죄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렇듯 정결의식에 가까웠다. 정결의식이 끝나면, 죽은 자는 신의 곁에서 불멸의 존재가 되는 허락을 받게 된다.
동방의 고대종교 중 이집트만이 예외적으로 오랜 기간 ‘사후’심판에 대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세관은 기원전 7세기경에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선과 악의 대립을 중심에 둔 조로아스터교에 따르면, 사후 3일간 죽은 자의 영혼은 현세에서의 선행을 저울질 하는 신의 심판자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 오직 의인만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좁은 다리를 건너갈 수 있다. 반면 악인은 지옥의 나락으로 내던져진다. 여기에서 심판을 받은 죽은 자의 운명이 내세에서 달라진다는 이원론적 사상이 나타났다. 어떤 이는 천국의 지복을 누리고, 다른 이는 지옥의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성서시대의 히브리인들에게는 영혼의 운명이 셰올(Sheol)이라는 지하세계에서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상이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다. 기원전 2세기에 부활에 대한 신앙이 생겨나면서부터 공동체적 심판에 관한 사상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마지막 날’과 관련된 공동체적 심판에 대한 사상이 주된 내용인 요한묵시록에 의하면, 셰올은 그저 임시 거처다. 그리고 죽은 이들의 영혼 중 모세의 율법에 충실한 의인들의 영혼은 맨 앞줄에 서서 신의 왕국에 이른다. 다른 이들, 회개하지 않은 악인은 영겁의 세월동안 게헤나(Gehenna), 즉 지옥에서 살게 된다. 기원 초부터, 유태교는 대체로 사후에 영혼이 심판 받는다는 발상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내세에서 신의 법정에 대해 공론하는 것은 경계했다. 내세에서의 심판은 오랫동안 기독교 사상에서 훨씬 일관된 위치를 차지했다. 심판에 관한 내용은 “누구나 신께 스스로 고백해야 한다”고 했던 사도 성 바울이나 “신은 모든 사람들을 개개인의 소행에 따라 심판한다”고 주장했던 성 피에르와 같은 사도들의 초기기록에 등장한다. 특히 성 요한의 기록에서 ‘정화하는 불’의 삽화 또한 볼 수 있는데, 의인과 악인의 자격은 정화하는 불을 통해 시험받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가 부활하자, 공동체적인 최후심판에 대한 사상이 인정받게 됐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됐다. 죄인에게 가한 형벌의 본질과 기간이다. 신의 자비를 믿는 지지자들은 지옥에 떨어진 죄인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사조는 지속적으로 동방 기독교에 영향을 줬다. 반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 오귀스탱의 지지와 함께 5세기부터 인정한 엄격한 방침을 따른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원죄의 무게와 소수의 선민의식, 신이 내린 형벌의 영원성을 강조한다.
기독교의 상상계
초기 기독교인들은 ‘마지막 날’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다리던 마지막 날이 오지 않자, 죽은 자가 부활하기까지 영혼의 운명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점차 각자의 공덕에 따라 개개인이 첫 심판을 받아, 선인의 영혼은 신의 낙원에서 기쁨을 맛보고 악인의 영혼은 지옥의 불로 고통 받는다는 사상이 인정받는다. 특히 영벌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 다소 극단적이었던 결말은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가 영혼의 정화소(淨化所)인 연옥을 주장하면서 완화됐다. 이 해결책은 초기 몇 세기 간 기독교 사상가들이 이미 언급했었는데, 연옥은 첫 심판에서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최종 심판을 기다리면서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하지만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연옥에 대한 유쾌한 해석을 내놓지 못했다. 이들의 표현에 의하면 연옥은 무엇보다도 지옥을 맛볼 기회를 제공하며, 죄인들에게 그 곳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내세에 관한 상상계에서 첫 심판은 최후 심판보다 더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정통기독교인들과 신교도들은 최초의 말씀을 근거로 연옥 사상을 신뢰할 만하지 않다고 판단해 배척한 반면, 가톨릭 교회는 오랜 기간 연옥 사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 전체에서 죽음 끝에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근본주의 사조를 제외하고, 영혼의 저울질과 정화하는 불을 묘사한 작품이 오늘날 종교예술 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이슬람교의 근간인 코란의 계시는 모든 관점이 최후의 심판, 즉 필연적인 ‘심판의 날’에 향해있다. 마지막 날, 부활의 순간이 오면 모든 이는 알라의 심판을 받는다. 신의 저울로써 죽은 자의 선행과 악행이 저울질 될 것이다. 공덕을 쌓은 사람들은 지옥 위에 놓인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랗고 검의 날처럼 날카로운’ 다리를 건너 천국에 이른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 특히 알라를 유일신으로 섬기지 않은 자들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한편, 코란의 구절이 암시하는 바에 따르면 ‘신이 제시한 길’에서 죽은 이슬람교도는 부활하지만, 불신실한 자들은 그 순간 바로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내던져진다. 따라서 이슬람교에서도 부활을 기다리는 죽은 자의 영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영혼이 ‘무덤의 시험’에서 천사의 심문을 받는다고 믿었던 첫 심판에 관한 사상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중죄를 짓지 않은 자의 영혼은 천국을 희미하게나마 보는 것이 허락된다. 반면 끝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않는 이들은 그들을 기다리는 지옥과 마주한다.
비개인적 유출
지옥과 천국, 부활, 최후의 심판은 힌두교와 자이나교, 불교 등 인도에서 생겨난 아시아 종교에서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일신교의 계시와 선형시간(천지창조부터 세상의 종말까지)의 개념과 달리, 아시아 종교에서 모든 존재는 재탄생의 윤회(Samsara)를 한다고 믿는다. 아시아 종교와 일신교 및 개인의 영혼에 관한 사상 간의 차이점은 또 하나 있다. 바로 아시아 종교는 개인의 영혼을 연이은 강생 끝에 이르는, 영원한 원리의 비개인적 유출(Emanation, 신적 실재의 본체로부터 유한한 존재가 유래하거나 나온다는 신학적 이론-역주)로 본다는 점이다. 재탄생과 마찬가지로 갈마의 내재법에 따르면, 개인의 소행은 신분에 따라 현세에서 혹은 다음 생애에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환생주기의 해탈(불자의 열반)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어떠한 신의 정의도 개입되지 않는다. 영혼이 영원한 원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방해했던 과오에서 벗어나면, 해탈은 자연히 일어난다.
글·세르주 라피트
신학자
번역·김세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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