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교류의 비밀 텍스트(6)
이 글에서는 지난 호에서 약속한 인토르체타의 『중용』을 소개하려고 한다. 동양문명의 형성과 지탱에 있어 핵심적인 경전인 『중용』을 어떤 눈으로, 더 정확하게 누구의 시선으로 읽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토르체타는 『중용』을 키케로의 눈으로 읽었다.
인토르체타는 “이 책은 실은 공자의 작품이나, 그의 손자 자사가 편찬했다. 책은 다른 무엇보다도 (항구적인) 중용 혹은 황금률에 대한 것이다. 키케로에 의하면, 이는 과도함과 부족함 사이에서 언제나 모든 일을 하면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책의 이름은 ‘중용’이다. 중(中)은 중심을, 주석가들에 따르면, 용(庸)은 (이는 대중적으로 정상적인 혹은 일상적인 것을 뜻하는데) 언제나 지켜야만 하는 것을 말한다”(1)고 전한다.
키케로의 눈으로 읽은 『중용』은 어떤 특징을 지녔을까? 여러 해설이 가능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중용’에 대한 인토르체타의 이해가 산술적 혹은 물리적 중간 개념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식 차원에서 많이 회자되는 중간 개념이 결코 아니다. 이를테면 높은 것과 낮은 것 사이에 있는 중간 개념이 아니라, 보편원리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서 실현된 ‘규칙’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중간에 매개자가 없다는 점이 가장 특징적이다. 이에 대한 전거는 아래와 같다.
“이처럼 참되고 단단한 완전함은 그 자체로 스스로인 완전함이다. 이는 스스로 이뤄진다. 혹은 자신을 통해서 완전해진다. 그리고 다른 것을 통해 그 자체로부터 구별돼지지 않는다. 법칙은 그 스스로의 법칙이다. 이 법칙에 따라 다른 일들은 이뤄지고 이끌어진다. 그 스스로는 다른 것의 이끎을 받지 않는다.(제2장) 이 참되고 단단한 원리 혹은 완전함은 만물의 끝이고 시작이다. 만약 사물들에 이 참되고 단단한 원리 혹은 완전함이 결여돼 있다면, 사물들은 존재할 수 없다. 같은 방식으로 도덕에도 진실성이 결여된 행동도 덕이 되질 못한다. 덕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어떤 가식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자식이 참되고 순수한 마음으로 효도하지 않는다면, 효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신의와 진실로 군주를 모시지 않는다면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니다. 이런 이유에서 현인과 올바른 사람은 이 참되고 단단한 완전함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제3장) 진실로 군자는 스스로 자기완성을 이루기 위해서 행할 뿐 아니라, 다른 일들의 완결을 위해서 행한다. 자기완성을 이루는 것은 가장 먼저 그 자신의 완성을 이루려는 사랑의 마음이다. 다른 것들을 완성하려는 마음은 예지에 해당한다(중국인들은 인/仁이라는 글자로 가장 완전한 보편의 사랑을 설명한다. 그런데 예지 또는 섭리는 지/知라는 글자로 설명된다).
이것들은 실은 본성적으로 타고 난 덕들이다. 혹은 본성의 자기완성들이다. 그러나 진실로 외부의 사물 혹은 다른 사물들에 연결시키고 내부의 것들 혹은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 말하자면 사물들과 자신에 적용시킴을 통해서 예지와 사랑, 이 두 가지 덕을 묶는 것은 한편으로 외부의 사물들을 완결시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내면적으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을 뜻한다. 이 두 덕을 하나로 만들고 묶는 것이 가장 올바른 법칙이다. 따라서 때와 상황에 맞게 이 덕들을 실천하는 것이 일치이고 어울림이다. 그리하여 지극히 완전함에 도달한 군자는 이 세상에서 사물들의 합창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사물들은 그 자신의 본성에 일치하려는 목적을 완결하게 된다.”(2) (라틴어 『중용』, 제2쪽 1장~3장)
스토아 철학을 통해 바라본 ‘중용’의 개념
성(誠)이 비밀을 여는 ‘열쇠’다. 라틴어로는 ‘Perfectio(완전함)’이다. 이는 어떤 보편의 원리가 구체적인 현실로 실현될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중요한 점은 성(誠)을 Perfectio 개념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토르체타가 키케로의 눈을 빌려서 파악한 ‘중용’은 중간자가 없는 개념이었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흥미로운 점은 물론 차이도 크지만, 일단은 우주의 원리를 크게 보편 원리와 그것의 구체적인 규칙으로 보는 시선이 스토아 철학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전거는 다음과 같다.
“의무를 구분하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매개 의무와 완전 의무로 나누는 것이 그것이다. 완전 의무를, 나는 올바른 것이라고 부른다. 그리스인들은 카토르마(Kathorma)라고 부르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카테콘(Kathekon)이라 부른다. 이것들을 그들은 이렇게 정의 내린다. 올바른 것을 완전 의무라고 정의하고, 매개 의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왜 그렇게 됐는지에 대해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3) (『의무론』 제1권 8장)
우선 라틴어 『중용』의 성(Perfectio)이 키케로의 『의무론』에서 차용한 개념임이 분명하다. 인용은 또한 키케로의 완전 의무(Officium perfectum)와 매개 의무(Officium medium)가 라틴어 『중용』의 완전함(Perfectio)과 규칙(Regula)에 각기 상응하고 있음도 잘 보여준다. 결정적으로 중용의 원리가 우주의 만물에 퍼져있다는 점에서 특히 『중용』의 성(性) 개념이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본성(Natura) 개념에 아주 근접해 있다는 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전거는 아래와 같다.
“세계의 부분들에,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온 세계 속에 전체의 부분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감각과 이성이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안에 으뜸가는 것이 들어있는 저 부분 안에, 감각과 이성이 들어가 있어야 하며, 그것도 더 예리하고 더 큰 것으로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세계는 지혜로운 것이며, 모든 사물들을 포괄하고 있는 이 본성(Natura)이 이성의 완전함 덕분에 탁월한 것은 필연적입니다. 이런 까닭에 세계가 신이고, 세계의 모든 힘은 신의 본성에 의해서 묶이게 됩니다.”(4)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 제2권 30장)
인용의 “세계의 부분 안에 들어가 있는 감각과 이성”이 『중용』의 “하늘이 인간에게 불어넣어 준 것, 곧 이성적 본성(性, Natura rationalis)”, 다른 말로 천명(天命)에 해당한다. 전거는 라틴어 『중용』을 여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하늘에 의해서 사람에게 부여된 된 것을 이성적 본성이라고 부른다. 이 본성에 따라 형성되고, 빛이 해를 따르듯 본성을 따르는 것을 ‘법칙’이라고 부른다(혹은 이성에 따라 항상적인 것이라 부른다). 닦음과 관련해서 자신과 이 법칙을 통해서 자신의 것들의 다스림으로 이 법칙을 다시 세우는 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혹은 ‘덕의 세움’이라 부른다.”(5) (1편. 2쪽. 1장)
여기까지는 키케로의 눈으로 『중용』을 읽으려 했던 인토르체타의 시도가 무난하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요컨대 인토르체타가 키케로의 눈으로 『중용』을 읽고자 할 때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난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용』의 본성(Natura) 개념에 들어 있는 물질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바로 그 한 사례일 것이다. 키케로의 설명이다.
“따라서 온 세계를 붙들고 있고, 그것을 지키는 본성(Natura)이 있으며, 여기에는 감각과 이성도 함께 자리합니다. 왜냐하면, 홀로 단순하게 있지 않고 다른 것과 결합되고 연결된 모든 본성(Natura)은 자신 안에 어떤 으뜸가는 것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인간에게는 지성이, 동물에게는 지성과 같은 무엇이, 여기에서 사물들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나무와 땅에서 자란 저 사물들의 경우, 그 뿌리에 ‘이끄는 무엇’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인들이 ‘헤게모니콘(Hegemonikon, 주재자)’이라 부르는 것인데, 나는 이를 ‘프린키파툼(Principatum, 지도자)’이라 부릅니다. 각각의 종 안에서 그 어떤 것도 이보다 뛰어날 수는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안에 온 자연에 들어있는 이끌어 가는 것이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배할 자격을 갖춘 것입니다.”(6) (『신들의 본성』 제2권 29장)
그런데, 키케로가 말하는 “온 세계를 붙들고 있고 그것을 지키는 본성(Natura)”은 성리학의 도(道)에 가까운 개념이다. 또한, 스토아의 본성(Natura) 개념에는 감각과 이성이 내재해 있는데, 이 본성에 내재한 이성은 성리학의 리(理)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스토아의 “헤게모니콘(Hegemonikon, 주재자)” 개념은 성리학의 “태극(太極)” 개념에 비견된다.
여기에서 잠깐! 좀 더 자세하게 파봐야 하겠지만, 인토르체타가 키케로의 안경을 벗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서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인토르체타가 특히 성리학의 태극 개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거는 다음과 같다.
“이는 신-유학자들이 최초의 것을 순수 물질로 파악한다는 점은 다음의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들은 그것(최초의 순수 물질)에 태극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데, 이를 또한 그들은 리(理)라고 부른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중국인들의 이 단어는 로마인들의 라티오(Ratio, 이성)에 해당한다는 것은 의심의 의지가 없다. 어쨌든, 그들은 여기에서 말해진 리(理)를 태극이라고 설명한다. 사물들의 본질적인 차이들이 바로 이 하나의 라티오(Ratio)로부터 흘러나왔다고 해명하기 위해서다. 이 라티오(Ratio)에 대해서 그들은 또한 다음과 같은 정도로 자신들의 철학을 밀고 나간다. 그들이 사물들의 부분들로부터 보편의 어떤 체계를 세워 놓은 이들로 보이게 할 정도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동일함이 스스로를 사물의 각각의 종들과 개별자들 사이에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자』 서문 제2부 1장, p. lvi-lvii).
‘인(仁)’은 ‘분배의 정의’와 연결된다
인토르체타가 더 이상 키케로의 시선으로 『중용』을 읽을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키케로의 시선이, 즉 스토아의 자연학이 기본적으로 유물론 전통을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인토르체타는 특히 주희의 『신유학』을 유물론으로 간주했고, 이를 강력하게 비판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흥미롭게도 인토르체타는 성리학의 ‘태극’ 대신에 전통적인 공자의 사상인 ‘인(仁)’ 개념을 들고나온다. ‘인(仁)’을 ‘Aamor universalis perfectus(보편적으로 완전한 사랑)’로 규정하는데, 전거는 다음과 같다.
“인(仁)이라 불리는 저 보편의 사랑과 덕은 밖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사람 자체다. 혹은 사람의 본성에 고유한 무엇이고, 안에 있는 것으로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이다. 사랑하는 것이 모름지기 사람의 일이지만, 그럼에도 다른 모든 이들에 앞서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사람이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것이고 가장 중요한 의무다.
이로부터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간다. 마찬가지로 이 사랑으로부터 ‘분배의 정의’가 생겨난다. 이 정의는 그 자체가 조화다. 따라서 정의로움은 ‘공정함’이다. 이 정의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나눠 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지혜로운 자들과 덕을 갖추기를 열망하는 자들을 기르고, 이들로 하여금 관직과 공적인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나가게 하는 것이 또한 이 정의의 중요한 업무이기도 하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과 친척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크고 작은 구별이 있다. 지혜로운 자들과 올바른 사람들을 모시는 데에도 크고 작은 질서가 있다. 이는 의무들의 조화로운 이치 혹은 균형에서 생겨난다. 어떤 균형에 따라, 즉 하늘의 이치에 근거한 계산된 것에 따라, 만물이 이끌어진다.
철학자는 당연히 이 대목에서 저 공통의 어떤 그러나 인(仁)이라 불리는 단지 인간적인 사랑에 대해서 놓지 않는다. 이는 인류 전체를 결속하고 연대하게 하는 마음을 기르고 지키는 것이다. 이 연대와 결속 덕분에 죽어야 할 인간은 각자 자신의 고유한 위치와 조건에 따라 때로는 긴밀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돼 있다. 위에서 말한 사랑에 대해, 혹은 진실로 어떤 거룩한 경의에 대해, 이로 말미암아 상고인들이 인간적인 것을 뛰어넘는 본성으로 경외했던 것에 대해 논의하지는 않겠다. 이는 그 당시에 ‘인(仁)’으로 혹은 ‘사랑’을 뜻하는 다른 말로, 아주 드물게 사용했던 경우를 제외한다면, 표현되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표현들, 예컨대 “흠경외사(欽敬畏事)”와 이와 비슷하게 경외와 공경과 순종을 명백하게 드러내 주는 말들로 표현됐다.” (라틴어 『중용』 제15편 2쪽 3장)
한문의 인(仁) 개념이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것의 라틴어 표현인 ‘Amor universalis perfectus’는 기독교의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환기시킨다. 인토르체타가 『중용』을 이해하고 알림에 있어서 키케로 노선이 아닌 다른 노선으로 갈아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키케로의 시선으로는 사랑의 하느님이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용』의 이해와 활용과 관련해서 인토로체타의 시선이 더 이상 키케로의 시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즉 『중용』의 독법의 방식과 활용의 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이와 같은 인토로체타의 노선 전환의 기법이 혹은 전략 수정의 방식이 실은 락탄티우스(Lactantius, 서기 250~323)라는 초기 교부에게서 배운 것이고, 락탄티우스의 기법과 방식이 실은 키케로에게서 배웠던 것이었다는 것이다. 인토르체타 자신의 증언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이곳에서 선교를 처음 시작한 젊은이들을 위해서 적어도 어떤 권위들이 세워질 수 있기 위해서, 그것들을 이용해서 이 시대의 무신론자들을 혹은 그 자신들을 예리한 칼끝으로 공격하거나 목을 찌를 수 있기 위해서,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다름 아닌 중국인들에 의해서 가장 강력하게 반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락탄티우스가 정확한 지적대로, 키케로를 키케로 자신으로 반박해야 하듯이 말이다), 이 자리에 중국 책에서 가져온 문구들을 제시하는 것이 좋다.”(7)(제11편 2쪽 2장)
인토르체타가 그토록 『중용』의 번역에 정성을 쏟아부었던 비밀이 여기에서 해명된다. “키케로를 키케로 자신으로 반박해야” 한다는 락탄티우스의 전략이 바로 그것이었다. 참고로, 락탄티우스의 별명이 “크리스티아누스 키케로(Christianus Cicero, 그리스도교의 키케로)”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에 공자의 별명으로 적당한 이름은 무엇일까? 어쩌면 시니쿠스 락탄티아누스(Sinicus Lactantianus, 중국의 락탄티아누스)가 적당하지 않을까? 아니면 Sinicus Cicero(중국의 Cicero)가 더 나을까? 인토르체타 자신이 붙인 별명이다.
“이것들을 이용하면 아주 짧은 시간에 이 종족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100여 년의 세월에 걸쳐 우리가 축적한 실제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소크라테스, 플라톤, 세네카, 플루타르쿠스의 전통이 거의 사장되다시피 한 에우라파에서 저 중국의 에피텍투스가 다시 갈채를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되는데, 이는 공연한 희망 사항에 불과할까?”(8) (『공자』 서문 제2부 1장, p. xiii-xiv)
말이 조금 장황했다. 해서 정리가 필요하겠다. 당연히 라틴어 『중용』에 소개된 중용의 개념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보다 엄밀한 연구가 요청된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라틴어 『중용』의 ‘중용’은 중간에 매개자가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평형이니 중간이니 하는 말로는 이해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런데 만약 스토아 철학과의 비교가 타당하다면, 라틴어 『중용』의 ‘중용’ 개념은 자연학의 개념에 훨씬 더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유물론과는 결이 다른 개념이기도 하다. 자연 종교의 관점에서 접근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인토로체타의 중용 개념이 스토아 철학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사실 락탄티우스(Lactantius)가 헬레니즘 철학의 신개념들을 파악하는 방식과 가장 근접해 있다. 이는 인토르체타가 중용 개념을 유물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전통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사실 성리학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상제 내지 ‘천(天)’ 개념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락탄티우스의 정리 전략을 취한다는 것이다. 일신론적인 관점으로 다신론을 정리하는데, 그때 사용된 논증의 방식과 근거들이 인토르체타의 논의에서 거의 재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인토르체타의 중용 개념이 키케로의 ‘의무(officium)’ 개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스토아 철학의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취하지 않고, 요컨대 락탄티우스의 교부 철학의 세계관 혹은 신관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토르체타가 파악한 중용 개념은 자연학적인 특징, 형이상학적인 특징, 신학적인 특징을 포괄하고 있는 무엇이다. 이에 대한 분석도 재미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중용은 보편 원리라는 것이다.
글·안재원
서울대 서양고전학 협동과에서 석사(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나타난 호메로스의 수용과 변용 연구)학위를 받은 뒤 독일 괴팅엔 대학 서양고전문헌학과에서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의 수사학자인 ‘알렉산더 누메니우의 <단어-의미 문채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중이다. 키케로의 <수사학>(2006), <Hagiographica Coreana 2> (2012), <인문의 재발견>(2014), <고전의 힘, 그 역사를 읽다>(공저, 2016) 등의 저술과 <교황 요한 22세가 보낸 편지에 나오는 Regi Corum은 고려의 충숙왕인가?>(2016), <서양고전문헌학과 동양고전문헌학의 만남> (2017)등 다수의 논문을 저술했다.
(1) Est liber hic opus quidem Confucii, sed ab huius nepote, Cu-Su dicto, editus. Agit autem potissimùm de medio[sempiterno] sive de aureâ mediocritate illâ, quae est, ut Cicero, inter nimium et parum, constanter et omnibus in rebus tenendâ : ideoque Chum-Yum libri titulus est: Chum quippe medium significat, Yum verò (quod vulgò solet pro ordinario, vel quotidiano accipi) hoc loco secundùm interpretes idem sonat quod constanter tenendum.
(2) 참조, 『중용』 제25장: 誠者 自成也,而道 自道也. 誠者 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 君子 誠之爲貴 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成己仁也 成物知也. 性之德也. 合外內之道也. 故 時措之宜也.
(3) Atque etiam alia divisio est officii. Nam et medium quoddam officium dicitur et perfectum. Perfectum officium rectum, opinor, vocemus, quoniam Graeci katorthoma, hoc autem commune officium kathekon vocant. Atque ea sic definiunt, ut rectum quod sit, id officium perfectum esse definiant; medium autem officium id esse dicunt, quod cur factum sit, ratio probabilis reddi possit.
(4) videmus autem in partibus mundi (nihil est enim in omni mundo, quod non pars universi sit) inesse sensum atque rationem. in ea parte igitur, in qua mundi inest principatus, haec inesse necessest, et acriora quidem atque maiora. quocirca sapientem esse mundum necesse est, naturamque eam, quae res omnes conplexa teneat, perfectione rationis excellere, eoque deum esse mundum omnemque vim mundi natura divina contineri.
(5) Id quod à coelo est homini inditum dicitur natura rationalis, quod huic conformatur naturae et eam consequitur ceu radius solem,dicitur regula,[seu consentaneum rationi], restaurare quoad exercitium hanc regulam se suaque per eam moderando, dicitur institutio, seu disciplina virtutum.
(6) Natura est igitur, quae contineat mundum omnem eumque tueatur, et ea quidem non sine sensu atque ratione. Omnem enim naturam necesse est, quae non solitaria sit neque simplex sed cum alio iuncta atque conexa, habere aliquem in se principatum, ut in homine mentem, in belua quiddam simile mentis, unde oriantur rerum adpetitus; in arborum autem et earum rerum, quae gignuntur e terra, radicibus inesse principatus putatur, principatum autem id dico, quod Graeci hgemonikon vocant, quo nihil in quoque genere nec potest nec debet esse praestantius, ita necesse est illud etiam, in quo sit totius naturae principatus, esse omnium optumum omniumque rerum potestate dominatuque dignissimum.
(7) Verumtamen ut aliquae saltem authoritates in promptu sint missionum harum tyronibus, quibus atheos huius temporis, ceu suis ipsorum mucronibus aggrediantur et iugulent (neque enim ab aliis poterunt Sinae quàm à Sinis vehementiùs refutari, ut de Cicerone per ipsum Ciceronem refutando, perappositè dixit Lactantius), placet hîc indicare locos aliquot textûs Sinici, (paucos è multis) ubi admodùm clarè apertèque agitur de notitiâ cultuque spirituum.
(8) His ergo de causis lucubrationem hanc nostram luci publicae damus, non ut Europaeis hominibus sapientiam Sinicam ostentemus, sed ut consultum foret missionum Orientalium candidatis, ut arma subministrarentur militibus, quibus istae gentes, Duce Christo et Auspice, vincia Vobis non modo possent, sed etiam gauderent; ut escas haberent in promptu piscatores hominum, quibus inescati Sinae in retia agerentur; ut denique sacri negotiatores iis instruerentur mercibus, quibus istas nationes vehementer capiet delectari usus centum et amplius annorum nos docuit. Et vero in Europa illa, ubi jam Socrates, et Platones,ubi Senecae, Plutarchi prope viluerunt, an speremus fieri posse ut plausum referat Sinicus noster Epicte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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