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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잘란의 사상을 알면 한국사회가 보인다
외잘란의 사상을 알면 한국사회가 보인다
  • 정호영 | 출판인
  • 승인 2018.05.3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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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둘라 외잘란의 정치사상』 훗, 압둘라 외잘란

민족이란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무엇을 떠올릴까? 아마도 30대 이후부터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해,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 새 역사를 창조하자”로 끝나는 1994년 폐지된 국민교육헌장의 이미지를, 20대 이하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붉은 악마’의 응원 물결을 떠올릴 듯하다.


‘민족’의 의미가 변해가는 한국사회

20대 이하가 민족주의를 느낀 2002년 한일 월드컵은 ‘북한’은 빠진 ‘남한’만의 축제였다. 통일연구원이 지난해 6월~7월 만 19세 이상 성인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벌인 면접조사의 결과를 보면 20대의 탈(脫)북한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남북이 반드시 통일돼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망”이라는 조사항목에서 20대의 비율은 13.7%에 불과, 50대 32.2%와 60대 이상 30.3%에 비교하면 확연히 낮았다. “남북한이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면 통일은 필요 없다”는 항목에 대해서도 20대의 62.3%가 동의했다.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에 20대는 “전쟁 위험을 없앨 수 있기 때문”이라고 실용적 이유로 건조하게 답했으나 60대 이상은 “같은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감성적으로 답했다.(1)

한국의 20대들이 보기에는 50대들의 ‘민족’이란 50대의 강산에가 부르는 노래 ‘라구요’에 나오는 ‘가보지도 못한’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의 이미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한국의 신세대에게 이미 ‘북한’은 민족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에서 ‘민족’은 언제 올지 모르는 ‘조국통일’이 아니라, 당장에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다문화 가정, 이주 노동자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2017년 한해 우리나라 총 출입국자가 8,000만 명을 돌파, 출입국 역사상 최다기록을 경신했다. 2017년 국내 체류 외국인(단기방문 외국인 포함)은 218만 명으로 2016년에 최초로 200만 명을 넘어선 이후 연속해 200만 명을 돌파했다. 지난해 체류 외국인은 한국 인구의 4.2%(1,000명 중 42명이 외국인)이었다.(2) 이들 중 다수가 외국인 노동자다. 2014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다문화 가정은 89만 명으로 한국 가정 100가구 중 2가구는 다문화 가정이다.(3) 이 다문화 가정에서 낳은 아이들이 ‘한민족’ 가정에서 나온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대중매체에서 멋지게 나오는 혼혈 연예인들이 아니라, 흔히 ‘매매혼’으로 오게 된 신부들이 이룬 다문화 가정과, 저임금 외국인 남자 노동자들이 한국의 여성들과 결혼해 이룬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은 한민족의 배타주의로 인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2017년 9월 “불법체류자 천국 대한민국. 외국인 노동자가 우리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라고 정당 중 처음으로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공론화했다.(4) ‘한민족’이 배타주의를 벗어나지 않는 한, 일부 외국에서처럼 극우들이 이주민들에게 보이는 혐오, 그리고 그로 인한 폭동 등을 우리도 맞이할 수 있다. 같은 언어를 쓰고 있음에도 체제를 달리한 적대의 세월이 흐르면서 ‘북한’도 더 이상 같은 민족인 ‘조국의 반쪽’이 아니게 됐고, 그리고 ‘남한’ 영토에서도 ‘이민족’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이 사는 방법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시선을 ‘남한’을 벗어나서 외부로 한 번쯤 돌려보자. 하나의 민족이지만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 4개국에 흩어져 살면서 고난을 받은 쿠르드를 통해서 뭔가 배울 것이 있지 않을까. 쿠르드 정치 지도자인 압둘라 외잘란의 사상을 통해서 민족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자.

압둘라 외잘란의 ‘민주적 민족’

압둘라 외잘란은 무장봉기를 통해 터키로부터 독립해서 쿠르드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터키 인구의 20%가 쿠르드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모국어 사용을 금지했고 자신들을 2류시민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한국전쟁에 온 터키군의 90%는 가난하고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쿠르드인들이었고,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운 대가인 월급 80달러 중 75달러를 터키인들에게 빼앗겼다.(5) 압둘라 외잘란은 쿠르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무장투쟁(터키 정부군과 쿠르드인 합쳐 4만 명 이상 사망)을 이끌었지만, 1999년 체포된 이후 19년간 독방에서 사색하면서 그는 무장봉기 전략을 버리고 새로운 정치사상을 제시했다.

외잘란은 민족의 정의를 공통의 사고방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내리면서, 다원주의적, 개연적, 개방적 방법론을 가진 ‘민주적 민족’을 주창했다. 그래서 ‘쿠르드 민족’이 ‘독립된 국민국가’를 가져야 한다는 기존 가치를 뒤엎고, ‘민주적 민족’ 안에서는 터키 국가와 쿠르드 민족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 이 맥락에서 ‘민주적 연합체주의’가 나온다. 이는 터키 국가가 더욱 민주화하고, 여기에 쿠르드 등 여타 사람들이 민주적 민족으로 정체성을 가지고 공존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 사상이 뒷받침된 것이 시리아의 로자바 혁명으로, 시리아 쿠르드의 절대다수는 시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으며 시리아 아랍인들과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외잘란의 사상을 따르는 쿠르드인들은 이라크의 쿠르드 군벌인 바르자니와 다르게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 외잘란은 ‘민주적 민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민주적 민족은 ‘국가적 민족 되기’라는 ‘질병’에 가장 덜 노출된 민족 모델이다. 민주적 민족에서는 정부를 신성화하지 않는다. 거버넌스는 일상생활에 봉사하는 단순한 현상이다. 자격 조건이 충족되면 누구나 공무원이 될 수 있다. 지도력은 가치 있는 것이지만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민족 정체성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며, 특정 종교의 신자처럼 고정돼 있지 않다. 어떤 민족에 속한다는 것이 특권도 결함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한 누구라도 하나 이상의 민족에 속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서로 얽혀 있고 다른 민족체들을 경험할 수 있다. 법적 민족과 민주적 민족은 서로 간에 합의를 보면 무난하게 공존할 수 있다. 고국, 국기 및 언어는 모두 귀중하지만 신성하지는 않다. 대결이 아닌 친선과 공유를 통해 공통의 고국과 언어와 깃발의 혼합이 가능하다. 이런 모든 특성을 갖추고 있는 민주적 민족은 자본주의 근대의 맹렬한 전쟁 기구인 국민 국가주의에 대한 강건한 대안으로서 역사 안에서 다시 한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6) 

지금 터키의 쿠르드가 가장 강력하게 원하는 것은 독립국가가 아니다. 모어 사용을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현재 쿠르드 아이들의 절반이 쿠르드어를 못 한다. 할 줄 알아도 쓰지를 못한다. 20년 후에는 쿠르드어를 하지 못하는 쿠르드인들의 비율은 80%까지 증가할 예정이다.(7) 터키의 1,500만 쿠르드 민족은 매일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터키의 터키인들과 동등한 시민권을 보장해주고 모어 사용을 법적으로 보장해주면 독립국가를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쿠르드 독립국가가 아니다. ‘더 많은 민주주의’다. 쿠르드계가 주축인 터키의 인민민주당(HDP)은 쿠르드만이 정치에 참여하는 당이 아니라 최초의 LGBT가 선거후보로 나오기도 한 모든 소수자들을 대변하는 정당이기도 하다.(8)

시리아의 쿠르드가 원하는 것도 독립국가가 아니다. 시리아 쿠르드는 독립을 원하지 않고 예전부터 살아오던 민족들과 같이 살기를 원한다, 시리아 로자바 지역의 지역분권 사회협약의 전문을 보자. 

“우리 아프린, 자지라, 코바니, 쿠르드 연합체, 아랍, 아시리아, 칼데아, 아람, 아르메니아, 투르크멘, 체첸의 민주적 자치 지역의 인민은 민주적 자치 원칙에 따라 초안으로 쓰인 이 헌장을 자유롭고 엄숙하게 선언하고 제정한다.”(9) 

이 사회협약 전문에 나온 각 공동체는 언어도, 종교도, 심지어 인종까지도 다르지만, 최대한의 자치를 보장받는다. 민족이 달라도 심지어 언어가 달라도 한 국가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압둘라 외잘란이 “지금 필요한 것은 독립국가가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라고 역설한다. ‘남한’과 ‘북한’의 통일 문제도 결국은 각각의 민주주의에 달려 있다. ‘남한’ 내의 다문화 가정이나 이주 노동자 문제도 ‘남한’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숙해 있는가에 달려있다. 앞으로 현실에서 ‘순결한 백의민족’으로 형상화되는 배타적 민족주의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 간의 구체적인 실생활이 민주주의로서 유지될 것이다. 매일 만나는 나와 내 이웃이 비록 언어나 문화, 심지어 인종까지도 다를 수 있겠지만….  


글·정호영 
인도에서 사회학 박사를 받았다. 역서로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 『카렌 암스트롱의 바울 다시 읽기』등이 있고, 저서로 『인도는 울퉁불퉁하다』 등이 있다.

(1) 이상신 외(2017), 「통일 이후 통합방안: 민족주의와 편익을 넘어선 통일담론의 모색」, 통일연구원.
(2)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보도자료;2018. 1. 24.
(3) 통계청, <2015 인구주택총조사>
(4) ‘자유한국당 혁신위, 외국인 노동자 문제 토론회 개최··· 정당 차원의 첫 공론화’, 조선일보, 2017.9.26.
(5) 이슬람 극단주의 광기 공포와 슬픔의 현장 <3>쿠르드 참전용사 인터뷰② -야스메 이세(비르단), 매일신문. 2015.1.12.
(6) 압둘라 외잘란 저, 정호영 역. 『압둘라 외잘란의 정치사상』. 훗출판사. pp.269~270. 
(7) The Kurds’ Last Battle in Turkey_Teaching Kids Kurdish, The Atlantic, 2013년 5월 9일.
(8) Akram Belkaïd, ‘En Turquie, le président Erdoğan s’aligne sur l’extrême droit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8년 4월호·한국어판 2018년 5월호.
(9) 압둘라 외잘란 저. 정호영 역. 『압둘라 외잘란의 정치사상』. 훗출판사. 부록. 사회협약. p.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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