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삶의 대표적 사건이다. 사랑에는 일상성과 경이가 함께 자리한다. 누구나 사랑하고, 누구나 사랑에 실패한다. 유행가에서 흔히 운위되듯 사랑이란 게 때로 지겹다. 실제 사랑에 뛰어 들어갔는지, 혹은 뛰어 들어갈 수 있는지와 무관하게 사랑은 인간 삶의 본질을 구성한다. 본질이라는 말이 과하다면, 이념이든 현실이든 사랑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히틀러에 의해 처형된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라는 말에 빗대어, 우리 인간은 사랑 앞에서, 사랑과 함께, 그러나 사랑 없이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신은 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직관에 기대어 인간 존재의 어떤 부분은 사랑에 의해서, 혹은 사랑에 의해서만 해명할 수 있기에 사랑의 형이상학은 우리 삶을 비추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문학에서 사랑을 다루는 이유이겠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죽음의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러시아의 3대 문호하면 반드시 들어가는 사람인 이반 세르게이비치 투르게네프(1818~1883)의 소설 『첫사랑』(1860년)은 ‘첫사랑’ 하면 첫 손에 꼽히는 작품이다.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라는 어린 소년이 연상의 옆집 소녀 지나이다를 (짝)사랑하며 사랑과 인생의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된다는 성장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자전적’이란 수식어가 붙는데, 소설 속 아버지와 어머니가 실제 투르게네프의 부모와 유사하다. 특히 기병대에 근무한 투르게네프의 아버지는 소설 『첫사랑』 속으로 말을 타고 걸어 들어갔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첫사랑』의 첫사랑은 거의 모든 첫사랑이 그러하듯 ‘통념상’ 실패한 사랑이다. 또한 첫사랑이 흔히 그러하듯 ‘넘사벽’의 강력한 연적에게 패퇴하는 구조를 취한다. 『첫사랑』을 평한 어느 글에서 “(영화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소설에도 ‘스포’가 있기에 이 연적이 누구인지를 밝힐 수가 없다”고 한 것을 봤다. 그러나 필자는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스포’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음을 양해하기 바란다. 이미 널어놓은 이야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연적은 블라디미르의 아버지다.
내용을 단순화하면 부자가 한 여자를 두고 경합한 것이지만, 그런 외형상의 곤란에도 불구하고 부자의 정애(情愛)는 훼손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패배자라고 할 아들은 끝까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거두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서 이 소설을 분석하는 데 아마도 정신분석학을 애호하는 비평가들이 열심이지 싶다.
소설 속의 모종의 삼각관계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해소되고 승화한다. 아들의 실패한 사랑은 아버지의 성공한 사랑을 통해 구제받는다. 여기서 실패와 성공이란 도식적인 표현이 전형적인 분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실패·성공이란 용어가 적절해 보이지는 않지만) 실패하는 사람과 성공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라 각각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분열이 아니라고 하기 힘든 것이, 아들은 아버지를 동일시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서 잔존한다.
분열이기도 하고 분열이 아니기도 한 이 분열은 화해 불가능하고 봉합 불가능한 분열이 아니라, 합일을 가능케 하는 분열이기에, 주체의 분열 등과 같은 표현에서 나타나는 본원적 불화가 아니다. 오히려 가능태와 현실태로 세계 안의 사랑에 동시에, 둘이지만 하나로 참여한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 자아의 주형틀로, 아들이 아버지로 대체되기 전까지 아들에게 선험적 우위를 가지며 정체성의 전범이 된다.
아들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사랑이 된다. 아들이 불완전한 자신을 통해서 구현됐을 사랑은, 미숙하고 남루하고 실망스러운 것이었을 테다. 그리하여 그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심연에서 호명되지 않아 존재의 좌절에 봉착하게 될 터였지만, 성숙하고 완성된 남자인 아버지를 통해 정립된 진정한 사랑으로 낭패가 예방된다.
투르게네프의 이 소설에서 첫사랑은 사랑 자체를 해명한다기보다는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동원된다. 원형의 신화인 오이디푸스 이야기에서 나타난 부친살해와 근친상간에 따른 ‘아버지의 자리’의 탈취는, 『첫사랑』에서 질료와 형상의 합일이란 방식으로 계승되면서 전복된다. 전복은 전면적 전복이라기보다는 관점의 전복이라고 할 수 있기에 고전주의적 사랑의 이상은 유지된다.
고전주의적 정조는 투르게네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호인 레프 톨스토이(1828~1910)의 『안나 카레니나』(1877년)에서도 발견된다. 『첫사랑』이 사랑보다는 존재에 방점이 찍혔다면, 『안나 카레니나』는 그 반대다. 이 두 소설뿐 아니라 거의 모든 좋은 소설은 사랑과 존재를 다룬다. 여기 펼쳐지는 논의를 위해 두 소설에서 각기 다른 쪽에 방점을 찍었을 뿐이다.
소설 속 안나는 사랑의 주체로 그려진다. 누군가 “이 소설을 요약하면 불륜”이라고 말하기에 나는 “아니다. 이 소설을 요약하면 사랑”이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내 반박 앞에 수식어를 붙이면 “전 존재를 건”이고, 더 붙이면 “인습과 사회통념에 저항하며”이다. 즉, 안나는 인습과 사회통념에 저항하며 전 존재를 건 사랑을 결행한 인물이 된다.
안나는 근대적 사랑의 주체다. 소설에서 그는 사랑 말고는 무고한 여인으로 그려진다. 안나의 존재에서 사랑만이 유일한 흠결이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죽음을 수미상관으로 표현함으로써, 예감을 사건으로 완성한다. 이런 사건의 완성은 그리스 비극의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무고하고 고결한 인물이 신탁에 의해 자신의 의도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잘못 혹은 죄를 짓고 추락하는 것이 그리스 비극에서 목격되는 주인공의 전형이라면, 안나는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마찬가지로 무고하고 고결한 인물로서 그리스 비극과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죄를 짓는다. 안나의 ‘주체적’ 죄는 사랑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안나에게 죽음은 주어지지 않고 획득된다. 죽음도 말하자면 ‘주체적’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고전주의 비극은 반복되지만, 근대적 정신으로 변주된다. 운명에 의해 좌초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선택 혹은 자발적 의지, 즉 주체적 행위로 죽음을 맞는다. 사랑 말고는 무고한 여인인 안나는, 따라서 이런 자아의 결단에 따른 자아의 포기로 한 점 흠 없이 무결한 인물이 된다. 버림으로써 완전해지는 이 구조에서 핵심은 안나가 운명에 쫓겨 다니는 대신 운명적 사랑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이라는 행위를 감행했다는 데 있다. 여기서 행위가 중요하지 죽음은 부차적이다.
소설에서 잘 드러나듯 안나의 자살에는 필연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예감과 확인이란, 필연성에서 벗어난 궤적에서 타협을 거부한 사랑의 주체를 목격한다. 높은 사회적 지위와 적당한 공존의 쾌락을 지키는, 그런 타협 노선은 안나 같은 사랑의 주체에겐 애초에 선택지에 들어있지 않았다. 사랑에 눈먼 것 말고는 죄가 없었던 안나는 죽음으로 죗값을 넘치도록 지불하면서 동시에 타협 없이 완전한 사랑을 천명했다.
사랑의 운명은 믿지만, 삶의 운명은 거부한 안나는 그리하여 완벽한 고전주의자가 되고 최고의 낭만주의자가 된다.
욕망을 욕망하다
미국 ‘로스트 제너레이션’ 작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1896~1940)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1925)를 논할 때 많은 사람들이 무엇보다 “개츠비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곤 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위대한’은 반어일 수도, 역설일 수도 있어 이런저런 많은 논평을 가능케 하리라. 이 자리에서는 “개츠비가 과연 위대했는가?”보다, 그가 소설 속 주인공 데이지를 과연 사랑했는가를 따져보고자 한다.
개츠비가 밤중에 자신의 집에서 바다 건너편 데이지 집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애잔한 장면 중의 하나로 꼽힐 텐데, 뉴욕 외곽 웨스트에그의 어둠 속에서 불빛만 명멸하는 맞은편 해변 이스트에그 쪽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담긴 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사람들이 개츠비의 감정을 무엇으로든 설명할 수 있겠지만, 피츠제럴드가 그려낸 것이 투르게네프나 톨스토이가 그려낸 것과는 분명 달랐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가난해서 잃어버린 사랑을, 부유함으로 되찾으려고 한 개츠비의 방식에는 당시의 시대정신이 반영돼 있다.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 그것도 천민적 자본주의 방식이 깔려있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탐욕이며 그것은 무한증식욕구로 발현된다. 자본주의의 주체인 자본은 만족을 모르고 항상 굶주려 있으며, 항상 더 많은 것을 욕망한다. 자본이 욕망하는 대상은 자본 자신이다. 주체가 대상이고 대상이 주체다.
천민자본주의 정신을 체화한 졸부 개츠비에게 사랑은 욕망이다. 물론 사랑과 욕망은 혼융되고 혼융돼야 하지만, 또는 사랑이 본질적으로 욕망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지만, 개츠비에게 사랑은 그저 욕망의 형태를 취할 따름이다. 개츠비는 사랑으로 상대에 몰입하기보다는 자본이 그러하듯, 상대를 쟁취하겠다는 자신의 욕망에 몰입한다.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활활 타오르는 불 속으로 질주하는 부나비처럼 타죽는다. 상대를 향한 욕망을 자신의 욕망을 향한 욕망이 대체하면서 사랑은 공허(空虛)가 된다. 연쇄적으로 사랑의 주체 또한 허무에 내몰리면서 사랑의 대상과 주체 모두 표류하게 된다. 그렇다고 주체가 유실됐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
자본이 자본을 욕망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성립한다고 할 때 개츠비같이 철두철미하게(어쩌면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적인 인간은 다름 아닌 사랑의 이름으로, 욕망하는 주체를 욕망의 되먹임 회로 속에 몰아넣고, 점차 허무로 잦아드는 주체는 어느 순간 주체임 자체를 잊어버려 원귀(冤鬼) 같은 욕망의 가상 주체로만 남겨지게 된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을 설명하는 방법론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들이 ‘잃어버린 것’과 관련해 여기서는 무구한 개인, 고전주의적인 혹은 이상적인 사랑, 그리고 결행하는 주체(의 전범)를 상실했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로스트(Lost)’를 달았음에도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일반적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이 갖게 되는 모종의 달관과는 무관하다. 반대로 그들에겐 불안이란 낙인이 주어진다.
『위대한 개츠비』가 다루는 시기는 1922년이고, 발표된 해는 1925년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그것이 표면적인 현상임을 당대인이 널리 짐작한 시기였다. 이런 국제정세와 함께 당시의 자본주의가, (요구되는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관리·통제되는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단계에 아직 진입하지 못해, 팽창과 폭발의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치와 경제 모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있었던 셈이다. 자본주의 양식에 흠뻑 젖어 살았지만, 사회주의라는 대안이 강력하게 체제를 위협했고, 전쟁과 공항의 폭탄이 언제라도 터질 태세였는데, 역사에서 보듯 두 가지 모두 ‘로스트 제너레이션’을 곧 엄습했다.
개츠비의 느닷없고 황망한 죽음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너무 잘 조응한다. 죽음과의 조응만으로 개츠비를 시대상황에 매몰된 역사적 패잔병으로 규정할 수 없다. 그는 그의 시대를 넘어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 일부 드러나지만 대체로 그의 삶을 통해서 표명된다.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 않은 개츠비의 위대함은 차고 넘칠 듯이 많다. 분명 개츠비는 위대했다고 단언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의 사랑은 결코 위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설이지만 위대하지 않은 그의 사랑마저 개츠비를 위대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사랑 언저리를 맴돌았고, 게다가 충분히 슬펐다.
이탈리아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1907~1990년)의 소설 『경멸』(1954년)에서도 『위대한 개츠비』와 마찬가지로 남녀와 ‘사랑’이 등장한다. 한 눈에 보이는 가장 큰 차이는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죽는 반면 『경멸』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죽는다(장 뤽 고다르가 이 소설을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한 것에서는 조금 결말이 다르다).
두 작품 모두에서 자본주의가 기본 배경으로 깔리지만 작동하는 방식은 다르다. 사실 20세기 문학과 예술은 사회주의권의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는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를 포함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자본주의는 본원적 배경이고 개츠비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한다. 『경멸』에서는 자본주의가 소품처럼 배치되는데, 배치가 그물처럼 촘촘하지만 효율적인 배치 탓인지 혹은 촘촘함 때문인지 『위대한 개츠비』의 자본주의에서 우러나는 것과 같은 압박감을 받지는 않는다. 자본주의가 전편을 음울하게 압도하는 『위대한 개츠비』와 달리 『경멸』에서는 자본주의적 장식이 전편을 효과적으로 장악한다. 자본주의가 DNA에까지 각인된 이 시대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본주의를 다루는 태도가 시끌벅적한 『위대한 개츠비』보다 전면적이지만 차분한 『경멸』이 더 익숙해 보인다. 예컨대 『경멸』에서는 자본력에 따른 남성성의 위계를 노정하는데 아마도 독자가 별다른 이물감을 느끼진 않을 법하다.
중요한 사항은 아니지만 두 작품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남녀 간의 신분 층하(層下)의 방향이 다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여자 주인공 데이지의 신분이 더 높은 반면, 『경멸』에서는 남자 주인공 리카르도 몰티니가 상대적으로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의 작품들에서는 주인공 남녀 간에 층하가 발견되지 않는다. 러시아적 한계, 19세기적 한계, 고전주의적 한계, 무엇이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20세기에 들어서는 그런 한계들이 종적을 감춘다는 점이다.
성장배경과 취향이 상이한 사람들이 만나서 사랑하게 된 것은 현대의 일상적 풍경이다. 이제 사랑할 대상을 신분에 의거해 사전에 스크린하는 일은 사라진다. 안나의 상대역 브론스키는 안나와 같은 계급에 속한다. 안나가 속물적으로 그런 인물을 찾았다기보다는 안나가 사랑할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브론스키를 만났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런 스크리닝은 개인적인 노력이 아니라 사회적인 설정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한 현대 사회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또는 근대인)에게 공식적으로 또한 대체로 사회적 스크리닝을 철폐했다. 따라서 톨스토이가 20세기 작가여서 나중에 『안나 카레니나』를 썼다면 상대역으로 브론스키 아닌 인물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개인에게 태생적으로 주어지는 ‘사회적 스크리닝’ 폐지 이후의 연인들은, 사랑에서 형식논리상 만인 대 만인의 투쟁(또는 도모) 상태로 돌입한다. 현대사회에서도 ‘사회적 스크리닝’과 유사한, 말하자면 ‘범위’라는 것이 온존하긴 하지만, 태생에 의거한 영역구분이 사라지면서 사랑에서 이제 연인들은 사랑으로만 사랑을 식별하게 됐다. 사랑이 명실상부하게 사랑의 최종심급으로 자리한 시대가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사랑을 설명할 수 있는 더 이상의 개념이나 말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사랑은 사랑이어서 사랑인 것이다.
이제 운명적인 조우를 대체해 기적적인 호명이 사랑을 시작하게 한다. 호명이 상호승낙으로 이어지면 두 사람은 대화 테이블에 앉게 된다. 그러나 남과 여 사이에는 원활한 대화가 작동하지 않는다. 성애의 욕망은 두 사람을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들여 두 사람을 대화하게 만들지만, 그러나 호르몬의 유통기한 때문이든 애초에 주어진 대화불능 때문이든, 테이블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갑자기 그동안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고,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뤄지지 않을 것임을 지각한다. 이런 수순은 본래 예정돼 있었다.
사랑의 욕망은 서로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들을 대화 테이블에 앉게 만들고 서로 끊임없이 말걸기를 시도하게 만든다. 그 대화의 실상은 대화가 아니라 일방에서 다른 일방으로, 또 반대편 일방에서 다른 일방으로 말을 건 것에 불과했다. 들을 귀가 없어서 듣지 않고, 혹은 들리지 않아서 듣지 못하고, 내 말로만 즉 발화로만 말을 거는 상태를 대화라고 부르지 않는다. 불현듯 대화불능을 깨달은 한쪽이 일어나 테이블을 떠나면서 대화는, 더 정확히는 서로의 말걸기는 종료된다. 사랑이 끝난다. 『경멸』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날 사랑한다던 그녀가, 이제는 경멸한다고 말했다”는 충격적인 대사는 새삼스럽지 않다. 사랑으로 마주 선 두 남녀에게 대화불능이 선재(先在)했기에 사실 진실을 직시했다면 ‘경멸’이 불가피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말걸기를 대화라고 우기면서, 즉 경멸을 애써 외면하며 테이블에 남아 있으려고 애를 쓴다. 간극을 메우고 어긋남을 봉합하며 튕겨나감을 유예한다. 그런 유예의 애씀이 부질없지만 무가치하지는 않다. 부질없는 무엇인가를 무가치하지 않게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경멸한다는 선언은 마치 상대방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화불능을 인식했다는 자기선언이다. 억지스럽게라도 기적이라고 명명하길 좋아하는 우연에서, 우리가 호명하고 호명되고, 상호호명을 통해 대화 테이블에 앉지만, 그 테이블에 앉게 하는 힘은,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힘은 최종 소급하면 호르몬 즉 해부학(또는 생물학)일 수밖에 없다.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해부학의 도움으로 대화 테이블에 앉아 끊임없이 말걸기를, 그것도 어긋나기만 하는 일방적 말걸기를 시도하는 까닭은 경멸한다는 말을 내뱉지 않기 위해서다. 해부학의 도움이 사라진 이후에 경멸을 선언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때부터 말걸기는 독백으로 바뀐다. 테이블에 같이 앉아 있되 대화하거나 말걸기를 하는 대신 함께, 그리고 외면하며 독백을 읊조린다. 대화 테이블은 서로가 서로에게 철저하게 소외됐음을 확인하는 장소가 된다. 상대는 물화한다. 흔히 우리가 “벽보고 이야기한다”고 할 때, 이 단계에 도달했음을 암묵적으로 시인한다고 할 수 있다.
사물화·물화·소외
일본의 노벨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년)의 『잠자는 미녀』(1961년)는 페미니즘과 관련해 예민한 요즘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충분히 ‘여성혐오’적 작품으로 읽힐 수 있다. 실제로 주변에서 비슷한 반응을 목격했다. 개인적으로도 ‘여성혐오’로 읽힐 법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잠자는 미녀』가 ‘여성혐오’의 불편함 너머에서 보편적 인간존재의 해명을 담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해 보인다. 이 소설을 요약하면 늙은 남자의 욕망을 통한 인간 실존의 탐색이다. 늙은 남자의 욕망을 왜곡의 프리즘으로 들여다보기에 불편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인간탐험의 유효한 한 방법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탐험의 경로는 무궁무진하고, 각자가 모두 유효하며 그것들을 모아서 활용할 때 보다 나은 인간해명에 다가설 수 있다.
『잠자는 미녀』의 탐색은 예상보다 복잡하다. 『첫사랑』과 마찬가지로 정신분석학 진영에서 좋아할 텍스트다. 또한 『첫사랑』보다 해부학 용어가 더 많이 등장한다는 측면에서 프로이트나 라캉의 제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소설이다.
발표연대(1961년)를 보면,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소설이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를 ‘포함’해야 하지만 자본주의는 부유한 노인들을 위한 특별한 매매춘 세트장을 만드는 데만 동원되고 나머지는 초역사적이라고 해도 좋을 전개다.
잠깐 『경멸』의 주인공 젊은 남자 리카르도와 『잠자는 미녀』의 에구치 노인을 비교해 보자. 『경멸』에는 해부학 용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아내에게 끊임없이 욕정을 느끼는, 그러나 욕정을 풀지 못하는 젊은 남자인 남편 리카르도의 신체에서 욕정의 연상작용으로 발기를 상상한다고 해도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발기한 음경은 남성성의 단적 표현이며, 관점에 따라서는 남녀가 관여하는 사랑의 중요한 원천이다. 리카르도라는 젊은 남자의 음경이 발기를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외면당하는 모습이 어쩐지 웹툰의 한 장면 같다.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잠자는 미녀』의 주인공 에구치를 ‘노인’으로 못 박고 소설을 끌어간다. 소설에서 에구치처럼 늙고 부유한 노인들을 상대로 한 특별한 매매춘 세트장을 설정했는데, 이곳에서는 잠이 들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깨지 않는 젊은 여자와의 하룻밤 동침을 제공한다. 여자는 내내 잠들어서 자신이 누구와 함께 어떤 상황에 노출되며 하룻밤을 지냈는지, 물리적 흔적이 남지 않는 한 결코 알 수 없다.
이 특별한 장소에 입장이 허용되는 사람은 남자 노인이다. 이런 자격 제한은 ‘잠자는 미녀’와 동침할 남자가, 남성이되 발기불능이어야 한다는 기이한 조합을 의도한다. 『경멸』의 리카르도처럼 발기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젊은 남자는 이곳에 입장할 수 없다. 임포 노인을 위한 매매춘이란 형용모순은, 이곳에 에구치가 입장하면서 중첩된다. 에구치 노인은 발기불능으로 간주돼 입장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남성성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남성성의 영역에서 발기는 정상이고, 임포는 비정상으로 간주된다. 한데 에구치 노인의 발기는 비정상으로 취급받는다. 남성성에 거래가 결합돼 발기불능 남성의 섹스 매매는, 이곳에서는 아무튼 정상이다. 이곳에 정상적으로 입장할 수 있는 에구치는 호시탐탐 비정상적 행위인 삽입을 노린다. 그러나 문제없는 발기에도 불구하고 삽입은 계속 지연된다. 이때 문 앞에서의 망설임은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판단혼란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나아가 판단하는 주체의 분열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부여된 정체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신체적 정체성에 복종해 돌진하려는 순간, 또 하나의 어이없는 상황이 빚어진다. 자신이 삽입을 시도하는 대상인 ‘잠자는 미녀’가 처녀라는 확신이 느닷없이 들면서다. 음경은 결합이란 조화성과 관통이란 공격성을 동시에 갖는다. 후자의 성향이 우선하게 되면 처녀성은 음경을 더욱 자극한다고 가정할 수 있는데, 에구치 노인과 관련해 이 소설에서 계속해서 표명된 정조를 감안할 때 처녀성 앞에서 위축된 노인의 발기한 남성은 곤혹스러움을 야기한다.
이 장면에서 처녀라는 판정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에구치 노인이 실제 처녀이든 아니든 처녀라고 판정을 내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에구치 노인의 후퇴는 해부학적 발기가 정신적 임포에 굴복했음을 뜻한다. 발기하지만 임포라는, 병리학이나 생물학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 상태. 결국 발기가능이란 에구치 노인의 자부심은 무용한 것이 돼 이 장소에 입장한 다른 노인들과 다름이 없어진다.
에구치 노인이 해부학적 발기를 잠재우고 정신적 임포를 불러내기 위해 ‘처녀 판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 인간을 사용해 섹스로봇을 만들었다는 관점에서 이 소설에서 표현된 물화는 정점에 도달한다. 인간이 로봇보다 로봇스러울 수 있는 예외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성욕을 매개로 인간의 본질을 꽈배기처럼 꼬아버린 이 소설이 그려내는 존재의 디스토피아는 범상치 않다. 남근 집착과 남근 무용을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남근화한 늙은 남자는 바닥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소외와 비교를 불허하는 물화에 빠져든다.
에구치는 대화불능의 상대와 대화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를 시도하거나 말걸기를 하고 있지 않다. 대화 테이블에 앉은 에구치의 맞은편에는 에구치와 다른 언어를 쓰는 미녀가 잠들어 있다. 에구치는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고 대화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잠자는 미녀는 가끔 에구치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로 잠꼬대를 한다. 그러다가 잠자는 미녀는 대화 테이블을 떠날 것이고, 누구와 그곳에 앉아 있었는지 기억조차 못 할 것이다. 에구치 입장에서는 그럼에도 그 테이블에 앉아있는 것이 테이블 밖에 있는 것보다 좋을까.
사랑은 아마도 존재를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에는 ‘소외(Entfremdung)’와 ‘사물화(Verdinglichung)’가 본원적 부수물로 생성되기에 각각 실존을 위협하는 황폐화와 (주체의) 행위 불능을 초래할 위험을 내포한다.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의 위험을 회피하는 길은, 결국 유대와 인간화라는 고전주의 이상에 귀의하는 것 말고는 없다.
높은 이상이 우리에게 사랑을 복원해 줄 수 있을까. 혹은 유대와 인간화라는 고전주의 이상이 우리에게 사랑을 복원해 줄 수 있다면, ‘소외’와 ‘사물화’를 넘어서 실존을 위협하는 황폐화와 (주체의) 행위 불능을 완전히 탈각할 수 있을까. 답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빚어지든 사랑이 포기될 수 없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되지 않는다.
편집자주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는 “르몽드 북클럽 ‘금오문향’(금요일 오후, 문학의 향기에 빠지다)-안치용과 함께 하는 죽어서도 꼭 읽어야 할 세계문학 100”의 매 과정 결과물을 정리해 격월로 연재됩니다.
100권의 세계문학 명저를 읽는 르몽드 독서스쿨 “금오문향”은 2달에 6권씩 모두 17개의 2개월짜리 과정으로 구성돼 34개월에 걸쳐 진행됩니다. 매주 한 권씩 미리 정한 책을 읽고 금요일 오후에 모여토론회를 진행한 뒤 7번째 주에 특강을 듣는 ‘6+1’ 방식으로 각 과정이 이뤄집니다. 안치용 한국CSR연구소장이 독서길잡이 겸 인문학멘토로서 함께 합니다.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 6] ‘사랑의 형이상학: 대화 테이블의 맞은편에서 잠든 미녀가 외국어로 잠꼬대하는 풍경’은 ▲안나 카레니나(톨스토이) ▲세월의 거품(보리스 비앙) ▲첫사랑(투르게네프)▲위대한 개츠비(피츠제럴드) ▲잠자는 미녀(야스나리) ▲경멸(모라비아)를 참고했습니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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