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는 “안치용과 함께 하는 죽어서도 꼭 읽어야 할 세계문학 100-르몽드의 문학대장정 ‘금오문향’(금요일 오후, 문학의 향기에 빠지다)”의 매 과정 결과물을 정리한 것으로, 격월로 연재됩니다.
100권의 세계문학 명저를 읽는 르몽드 독서스쿨 “금오문향”은 2개월에 6권씩 모두 17개의 2개월짜리 과정으로 구성돼 34개월에 걸쳐 진행됩니다. 매주 한 권씩 미리 정한 책을 읽고 금요일 오후에 모여 토론회를 진행한 뒤 7번째 주에 특강을 듣는 ‘6+1’ 방식으로 각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안치용 한국CSR연구소장이 독서길잡이 겸 인문학멘토로서 함께 합니다. “금오문향”은 5~6월에 2과정(여성, 자기만의 방에 든 여명)을 진행 중이며 7~8월엔 3과정(고독, 혹은 고도)을 진행합니다(금오문향 과정은 18면 참조).<편집자 주>
소녀는 강을 건너는 배의 난간에 기대어 배가 진행하는 방향과 직각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강은 흘러서 강이며, 건너야 하도록 양쪽을 나누기에 강이다. 강은 경계례(境界例)이자 경계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녀는 강을 건너는 배 위에서 ‘연인’을 만난다. 영화 ‘연인’에서는 하이힐을 신은 소녀가 난간에 다리를 걸치고, 카메라는 다리를 올림으로 인해 생긴 두 다리 사이의 공간을 관통해 소녀의 연인을 포착한다. 소녀의 연인이 될 리무진 속의 남자가 소녀를 바라본다. 잠시 후 같은 난간에 기대서서 같은 강을 바라보며 함께 강을 건넌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 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욕망은 그것을 충동질한 여자의 몸 안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첫눈에 벌써 욕망이 솟아나든지 아니면 결코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다. 그것은 성욕과 직결된 즉각적인 지성이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게, 나는 ‘경험’하기 이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성욕과 직결된 즉각적인 지성”이 어떤 사랑을 뜻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뒤라스의 기술(記述)과 무관하게 사랑이 강과 닮은 점을 찾자면, 아마도 경계례(Borderline case)라는 데에 있을 것이다. 나눠짐을 잇는 방식이 사랑이다. 흔히 말해지듯 사랑이 일종의 병이라고 할 때 경계례는 확실히 사랑과 닮았다. “나는 너라는 병을 앓고 있어”라든지, “나는 너에게 병들었어”라는 표현이 어쩐지 성욕과 직결된 즉각적인 지성을 연상시킨다고 한다면 과도할까.
다르게 조금 발전적으로 표현하면, 사랑은 경계의 소멸을 지향하는 경계례이다. 분열과 혼란이 동시에 출현한다. 물론 기쁨도! 그러나 실제로 경계가 소멸하는 매우 드문 순간에 경계례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된다. 나눠짐이 사라질 정도로 이어짐이 이어질 때의 사랑을 완성된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블랙홀 같은 관계의 최종심급, 아니면 변증법적 상승?
아무튼 이때 사랑은 불가피하게 사건에서 사례로 강등된다. 사랑은, 혹은 사랑의 형이상학은 본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인 까닭이다. 그렇다고 과정이 좋다면 결과는 아무래도 좋다는 초등학교 도덕교과서 식의 논리는 적용되지 않는다. 사랑에서 혹은 사랑의 형이상학에서 이 과정은 결과에 철저하게 침윤된다. 사랑의 과정과 결과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별개이자 동일한 것으로, 같은 듯 다르게 연결된다. 그리하여 “성욕과 직결된 즉각적인 지성”은 사랑의 세속적 성공을 전망한다. 사랑의 세속적 실패까지 선취하며, 실존적 과정과 사회적(혹은 정치적) 결과 사이에서 사랑은 부유하고 주체는 신경쇠약을 겪다가 끝내 남루해짐을 모면하지 못한다.
사랑이 강과 닮은 또 다른 점을 찾자면, 그것들이 원래 경계이며 끝까지 경계라는 태생적 한계다. 비유의 차원에서 하중도(河中島)가 경계례라면, 현실에서 하중도는 경계의 중첩이다. 나눠짐이 없었다면 이어짐을 기도(企圖)하지 않았겠지만, 이어짐을 기도하지 않게 되는 순간 나눠짐은 강처럼 자명해진다. 이때 하중도는 이어짐의 기도에서 기인한 형이상학적 성취의 가능성을 상실한다(그렇다. 사랑은 가장 가시적인 형이상학적 성취다). 나눠짐의 확고함으로 강물은 하중도의 양편을 서늘하게 흐르고 이어짐의 부재는 새삼 각각의 실존을 각성시킨다(혹은 좌절시킨다).
항상 놀라게 되는 건, 많은 이어짐과 나눠짐의 연쇄를 축적해 형이상학적 성취와 실존적 남루함으로 삶의 고단을 충분히 겪은 뒤에도 인간은 또다시 이편 강기슭에 서서 누구인가를 탐색하며 반대편 강기슭을 바라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강 언덕에 서서, 양안을 나누는 강 너머를 바라보며 문득 나는 네 이름을 부르고 너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내 호명에 답한다. 이러한 기적은 너무 평범하고 또 반복해서 일어나기에 더 기적적이다(물론 평생 안 일어나기도 한다). 사랑은 평범한 기적이다.
사랑의 구조
중년의 쥘리에트 비노슈가 주연해 2018년 4월 개봉한 프랑스 영화 <렛 더 선샤인 인(Let the Sunshine In)>은 사랑 영화다. 비노슈가 연기한 영화 속 매력적인 중년 여인 이자벨은 늘 사랑을 갈구하지만 언제나 사랑에 도달하지 못하는, 즉 평범한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 채 자신의 강 언덕을 홀로 지키는 쓸쓸한 여인이다. 이 영화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영화가 아니라, 누군가가 사랑하는 영화다. 기어이 사랑하고야 말겠다며 사랑타령을 달고 사는 비노슈는, 사는 게 힘들어서 혹은 너무 외로워서 또는 다른 이유로, 헐값에라도 자신을 사랑에 팔아넘기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좌충우돌한다.
비노슈에게서 “사랑을 사랑했고, 사랑하기를 사랑한” 뒤라스를 떠올리게 된다. 영화 제목 “Let the Sunshine In” 또한 사랑을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한다. (강가에 서기를 결심한) 주체에게로 Sunshine을 끌어들이려는 (주체의) 몸짓은, 어느 Sunshine이든 “개새끼”로 호명될 전락을 예비한다.
즉 “Let the Sunshine In”의 ‘Let’은 주어와 목적어를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 짓는 이른바 사역동사로, 대상 혹은 목적어에게 주체 혹은 주어가 필사적으로 개입하는 관계맺기를 상징하고(이때 ‘let’ 자체에선 좋게 말해 대상이 괄호 처져 있고, 냉정하게 판단하면 대상이 배제돼 있다.), 사랑 자체 또는 사랑의 기쁨,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까지 포괄하는 총체적 비유로서 ‘Sunshine’을 관계 안(In)으로 들여오는 행위가 ‘상호대상화’가 아닌 (결과적으로) “사랑을 사랑하는” 한 방향만의 대상화를 의미하기에, 열(熱)에 관한 경험 없이(“You don’t have much experience with heat.”, 영화 <겨울왕국>) 해를 사랑한 눈사람 올라프처럼 현실에서 사랑의 결말은 디즈니 세계와 달리 사랑의 난파로 이어져 마침내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을 파괴하는 것임을 입증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귀”(롤랑 바르트)이거나, 강의 비유를 활용하면 강기슭에 서서 (네가 있는) 저편 강기슭이 아닌 그 반대편으로 네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다. 이때 네 이름은 내 앞으로 구슬프게 울리며 퍼져나가지만, 그 울림은 강을 넘지 못한다.
또한 이때 누군가는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을 혐오함으로써 “개새끼”가 된다. 영화 속의 비노슈처럼 한때 사랑했다고 믿은 어느 인간 수컷에게 어느 여자가 “개새끼”라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사랑이란 기적이 놀랍게 평범하듯이 이 사랑의 후주(後註) 또한 일상적 풍경인 양 자연스럽다. 종종 우리가 사랑에서 본문보다 방대한 분량의 후주를 마주 대하기에, 그러한 상황이 낯설지는 않다. 삐걱거리지만 총체적으론 살뜰함인 사랑의 각주(脚註)와 달리, 사랑의 후주는 그 앞에 어떠한 수식어를 달고 있든 혐오의 형식으로 귀결한다.
“개새끼”를 호명하는 것과 “개새끼”로 호명되는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그럼에도, 사랑을 갈구하였지만 사랑에서 좌초해 사랑(한 자신)에서 고통받는 사람이 내뱉을 수 있는 전락의 호명은 응당 발화자의 것이다. 사랑한 사람만이 발화할 수 있다. 사랑에서 면탈된 사람은 발화하지 못한다. 사랑하다가 사랑으로부터 면탈될 때의 발화가 말하자면 “개새끼”다. 축구경기로 치면 종료 휘슬 같다. 사랑에선 스스로가 심판이기에 종료 휘슬 또한 선수가 직접 불 수 있다. 사실 휘슬을 불지 않고 그냥 경기장을 나가버려도 그만이다. 그럼에도 휘슬을 불 수 있다는, 즉 전락할 고통의 특권이 사랑에는 주어진다. 사랑한 사람만이 갖게 되는 안타까운 특권.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영화 <렛 더 선샤인 인>이 로맨틱 코미디인 게, “개새끼”는 때때로 “강아지”로 구제된다. 다시 말해 “개새끼”를 “강아지”로 구제하는 장치가 없었다면 이 영화를 로맨틱 코미디라고 부를 수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현실의 사랑은 다르다. 현실에서 로맨틱 코미디 같은 사랑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드물게 일어난다(참고로 영화 <렛 더 선샤인 인>은 분명 로맨틱 코미디이지만 영화에서 로맨틱 코미디 같은 사랑이 일어나지 않는다). “개새끼”란 사랑의 후주는 곧 사랑이란 책의 마지막 쪽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사랑에서 후주는 독서와 달리 본문의 가역적 현상이 아니다.
“(내) 강아지”는 상호대상화를 전제한 이름이며, 동일한 대상을 두고도 “개의 새끼”라는 객관적 진술을 쓰게 되면 세상사에서 흔히 보듯 혐오가 작동한다. “(내) 강아지”가 아닌 “개의 새끼”에게는 꼴도 보기 싫어서 입마개라도 씌워버리고 싶어지게 된다.
요체는 사랑이란, 혹은 사랑의 구조란, 강(江)의 양안에 선 두 주체가, 반복된 호명과 응답을 통한 상호대상화로, 나눠짐이 사라질 정도로 이어짐을 잇는 부단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상호대상화를 위해선 물론 대상화가 선행돼야 한다. 그러나 양방향인 상호대상화의 한 방향을 구성하는 이 대상화는, 상대를 대상화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상대의 대상으로 기꺼이 내어놓는 ‘역전된 대상화’를 의미한다. 이 역전된 대상화는 존재의 ‘내기’다. 내가 너를 대상으로 삼는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방식의 일반적 의미의 그 대상화가 아니다. 나를 너에게 바치는, 말하자면 모종의 공희(供犧)를 통해 나는 네 앞에서 한없이 낮아지지만, 네가 나의 낮아짐에 응답해 너 또한 너를 나에게 공희(供犧)로 바치게 되면 상호공희(相互供犧)가 달성돼, 양자는 전혀 새로운 경지의 그런 상호대상화에 도달해 서로에게 신이 된다.
사랑은 신내림이다. 신(神)의 약속 없이 스스로 신병(神病)으로 뛰어들어가는 무모한 확신이다. 다만 상호대상화가 꼭 상호공희의 신성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다. 역전된 대상화를 겹쳐 놓은 신성한 상호대상화보다는 그저 대상화를 겹쳐 놓은 상호 약탈적 대상화가 현실에선 훨씬 더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과정에서만 차이가 확인되는 까닭에 이 두 대상화는 얼핏 결과에서 동일한 외양을 보인다. 이러한 외관상의 유사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는 완전히 별개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는 유치환의 시구는 따라서 생각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일 수 있다.
주체는 태평양의 방파제가 무너질 때처럼 단박에 소외에게 침수된다
상호공희에 실패한 내기는 주체를 궁지로 몬다. 주체는 소외에 직면한다. ‘후주’에도 포함되지 않은 그 소외라는 곤경은 세계성의 상실을 뜻한다. 뒤라스의 어머니가 태평양을 막기 위해 쌓은 방파제처럼 종국에 주체는 흔적 없이 침수된다. 주체는 무너진 채 물 밑에 누워 있다. 소외와 대면한 주체는 점점 더 깊은 소외에 빠져들어 물이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리며 무너진 채로 물 밑에 무력하게 누워 있거나, 혹은 무력(無力)을 벗어나려는 무력(懋力)의 몸짓에서 다른 내기를 결행하게 된다.
다시 내기에 나서더라도 실패의 ‘경험’은 주체를 주눅 들게 한다. 상호공희(相互供犧)의 신성한 내기는 딜레마게임처럼 언제나 1인칭의 결단이기에 주체는 외롭고 두렵다. 딜레마게임의 합리적인 ‘해(解)’를 이미 알고 있는 (자본주의 시대 혹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주체는 (사랑에서) 오로지 자신의 몫으로만 주어진 역전된 대상화를 뒤집어놓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이 유혹은 너무 강렬하다. 근대가 헤겔의 변증법보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더 용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처럼, 오래전에 신성의 세계를 탈출한 근대의 주체에게 ‘역전된 대상화의 뒤집기’는 너무 익숙한 사랑의 형식이다. 대상화란 용어만 쓰고 있을 뿐 사실 역전된 대상화는 엄밀하게 말해 대상화가 아니다. 마주 선 다른 주체에게 대상화의 수행을 요청할 뿐이다. 실행이 아닌 요청이다. 내가 상대를 대상화하지 않고 상대가 나를 대상화하도록 행위를 요청한다. (상대가) 그렇게 하라고 (나는) 요청한다. 자신의 이중나선DNA를 풀어 한 개의 나선DNA를 던져놓은 상태에서 상대 또한 이중나선을 풀어 그중 하나를 이미 던져놓은 자신의 나선DNA에 결합할 것을 요청하는 인간 생식의 풍경과 흡사하다.
역전된 대상화는 그 자체로는 행위가 아닌 요청이지만, 요청이 응답받으면, 즉 각각의 나선DNA를 엮듯 역전된 대상화를 겹쳐놓으면 상호대상화를 성취하게 된다. 그 순간 요청은 저절로 행위로 승격된다.
응답을 기다리는 요청은 양날의 칼이다. (더 높은 상승에 대한) 기대/설렘은 (더 깊은 나락에 대한) 불안/좌절과 맞선다. 인간사에선 대체로 영혼을 좀먹는 불안이 승리한다. 더 높은 상승을 기대하며 상대의 행위를 기다리는 수동적 요청보다는, 더 깊은 나락에 떨어지는 좌절을 막기 위해, 상대의 행위와 무관하게 또는 행위에 앞서, 자신을 능동적으로 실행시키는 방안이 주체에게는 불안을 덜 수 있는 합리적 ‘해(解)’다.
그리하여 이 합리화한 사랑에선, 자신이 선도적으로 (요청이 아닌 실행의) 대상화를 감행함으로써 (상대에게 추수적인 대상화를 촉발해) 외양상 상호공희의 상호대상화와 잘 구분되지 않는 상호대상화에 도달하거나, (상대에게서 추수적인 대상화가 촉발되지 않았다 해도) 상대를 대상으로 포획하는 일방의 대상화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상호공희에 비해 분명 타락이다. 하지만 적어도 불안을 회피할 수 있다. 딜레마게임의 ‘해(解)’와 얼마나 유사한지 놀랄 정도다.
그러므로 어떤 ‘합리적인’ 주체는, 상호공희의 사랑에 무모하게 내기를 걸었다가 불안에게서 불의의 일격을 당해 끝내 타락하는 길을 걷기보다는, 사랑을 사랑하는 제3의 사랑을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이때 주체의 합리화는 주체의 선택이 아니다. 내버려 두면 주체는 자연스럽게 합리화한다. 드물게, 또한 부자연스럽게, 주체는 합리화한 자신을 거부하는 선택을 내린다.)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지 대상이 아니다. … 내 욕망을 욕망 그 자체로 옮기기 위해서는, 어느 섬광 같은 순간에 그 사람을 일종의 무기력한, 박제된 사물로 보기만 하면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단지 그 도구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의 소중한 구조였으며, 나는 그이/그녀를 잃어버려서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사랑의 단상> 중에서, 롤랑 바르트, 동문선, 2004)
물론 상호공희의 사랑에서조차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지 대상이 아니다”는 언술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사랑, 나를 사랑하는 형식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소설 <알렉시 혹은 공허한 투쟁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고 해도 크게 잘못된 설명은 아닐 것이다. 유르스나르는 “저자의 해설이 설 자리를 주지 않고,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 어느 정도 정직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무엇보다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에게 적합하다”고 말하는데, 이 문장은 소설의 1인칭 작법에 관한 그의 견해다. <알렉시 혹은 공허한 투쟁에 관하여>는 서간문 형식을 취하며 1인칭으로 서술됐다.
동성애자인 알렉시(남성)가 아내 모니크(여성)에게 이별을 설명(변명이 아니다)하는 편지 형식의 소설이다. 편지글이란 특성상 상대가 특정돼 타자가 개입 불가능한 1인칭을 구현한다. 이 2인칭 모니크는 소설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도 없이 기나긴 후주를 참을성 있게 들을 뿐이다. 독자는 모니크가 어떻게 대꾸했는지를 끝내 알 수 없다. 작가는 철저하게 1인칭을 기술하고 독자는 1인칭을 읽는다.
나 또한 근대 이후의 소설은 불가피하게 1인칭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랑 소설에 있어서, 사랑의 주체는 부재한 청자를 향해 혼잣말인 양 말을 거는 벌거벗은 1인칭이다. 화자만이 확고하다.
소설 <롤리타>의 저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소설에서 “더러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만나는 지점”을 찾으려 하고, 불행하며 행복한 그리고 파렴치하고 불쌍한 <롤리타>의 주인공 험버트는, 불멸이란 예술과 사랑의 교차점을 찾는다. 더러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만나는 지점에, 예술과 사랑의 교차점에 서는 이는 누구인가.
외형상으로는 소설이다. 내용상으로는 그 자리에 인간이 선다. 특별히 사랑하는 인간이 적합하다. 소설이 인간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면 근대 이후의 소설은 중첩된 1인칭(소설 속 화자+작가)으로 구현되며, 영원한 1인칭인 독자는 중첩된 1인칭을 밖에서 들여다본다. 숨겨진 1인칭(작가)과 쓸쓸한 1인칭(소설 속 화자)을 독자라는 고립된 1인칭이 꿰뚫어 보는 구조. 소설은 중첩된 1인칭을 또 다른 1인칭이 응시하는 3개의 1인칭으로 구성된다.
구조를 다르게 파악할 수도 있다. 1인칭 시점을 선택한 작가 입장에서는, 자신을 밖으로 빼돌린 채 소설 속 화자라는 1인칭과 독자라는 또 다른 1인칭을 중첩시켜 파악한다. 다른 시점을 택할 때 독자는 소설가와 자신의 시선을 일치시키는 경향을 보이지만, 1인칭 시점에서는 소설 속 화자와 자신의 시선을 겹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중첩된 1인칭을 바라보는 또 다른 1인칭이란 구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도 구축될 수 있다.
마침내 소설은 강(江)이 된다. 작가와 독자 사이를 흐르는 경계례로서 강. 경계로서 강. 그 강에서는 더러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만나고, 영화 <연인>에서 연출된 메콩강의 빛나는 수면처럼 불멸이 번득인다.
삼단논법 비스무리한 걸 적용하면 이제 사랑은 소설이 된다. 근대 이후의 소설 작법과 유사하게 사랑은 1인칭의 기술(技術)이다. 그 1인칭의 기술은 최상일 때 ‘비(非)1인칭’에 걸쳐지게 되는데, 그때 1인칭의 소멸까지 밀고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앞서 상호공희의 상호대상화를 이야기할 때 적시하였듯, 1인칭이 소멸하는 순간 사랑은 사건에서 사례로 좌천되는데, 사건이 아닌 사랑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은 없다. 그리하여 사랑은 너에게 강력하게/끊임없이 걸쳐지지만 동시에 단호하게 나를 지켜내는 작업이 된다. 사랑이 나를 사랑하는 형식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삶에서 우리는 매 순간 사랑이 나를 사랑하는 형식임을 깨닫지만, 더불어 매 순간 그것을 “사랑을 사랑하는” 형식으로 변용하는 타협을 받아들인다. 한없이 허약한 주체! 그럼에도 우리는 그 난파선 같은 주체에서 “자유의지와 맑은 정신으로”(슈테판 츠바이크) 뛰어내릴 수가 없다. 난파선 같은 그 주체는 그저 “새로운 모험을 찾아 먼바다로 나아갔다.”(1)
글·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한국CSR연구소장이며,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1) 조르주 바타유의 <눈 이야기> 마지막 문장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의 1편 『사랑, 그 공허한 충만과 아름다운 결핍에 대하여』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프랑수아즈 사강) ▲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감정의 혼란(슈테판 츠바이크) ▲연인(마르그리트 뒤라스) ▲알렉시 혹은 공허한 투쟁에 관하여(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눈 이야기(조르주 바타유)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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