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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비열한 질서’가 아시아 평화를 해친다
아베의 ‘비열한 질서’가 아시아 평화를 해친다
  • 이종걸 l 국회의원
  • 승인 2019.10.01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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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이지만 우리에게는 비극적인 일제의 강제 노동 착취 지역인 군함도

1.

2019년은 아시아의 평화와 공영을 위해서 중요한 해다. 현재의 사태에 대해서 한일 양국은 물론 국제적으로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배경, 단기적인 효과 및 장기적인 문제점 등에 대한 논의와 그 해결방안 등에 대한 숙고들이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사태에 대한 일반론을 반복하지는 않으려 한다. 나는, 한국의 집권여당인 민주당 중견 의원으로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을 총괄하는 책임자로서 직접 듣고 느끼는 한국의 목소리를 일본 국민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2019년은 한국에게는 매우 뜻깊은 해다. 한국이 일제강점기 일본의 무단통치를 뒤흔들었던 3·1독립운동과 한국이 근대적 국민주권 국가임을 표방한 헌법을 선포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해 임시정부를 선포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또한, 3·1독립운동, 4·19민주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2017년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서구의 전유물로만 여겨왔던 민주주의가 아시아에서도 가능하며, 이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동양에서도 보편 문명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해이기 때문이다.

 
 
‘정상국가’에서 한층 더 멀어진 아베의 일본
 
2019년은 일본에도 중요한 해다. 아베정권이 내건 ‘정상국가’ 전략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겨야 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사례로 일제의 불법 강제점령으로 반문명적 통치를 서슴지 않았던 어두운 시대를 사죄하고, 아시아의 평화와 공영의 파트너로서 함께 노력해야 할 한국에 일본의 아베정권은 100주년의 축하는커녕 정반대의 ‘선물’을 안겨줬다. 주지하다시피, ‘정상국가’로 나가는 일련의 조치 중 하나로 일본의 경제산업성은 지난 7월 4일, 한국의 주력산업인 반도체생산 필수재료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PI), 에칭가스(고순도 플리오린화수소)와 디스플레이 감광액 재료의 대(對) 한국 수출을 제한해 타격을 가했다. 마치 한국의 반도체산업에 대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진주만 공습과 같은 기습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아베 총리의 일방적인 경제보복 조치에 이어, 일본 정부는 ‘신뢰할 수 있는 수출대상국’ 목록인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조치를 내렸다. 한국 측의 시정요구를 무시한 아베정권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8월 22일 한일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을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이를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일관계의 미래는 한층 격랑에 휩싸이게 됐다. 문제는 이 같은 격랑의 파고가 한일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아시아에 속하는 모든 국가들의 관계에도 확산될 것이라는 점에 있다. 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에서 일본은 중국과의 대결 구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마다 일본이 한국에 가했던 경제보복 조치를 취한다면, 일본이 아시아에서 누려왔던, 경제적인 선도국이자 정치적인 모범국으로서의 지위와 신망을 상실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2019년이 일본에도 중요한 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아시아의 평화와 공영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으며, 세계사의 맥락에서 볼 때 동양문명과 아시아 대륙을 영원한 2류 문명, 2등 대륙으로 고착화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시아의 산업과 자유시장을 선도한 일본이 정치외교적인 이유에서 그동안 누려왔던 지위를 추락시키는 것은, 아시아 경제에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세계사와 인류 보편의 관점에서 작금의 사태를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단적으로, 한국의 반도체산업에 타격을 주려는 아베정권의 ‘야음을 틈탄 닌자’와 같은 기습이 효과를 발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단견에 불과하다. 소재부품 2~3개의 공급을 압박한다고 해서, 한국의 반도체산업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 있을까?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정보통신산업의 ‘글로벌 밸류체인’(Global Value Chain)의 주축을 이루는 한국의 반도체산업을 말이다. 또한, 아베 총리는 한‧일 반도체 전쟁으로 야기된 혐한 이슈를 참의원 선거에 ‘애국투표’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고 강변할 수 있을까. 이를 긍정한다는 것은 피상적 접근이다. 가장 후한 평가를 한다고 해도 아베는 ‘전투’에서는 일시적으로 이겼는지 모르지만, ‘전쟁’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지휘관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나는 아베 총리가 일본의 국격을 크게 떨어뜨리고, 일본이 이른바 ‘정상국가(Normal nation)’로 나아가는 길을 더 멀어지게 했다고 평가한다.

그 근거로 다섯 가지를 들고자 한다.

첫째, 아베는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 협력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인 ‘정경분리’의 원칙을 어겼다. 정경분리는 냉전 시기인 1960~1970년대에 체제가 다른 국가 간의 무역과 외교에서도 유지된 원칙이다. 이는 아시아에서의 경제주도국 일본이 세계 경제대국이 되는 데도 크나큰 기여를 했다. 아베 총리 자신이 지난 1차 내각 때였던 2006년,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 당시 중국 주석에게 “양국의 체제와 가치관이 다르지만, 정치경제의 두 바퀴를 굴려 높은 차원의 관계를 만들어가자”는 ‘전략적 호혜관계’를 제안했다. 이후 양국은 센카구 열도문제, 북한 제재방안 등에서 이견이 컸지만 정치적 긴장과 경제협력을 병행시키는 정경분리 원칙의 큰 틀은 지켰다.

그러나 한국 대법원의 징용판결이 나온 후 한국을 겨냥해서 한국 반도체기업을 대상으로 정밀타격을 한 ‘불의타(不意打)’는 21세기 국가 간 외교의 일반적 규범 같은 정경분리의 원칙을 어긴 것이다. 더구나 아베는 그 직전에 열린 2019 G20 오사카 정상회담에서 “자유롭고 공평한 무역”을 강조했던 선언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경제제재를 걸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영국의 유력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에 대해, “일본이 자유무역에 위선적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라며 비판했다.

둘째, 아베 총리는 한국에 대해 국가 상호 간 기본적 윤리인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무시했다. 그는 일제의 한국강점이 불법임을 전제로 한 한국 사법부의 판단을, 양국 정부기관 간의 이중적 배신행위로 본다. 한국의 어떤 국가기관도, 어떤 대일협상에서도 “일본은 한국을 합법적으로 병합한 것”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동의한 적이 없다. 더구나 이번의 판단 주체는 대법원, 대일협상을 담당하는 행정부와는 별개로 헌법상 독립적 권한을 행사하는 기관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한국대법원이 옛(舊) ‘일제 전범기업(미쓰비시, 히타치 등)’을 대상으로 한 생존 강제징용자에 대한 배상판결과 그 집행결정이 부당한 것이고, 종전의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이 맞다고 판단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 행정부가 개입할 수도 없고, 개입해서도 안 되는 대법원판결에 대해 초헌법적 권한을 행사하라는 것인가? 아베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한국 대법원은 법률이나 법률적 효력을 가지는 조약 및 협정 등에 대한 해석에 있어 한국 내 최종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한국 대법원이 35년간 일본의 강제점령은 불법이고, 그 시기에 자행된 일본의 반인륜적 행위, 반자의적 동원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이 유효하고, 이들을 ‘강제노동’시켰던 일본 전범기업의 종전 이후의 법적 승계인이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면, 한국 행정부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 한국 행정부가 나서서 법원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거나 판결 결과를 무시하라는 것처럼 들리는 아베의 입장은, 한국의 오랜 민주화 투쟁으로 쟁취한 사법기관의 독립성을 침해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셋째, 아베는 경제제재의 필요성에 대해서 잘못된 사실과 고의적인 거짓말을 근거로 삼았다. 국가 간 분쟁의 소지가 있는 중대조치는 그 근거가 정확하고 명확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 정부의 설명에는 모순이 드러난다. 경제산업상 세코우 히로시게(世耕弘成)는 한국이 수출관리 의견교환에 응하지 않은 점, 수출관리에 관한 부적절한 사안이 발생한 점, 그리고 징용노동자 문제에서 신뢰 관계가 무너진 점 세 가지를 들었다.

이와 달리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안전보장을 목적으로 수출관리를 적절하게 실시하려는 것일 뿐, 징용문제나 외교 문제의 신뢰와 관련된 대항조치가 아니라고 발표했다. 정치보복에서 안보 논리로 말이 바뀐 것이다. 특히 3개 품목은 수출관리 틀 안에서 군용품으로 전용되지 않도록 규제하는 품목임에도, 부적절한 사안이 발견돼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북한을 끌어들였다. 일본의 설명이 총리마다, 각료마다 다른 것은 이유가 있다. 일본도 정경분리 원칙의 훼손이나 WTO 위반 논란을 피하고자 안보 이슈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는 그 이후의 팩트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잘못된 것으로 판명됐다. 군용품 전용 가능성이 있는 물자의 대북 수출량이, 한국보다 일본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리고 한국은 대량파괴 무기에 대한 4개의 다자수출통제체제인 NSG(Nuclear Suppliers Group, 핵공급그룹), MTCR(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 미사일 기술 통제체제), WA(Wassenaar Arrangement, 바세나르 협정. 재래식 무기에 대한 수출통제 및 제한), AG(Australia Group, 오스트레일리아 그룹. 생화학 무기에 대한 감시 및 통제)에 모두 가입했으며, 이 모두를 엄격히 준수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즉 북한으로의 수출통제가 미약하다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함이 밝혀진 것이다. 일본은 타국에 큰 영향을 미칠 조치를 근거 없이 단행하거나, 견강부회하는 오점을 남긴 것이다.

넷째, 아베 총리는 선거에 안보 이슈를 이용하는 후진국적 행태를 보였다. 후진국의 독재자들은 흔히 가상적국들과의 대립이나, 안보위협 등의 정세를 인위적으로 조장해 선거에 활용해왔다.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으로의 개헌추진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그동안 가상적국이었던 북한의 핵 위협이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약화되자, 아베는 그 대안으로 한국에 대한 불안감과 경계심을 조장하기 위해서 경제보복 조치를 내린 것이다. 선거에서 보수집권층이 지지율을 높일 목적으로 안보 이슈를 조작하는 행태는 한국 정치에서 낯선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정권의 행태는 개헌발의선 확보에도 실패하고, 일본 정치도 퇴행시키는 우를 범한 것이다.

다섯째, 아베 정권의 대한(對韓) 수출규제 조치는 공정한 세계무역 질서를 해치는 경제보복이다. 또한, 그로 인해 타격을 입는 것은 한국경제만이 아니라, 일본 경제도 마찬가지임이 분명해졌다. 아베 정권 각료들은 “일본 경제에는 별 영향이 없다”며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이는 허세에 불과하다. 게다가 일본은 전후 자유무역, 자유경제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국가다. 이번 조치는 자신들이 누려왔던 자유무역 경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행위다. 이에 대해, 영국의 유력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의 수출규제는 경제적으로 근시안적이며 무모한 자해 행위”라고 일침을 놓았다.

 
3.
 
각설하고, 아베 총리는 그동안 일본을 세계 속의 일류 국가로 만들어 줬던 ‘정경분리의 원칙’을 스스로 깨뜨렸다. 이는 일본을 위해서나, 아시아를 위해서나 더 나아가 세계 경제를 위해서나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일본의 노림수를 통해 이번의 경제보복 조치가 단기적으로 한국이 세계적인 선도 분야를 차지하는 반도체산업에 타격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 반도체산업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반도체를 중심으로 완제품 소재부품 생산기술, 조립공정까지 얽혀 있는 ‘글로벌 밸류 체인’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듯 ‘가치사슬’은 1985년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가 처음 주창한 이래, 국제분업 분석에 유용한 개념이 됐다.
예컨대, 일본 휴대폰 시장 점유율 1위인 애플의 아이폰을 보자. 아이폰은 미국에서 설계와 SW를 개발한 후, 일본에서 재료를 공급받은 한국이 주요 부품을 생산한다. 그리고 이를 공급받은 대만과 중국에서 조립·제작해 전 세계 유통망으로 퍼진다. 이처럼 세계 경제의 주요 제품들은 이미 ‘Made in Korea’, ‘Made in Japan’처럼 개별 생산국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졌다. 한일, 한미 등 다자국간 상호의존성도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상대적이다. 제조표시를 경제블록 단위의 ‘Made in Europe’이나, 나아가 ‘Made in World’라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닌 단계다. 삼성의 피해는 일시적인 생산 차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삼성의 공급지연으로 ‘도미노 피해’를 입는 애플, 아마존, 구글 등 세계 IT기업들의 비난은 일본 정부를 향할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은 자연스럽게 자체개발이나 일본 외의 나라를 통해 소재와 부품조달 창구를 확보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본 기업에 돌아간다. 결국, 일본의 수출규제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행위다. 이런 아베 총리의 자해 행위에 대해 세계 각국에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 블룸버그 통신은 7월 22일 ‘한국을 상대로 한 아베 신조의 가망 없는 무역전쟁’이라는 기사로 조목조목 비판했다. 심지어는 한일 반도체 분쟁에서 삼성의 경쟁력 있는 대체품으로 떠오른 TSMC도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밸류체인’이 반도체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걱정하면서 실적을 하향 조정했다.
아베 총리는 세계 경제와 무역을 정치도구로 쓰는 ‘비열한 질서’를 뜻하는 ‘트럼프 모델’을 모방하려 했으나, 일본은 미국과 체급이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한국경제 역시, 일본이 무시할 수 있는 체급이 아니다. 애초부터 상대편의 굴복을 기대하고 쓸 수 있는 전략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 경제가 이미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아베가 크게 오판한 셈이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정상국가 전략을 계속 추진한다면, 아베 총리는 ‘자유시장 세계의 공적’이라는 오명만 얻게 될 것이다.

 

4.
 
아베 총리는 왜 이런 ‘비열한 질서’를 추구하는 것일까? 그의 무모성에는 어떤 원인과 배경이 존재하는가? 우선,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이 주축이었던 동북아시아의 안보 질서가 재편되고 있고, 여기서 주도권 상실에 대한 초조감이 작용하는 것이라고 분석된다. 북한은 일본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핵무기와 미사일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리고 급성장한 군사력을 가지고 ‘통미봉남’을 넘어서, 일본을 무시하면서 미국과 직접 협상을 벌이는 ‘통미봉일’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에, 트럼프 정권도 일정하게 호응하고 있다. 한편 중국의 경제력은 일본 경제력을 훨씬 능가하고, 강화된 국력을 바탕으로 영토분쟁 등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남북한이 오랜 적대관계를 끝내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려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베’로 대표되는 일본 극우세력들은 평화와 협력이 아닌 대결과 군사대국화로 나아가려는 것이고, 그 첫 희생양으로 ‘가장 만만한’ 한국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한국일까? 나는 아베의 이 선택에서 일본의 우월감과 초조감, 그리고 분노를 읽는다. 한국경제는 6.25 전쟁 이후 부흥하게 된 일본의 ‘관서경제권’에서 노동집약적이며 단순가공적 생산기지였다. 청구권 자금과 경제협력자금, 기술이전 등은 한국경제 성장의 발판이 됐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경우 일본 기업을 모방하면서 발전해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일본의 우월감을 낳았다. 그런데, 이런 경제적 속국이었던 한국이 ‘감히’ 일본 경제를 넘보고, 정보통신분야 서비스 등에서 일본을 능가하는 사태가 생긴 것이다. 이는 일본의 불안감과 초조감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한국의 현 정부는 북한과의 적대행위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데 명운을 걸고 있다. 단합된 한반도는 일본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이런 배경이 작용한 것이다. 한국을 향한 일본 보수층의 감정은 우월감, 초조감, 분노와 공포감까지 복합적으로 응집되고 있다. 감정에 사로잡히면 냉정한 판단을 못 한다. 한국을 표적으로 삼아 단기간에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아베는 오판한 것이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일본의 수출 제재가 한국기업들의 신용등급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도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은 Aa2, 등급 전망은 안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우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아베는 한국이 과거사와 관련해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보상의 근거인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37년에 도발한 태평양전쟁에 한정된 것이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에 일본 제국주의는 한반도 주변에서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도발했다. 한국에서의 동학 농민전쟁 진압, 의병진압, 관동대지진 시기에 재일 한국인 학살 등도 자행했다. 일본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패전국이었지만, 천황제도 유지했고 일급전범들도 대부분 복권돼 전후 정치의 주역이 됐다.

역지사지해보자. 이를 ‘불행했던 과거’라며, ‘유감’을 표명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결국, 아베 총리의 조치는 모순적인 효과를 낳고 말았다. 그는 정상국가화를 목표로 하지만, 한국과의 지소미아(GSOMIA) 연장 실패를 초래함으로써 더욱 미국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군사비 지출의 급증은 일본 경제의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일본의 비판적 지성인인 우치다 타츠루(內田樹)와 시라이 사토시(白井聰)가 말한 허구적인 민주주의 환상에 취하는 ‘속국민주주의’로의 길이 강화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나는 일본이 전쟁과 패전이 가져온 미국 종속국가라는 불편한 현실에 눈감고 침묵한 채 허구적인 민주주의 환상에 취하는 가장된 나라이며, 그동안 교묘히 감춰온 잔학한 5대 전쟁과 반인륜적 대규모 학살. 그리고 패전 후 미국의 속국을 자처해서 ‘손쉽게’ 보상받은 경제력과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얻은 비윤리적이고 반규범적인 주도적 지위를 누리는 나라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과거 침략에 대한 사죄를 외면해온 아베의 전략은, 패전 이래 진정성 있는 반성과 배상을 토대로 얻은 유럽 주도국인 독일의 전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임을 보여준다.

독일이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통해 유럽 대륙을 얻은 반면, 일본은 과거사를 외면함으로써 아시아 대륙을 잃고 있다. 아베 총리가 목표하는 평화헌법 9조를 개헌해 전쟁이 가능한 ‘대일본주의’ 방향성은 철저한 대미종속 구조에서 작동하면서 전후 체제로부터 탈각을 말하는 모순되고 분열적 태도이며, 아베의 개헌 시도는 아시아 대륙에 군국주의를 부활시키고, 아시아 국가들을 신(新)냉전체제로 몰아가고 있다는 의심과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 자신의 장점과, 일본인들의 장점을 좋아하는 우방, 친구들을 잃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5.
 
끝으로, 일본의 불법강점에 대한 청구권과 관련해서는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의 조부들은 여섯 형제였다. 이분들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찬탈하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전원이 가족들과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나의 조부들과 그 자녀들은, 대다수가 일제에 의해 잔인한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조부들이 망명길을 떠나면서 미처 처분하지 못했던, 현 시가로 수조에 달하는 부동산은 조선총독부가 무단으로 강탈해, 친일파 등에게 전리품을 나눠주듯 넘겼다. 그럼에도, 나와 내 가족은 개인적으로 일본에 배상을 청구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국인이 무수히 많다. 일본 정부가 일말의 양식이라도 남아있다면 한국과 한국의 국민에 대해 진심의 사죄를 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다.

아베는 일본의 ‘정상국가화’를 강조하고 있다. 진실로 정상국가, 문명국가로서의 자격을 원한다면, 군사적 정상국가화 이전에 도의적·인류 보편적 관점에서 이성과 합리적인 정신이 작동하는, 진정한 의미의 ‘정상국가’를 먼저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미 너무 늦었지만, 더 늦어지기 전에 말이다.

 

 

글‧이종걸
더불어민주당의 5선 의원이며,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의 손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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