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지원금, 부동산 투기 등 뜨거운 주제를 다룬 TV토론 방송 다음날이면 으레 받는 질문이 있다. 어느 쪽이 맞느냐는 것. 토론에는 정답이 없으므로, 대개 입장을 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런데 대화를 하다 보면, 대학시절 원론에서부터 고급과목까지 섭렵했다는 사람들조차 경제학이 단일한 이론체계로 이뤄진 학문임을 피력하는 모습에 놀랄 때가 많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경제학은 시대적 산물이고, 다양한 계보로 이뤄진 지식체계다. 슘페터 같은 학자는 ‘이론’을 해석학적 도구상자라는 의미로 사용했을 정도다. 요컨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이론이란, 특정한 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의 논리적 정리를 의미하는 것인 만큼, 합리적 추론도구로서 이론이 갖는 ‘상대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대세다.
신간 『나라가 빚을 져야 국민이 산다』는 “정확한 현실 묘사를 목표로 한다”(p.53)라고 선언하며, 현실과 유리된 박약한 이론과 그 귀결인 독단을 배격한다. 저자의 집필동기는 ‘각자도생’이라는 신자유주의 모토를 대변하는 주류경제학(신고전파)이론의 폐해가 현실적으로 막대하기 때문인데, 그 비판영역이 재정운용 및 그와 관련된 지급결제시스템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코로나19 이후 달성해야 할 ‘이중의 전환’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위한 경제학’이라는 부제가 암시하듯이, 저자는 자본주의 일반의 모순(수요부족) 위에 중첩된 코로나19의 충격으로부터 실물경제를 회생시킬 가장 유력한 정책수단이 재정정책임을 거듭 강조한다. 당연한 얘기를 왜 하느냐고 반문할 분들을 위해, 이 책이 결코 만만치 않은 문제의식에 기초해 있음을 보여주는 한 토막을 옮긴다.
“이미 중앙은행은 자신의 통화를 발행하고 있다. 다만 그 통화가 제도적으로 민간경제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을 뿐이다. (...) 중앙은행 통화는 건전한 기업과 개인이 사용할 수 없다. ‘제도적으로’ 민간경제는 은행이 제공하는 통화만을 사용하도록 정해놓은 것이다. 정부가 화폐를 공공재로 공급한다면, 은행들은 망할 것이다. 하지만 경제 전체에는 더 큰 이익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은행이라는 기업의 이익이 공공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p.96)
대학에서 강의되는 ‘표준’ 경제학 과목을 수강한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주권통화(sovereign money) 개념에 기반한 이 주장이 허황되거나 무모하게 들리지 않을까. 5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그 반대진영의 입장 또한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기에,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총론격인 1장의 제목부터 그렇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은 왜 필수적일까? 이 책에 의하면, 코로나19 발(發) 위기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는 지금 건강한 체제로의 시급한 전환에 투자와 비용이 필요하지만, 그 누구도 부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수요부족이 일상인 현상을 은폐한 신고전파 경제학을 비판하며, 정부의 역할을 호명한다. 아울러 소득주도성장 전략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긴축기조를 견지해 온 현 정부의 정책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한다. 서론에서 밝히고 있듯, 코로나19 이후 달성해야 할 ‘이중의 전환’, 즉 “사회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는 동시에, 생태친화적인 경제체제”(p.13)로의 이행에는 적극적 재정정책이 우월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화폐의 본질과 통화공급의 결정원리 - 넓게는 포스트케인지언의 내생화폐론, 좁게는 현대화폐이론(MMT)에 기초하고 있다 - 를 설명하는 2장(‘돈은 어디에서 오는가’)은 전체 내용을 이해함에 있어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독자들은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금융체제 - 통화공급을 전적으로 민간은행에 맡기는 체제-가 왜 문제인지(“어째서 서민에게 은행 문턱이 높은가”와 관련 있지만, 다른 차원의 문제) 설명을 들으며, 대안적 체제의 필요성과 현실적 형태들에 대한 신세계를 접할 수도 있다.
재정정책의 초점은 경기부양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비전통적 이론 및 정책에 대한 지식이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나, 저자가 동원하는 도표와 대차대조표를 따라가다 보면 일반인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체계를 갖췄다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그렇다고 해서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 부채를 누가 부담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천양지차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발휘하는 논리전개 솜씨는 웬만한 이론서에 견줘 봐도 떨어진다고 할 수 없다.
국가재정의 운용원리가 가계와 다르다거나, 세금을 걷지 않고도 정부가 지출할 수 있음을 논증하는 3장(‘재정적자는 정부의 숙명’)은 이 책의 본론에 해당한다. 주류경제학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생경할 수 있으나, 재정건전성에 대한 집착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정부의 재정지출 여력은, 흔히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적자재정 운영의 효과를 논외로 한다면, 이론적으로 무한하다”(p.147)는 주장은 정부의 재정활동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사이에 있는 밀접한 연관을 이해하는 열쇠이며 기존의 경제원론이나 거시경제학 교과서에는 없는 사고방식이다. “(...) 재정정책의 초점은 ‘건전한 재정’이 아니라, 경기부양이어야 한다”(p.156)는 저자의 일갈은 바로 이런 인식에 기초해 있다.
4장(재정적자는 위험한가?)에는 한국사회에서 흔히 적자재정의 위험성으로 거론된 사례들이 망라돼 있다. 적정국가채무비율이란 존재하는가. 국가채무비율의 증가로 디폴트 사태나 인플레이션, 국가신용도 하락, 외국인 자본이탈로 인한 경기침체, 공공부문에 의해 민간부문이 잠식되는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가 발생할까? 저자는 이런 주장들이 모두 근거 없음을 밝히며, 정부부채가 “오히려 성장하는 경제에서 증가할 민간의 부채부담을 덜어주고, 필요한 통화와 금융자간을 공급하는 바람직한 방법”(p.223)임을 재확인한다. TV토론을 열심히 시청한 독자라면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별 근거가 없는데도 시종일관 틀린 주장을 펼친 인물이 있다면, 그 어떤 명사라 할지라도 저자가 비판한대로 “반지성주의”의 표본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재정적자에 대한 부정적 관점 극복이 관건
긴급재난지원금과 주택문제를 논할 때 제기되는 세대간 갈등의 실체와 원인은 무엇일까. 5장(정부의 재정 : 세대간 연대의 고리)은 현재의 재정적자가 미래세대에 부담을 떠넘기지 않는다는 점을 논증한다. 이어지는 NABO 재정전망의 문제점과 새롭게 추계한 재정전망 및 보론은 비전공자에게 어려울 수 있지만 뛰어넘어도 크게 지장이 없다. 기술적 부분보다는 오히려 “거대한 전환”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훨신 더 중요해 보인다. 이행전략을 순조롭게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국민의 복지 경험과 실업에 대한 공포 해소다. 실천적 연결고리로 이보다 선명한 것이 있을까. 그래서 “이 모두는 재정적자에 대한 부정적 관점을 극복하는데서 시작”(p.265)된다는 저자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다시 TV토론으로 돌아가 보자. 토론자 모두 경제학 전공자인데, 끝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학이라고 다 같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의 기본원리가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말은 그 형식에 관해서만 옳다. 경제이론의 내용은 시대와 제도적 환경의 산물이므로, 현실과 괴리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론 역시 진화해야 한다. 기재부나 국회예산정책처의 뒷받침한 주류경제학 이론은 코로나19로 인한 위기상황을 맞이해 그 허구적 관념을 스스로 드러냈다. 그것이 “정확한 현실 묘사”조차 못 하게 된 원인은 아마도 변화를 거부하며 진화를 멈췄기 때문일 것이다. 이론적 지식체계는 살아있는 유기체다.
『나라가 빚을 져야 국민이 산다』는 재난지원금 지급부터 부동산 투기에 이르기까지 당면한 현안들을 저자 특유의 치열한의 문제의식 속에 녹여 가상의 공론장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은, 복잡한 이론서보다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자, 재미에 더해 현실 문제에 대한 판단기준도 요구하는 욕심(?) 많은 독자에게 최상의 안내서가 돼줄 것이다.
2장에서 소개한 대안적 프로그램들이 우리 사회에서 과연 어떤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을지 다루지 않은 점은 다소 아쉽지만, 후속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는 만큼 기대는 크다.
글·배인철
독립연구자, 경제학 박사. 오래 전 주류경제학에 회의를 느껴 마르크스의 미완성 신용론을 재해석한 학위논문을 썼으나 경제학에서 출발해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의 망망대해로 나아간 허버트 사이먼을 흠모한 나머지 오늘도 '뜻밖의' 외도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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