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3일 한 청년이 죽었다.
태국에서 온 청년은 서른세 살의 자이분 프레용이었다. 그는 태국에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영어에 능통한 꿈 많은 청년이었다. 그러나 가족의 빚과 병원비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서 일하는 것을 택했고, 2018년 여름 한국 땅을 밟았다. 경기도 양주시의 한 공장에서 프레용이 맡은 업무는 안전장치도, 안전 통로도 확보되지 않은 거대한 컨베이어벨트에 건축 폐기물을 올리는 일이었다.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월급 140만 원을 받기 위해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잔업이 있는 날은 밤 9시까지 주 6일을 일했다.
동료 넷과 나눠 쓰는 좁은 방 한 칸이 프레용의 숙소였다. 관광비자로 입국해 일하는 것이 단속에 걸릴까 봐 함부로 밖에 나가지 못했다. 프레용은 그저 돈을 벌어 귀국해 고향에서 카페를 차리겠다는 소박한 꿈으로 하루하루 버텼다. 그 청년은 어느 날 아침 순식간에 컨베이어벨트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흩어져서 계속 일해! 핸드폰 하지 마! 빨리빨리, 빨리빨리!”
비명을 듣고 모여든 노동자들에게 관리소장은 이렇게 소리쳤다.
작업반장이 뒤늦게 기계 스위치를 끄고 119를 불렀지만, 이미 프레용은 숨진 뒤였다.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한 컨베이어벨트는 불과 2주 만에 다시 가동되었다. 회사에서는 제대로 된 사망 원인 규명 없이 장례비만 지급하였고, 민사배상금 3,000만 원으로 산업재해 협상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최저임금 규정에 따른다면 회사가 프레용에게 주지 않은 임금만 1300만 원, 그의 유족이 적법하게 받을 수 있는 산업재해 보상금은 2억 1천만 원이었다.
“내 아들은 죽었어요. 아들은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프레용의 아버지 자이분 분미 씨는 ‘자이분 프레용 산재 사망사건 대책위원회’와 함께 회사에 대항해 50일 넘게 끈질긴 싸움을 이어갔다. 회사 측은 1억 5천만 원의 민사배상금을 지급하는 데 동의했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타지에서 힘든 노동을 견뎌왔던 프레용은 1년 6개월 만에 유골이 되어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주노동자 착취의 역사
2019년 9월 10일 경북 영덕군의 오징어 가공업체에서 태국인 이주노동자 세 명과 베트남인 이주노동자 한 명이 탱크 속에서 질식해 사망했다. 이들은 마스크 없이 폐기물 탱크를 청소하다가 치사량을 훨씬 뛰어넘는 농도의 유독가스에 노출되었다. 2020년 1월 31일 나이지리아 출신 이주노동자가 양주시에 위치한 가죽공장 폭발 사고로 숨졌다. 유족은 126일이나 시신을 인도받지 못했다. 2021년 3월 6일엔 우즈베키스탄 출신 이주노동자가 사망했다. 그는 작업하다가 위에서 떨어진 700kg 정도의 기계에 맞아 숨졌다. 언론에 조명된 사례 외에 더 많은 이주노동자가 한국에 일하러 와서 다치거나 죽었다.
2015~2020년 이주노동자 가운데서 연평균 6,000~7,000명이 산업재해 피해를 보았다. 이 기간 산재 사망자는 563명이었다. 이들의 산업재해 발생률은 내국인 노동자보다 약 30% 높았다. 만명당 사고사망자비율은 0.86명으로 내국인(0.49명)보다 75%가량 높게 나타났다. 정부 통계가 합법적인 체류자격을 갖춘 이주노동자 사례만 포함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산업재해를 당하는 이주노동자의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동 현장에서 이주노동자는 산업재해 외에 임금체불,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이주노동자가 처음 한국 땅에 들어온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는 문제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은 서독 광부와 간호사, 중동 건설업 노동자 등 이주노동자를 수출하는 국가였다.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이때까지 연평균 10%대를 기록한 한국의 고도성장은 저임금으로 장시간 노동을 버티는 노동력에 의해 가능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나고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이 빠르게 상승하는 등 노동 환경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건설업, 광업, 제조업 분야의 취업 기피 현상이 생겨났다. 저임금 노동력에 의존한 중소기업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치명적이었다.
이때 이주노동자가 인력 공백을 메웠다. 1991년 10월 정부는 최초로 공식적인 이주노동자 제도를 도입했는데, 해외에 투자한 기업들이 산업연수생을 국내에 데려올 수 있게 한 것이다. 1993년 11월에는 ‘외국인 산업기술 연수제도’(이하 ‘산업연수제’)를 도입해서 국내 중소기업이 해외 인력을 활용할 수 있게 했다. 또 원칙적으로는 불법이었으나, 노동자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불법체류 상태의 외국인에게 비정기적으로 체류를 연장해주었다. 이 때문에 관광비자로 일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한국행 붐이 일어났다. 국내 이주노동자는 1991년 4만5,000여 명에서 1995년 14만 명으로 빠르게 증가했다.
산업연수제는 해외 인력을 ‘연수생’ 자격으로 입국시키는 제도였다. 연수생이란 자격 조항 때문에 일반 노동자처럼 일해도 근로기준법, 산업재해법, 최저임금제 등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일터를 옮기는 데에 제한이 따라붙었다. 배정받은 사업장에서 해고당하거나 공장이 휴업ㆍ폐업했을 때만 다른 사업장으로 갈 수 있었다. 임금이 밀리는 것은 예사였고 폭행을 당하거나, 여권을 빼앗기는 등 인권유린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998년 조사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는 주로 하루 10시간, 주 56시간을 일하는 근로계약을 맺었다. 당시 근로기준법이 주당 44시간 노동을 규정한 것과 비교했을 때 10시간 이상 차이가 났다. 그런데다 많은 사업주가 계약보다 더 많은 노동을 요구했다. 주당 12시간 이상 초과 근무를 시키는 것은 기본이었고, 하루 15시간의 근무를 요구하는 곳도 있었다.
장시간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은 쥐꼬리만 했다. 1997년에 정부가 정한 최저임금은 월 33만5,000원 정도였는데, 이때 연수생을 고용한 한 섬유회사에서는 월 18만 원을 월급으로 지급했다. 구미에 있는 다른 전자 회사는 월 12만 원을 지급했다. 연수생들은 평균적으로 한국인 노동자가 받는 임금의 65.9%를 받았다. 이들이 법정근로시간 또는 내국인 노동자의 노동시간보다 훨씬 길게 일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한국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이유로 해고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고용허가제 시행 이전 연수생 신분으로 2004년 입국한 파키스탄 출신 일군의 이주노동자는 김포에 있는 금속회사에 배정을 받았다. 이들은 일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여권을 빼앗겼고 곧바로 노동에 투입되었다. 여기에다 회사에서 주는 한식이 몸에 맞지 않아 한 달 넘게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다. 연수생들은 파키스탄 음식을 먹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회사 측에서는 단칼에 거절했고, 이로 인한 갈등이 계속되자 회사는 이들을 해고하겠다고 겁을 주었다.
해고 협박에 연수생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이유는 첫 번째로 황당하게도 단체로 항의할 수 있는 권리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수생의 태업, 파업, 쟁의, 노조 활동은 신분을 벗어난 행위라는 명목으로 금지되었다. 노동3권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전부 박탈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이들을 담당하는 중소기업협동조합 중앙회의 전횡 때문이었다. 정부는 연수생 모집ㆍ송출ㆍ관리를 전부 민간 기관인 중앙회에 맡겼다. 중앙회가 지정한 관리업체들은 연수생이 임금체불, 산업재해, 사업장 내 폭행 등을 신고하면 오히려 이들을 강제로 출국시키겠다고 협박했다. 노동조건에 항의하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사업장을 이탈했다고 관리업체가 거짓으로 신고해서 강제로 출국시키거나 미등록자로 만든 사례가 실제로 종종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중앙회는 연수생 모집 업무를 독점적으로 맡으면서 수수료 비리를 저질렀다. 국가에서 정한 적정 취업 수수료는 연수생의 출신 국가마다 차이는 있지만 약 100만 원이었다. 적게는 2,000~3,000달러, 많게는 9,000달러까지로 부풀려 폭리를 취했다. 연수생들은 빚을 내어 수수료를 마련하곤 했다.
1995년 1월 네팔 연수생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였다. 취업 알선 당시 약속받은 금액의 절반에 못 미치는 월급을 받고, 초과 근무를 강제당한 연수생들은 관리업체로 가서 불만을 제기했다. 관리업체는 문제의 해결은커녕 이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폭행까지 가했다. 연수생들은 시위를 할 수 없다는 법을 무릅쓰고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산업연수제의 문제점이 연이어 불거지자 정부는 1995년 산업연수제에 관련한 추가 지침을 제정했다. 폭행 및 강제노동 금지, 수당 직접 지불, 법정근로시간 준수, 최저임금 보장, 산업재해 보험과 의료보험 혜택 제공 등 노동자로 보장받아야 할 기본 권리를 뒤늦게 포함하였다. 그러나 지침은 명목상의 규정에 불과했다. 아무런 강제 조항이 없어 산재보험과 의료보험을 적용하는 사업장이 거의 없었다. 그동안 무료로 제공한 식대를 임금에서 공제한 탓에 임금이 줄어들기까지 했다. 노동 현장은 아무런 변화 없이 열악했다. 이런 이유로 산업연수제는 ‘현대판 노예제도’라고 불렸다. 2007년까지 한국은 산업연수생이라는 명목으로 이주노동자 착취를 이어갔다.
‘불법체류자’의 눈물
1998년 6월 방글라데시 출신 연수생 무띠가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1년 뒤 사업장을 이탈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었다. 취업 수수료로 낸 1,000만 원을 갚기엔 중앙회에서 지정해 준 공장의 월급 31만 원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는 70만 원을 월급으로 주는 다른 공장으로 가기 위해 배정된 사업장을 이탈했다.
무띠처럼 억압적 대우와 낮은 임금을 피해 정해진 사업장을 이탈하는 연수생이 나날이 증가했다. 1996년에는 입국한 뒤 무단이탈한 연수생의 비율이 30%에 달할 정도였다. 이렇게 사업장에서 무단이탈하거나 정해진 체류 기간을 넘겨 일하여, 비합법적으로 국내에 체류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많은 이들이 ‘불법체류자’라고 부른다.
국내 미등록 이주노동자 비율은 계속 증가해서 2001년과 2002년엔 거의 40%를 기록했다. 정부는 이주노동자 제도를 바꿔 2004년 고용허가제를 시행하였다. 당시 중앙회는 “연월차 수당, 퇴직금 등 법정수당을 의무적으로 지급하게 되면 중소기업에 부담을 지운다”는 이유로 제도 변경에 반대했다. 역설적으로 그때까지 이주노동자가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고 왜 사업장 이탈을 택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 셈이다.
고용허가제를 도입하면서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줄이겠다는 취지로 추가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고용허가제가 국회를 통과한 2003년 11월 15일 기준으로 한국에서 4년 미만 체류한 18만여 명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모두 합법화했다. 동시에 4년 이상 체류 중인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자진 출국과 단속 후 추방 정책을 실시했다.
”내가 7년이나 돈 벌었는데 그 돈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 비꾸는 단속 조치를 앞두고 동료들에게 허탈함을 표했다. 한국에 오고 처음 몇 년 번 돈은 고스란히 브로커 수수료를 갚는 데 쓰였다. 그 이후 번 돈은 가족에게 전부 송금하고, 동생을 한국에 데려오느라 다시 1,000만 원의 빚을 더 졌다. 이 상황에서 단속ㆍ추방의 위협을 마주하게 된 그는 얼마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국에 오기 위해서는 중앙회와 브로커에게 많은 돈을 주어야 했다. 집과 땅을 팔고 빚을 내어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는 적게는 1년, 많게는 2년치 임금을 모아야 간신히 그 돈을 갚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과 가족을 위한 돈을 벌 수 있었다. 오랫동안 한국에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머물러도 이들은 구조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불법의 길을 택한 이유는 조금이라도 노동조건이 더 나은 곳을 찾아서였고, 한국에 들어오려고 선지급한 어마어마한 브로커비와 취업수수료를 감당하기엔 합법적 체류 기간이 부족해서였다.
고용허가제 전후로 몇 년간 정부는 강력하게 단속과 강제 추방을 실시했다. 막다른 길에 몰린 이주노동자 중 어떤 이는 조사실과 보호실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택했고 단속반을 피하다 추락해서 사망했다. 비꾸처럼 단속 전 자살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단속반은 이주노동자에게 가스총, 그물총, 곤봉을 사용하는 등 심각한 인권침해를 저질렀다.
노동과 죽음의 외주화, 고용허가제
2003년 겨울 정부는 고용허가제를 국회에서 통과시켰고 이듬해 8월 고용허가제가 시행되었다. 산업연수제는 고용허가제 이후로 몇 년간 유지되다가 2007년에 폐지되었다.
고용허가제는 산업연수제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제도로, 인력난을 겪고 있는 사업장이 이주노동자를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있도록 한다. 사업주가 필요한 인원을 신청하면 정부는 고용허가제로 입국을 신청한 이주노동자 명단을 제공하고, 이후 사업주가 그중에서 원하는 사람을 뽑는 방식이다. 뽑힌 노동자는 사업주와 계약을 맺고 한국에 들어와 3년을 일할 수 있는데 이 기간이 종료되면 재계약을 해야 1년 10개월 더 머무를 수 있다. 만약 이렇게 근로 기한을 꽉 채워서 일하고 난 뒤에 ‘성실근로자’로 인정된다면 고국에 갔다가 한국에 재입국해서 같은 방식으로 4년 10개월을 더 일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가 한국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최대 9년 8개월인 셈이다.
정부는 고용허가제를 “다른 나라의 모범사례가 될 만한 성공적인 이주관리시스템”이라고 홍보한다. 그러나 ILO(국제노동기구) 유엔 등 국제기구, 국가인권위원회와 이주노동자 관련 단체들의 평가는 전혀 다르다. 사실상 ‘현대판 노예 허가제’로 불렸던 이전의 산업연수생제도만큼 노동자에게 불리한 제도라는 것이다.
고용허가제는 말 그대로 기업의 ‘고용’을 ‘허가’하는 제도이다. 방점이 노동자들의 ‘노동’ 보장이 아니라 고용에 있다. 고용허가제의 대표적 문제점은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 권리 제한이다. 이주노동자는 지정된 근무처에서만 일해야 하며, 근무처를 변경하려면 사업주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사업주의 동의 없이 사업장을 변경하려면 이주노동자가 직접 자기 책임이 아니라 ‘정당한 사유’가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법적으로 인정되는 사유는 사업장의 휴업/폐업, 고용주의 성폭력이나 폭행, 임금체불 등 이미 피해를 심하게 입은 경우에 한했다. 사업장 환경이 위험해도 정당한 사유에 포함되지 않았다. 노동자가 자주 다치는 ‘산재 다발 사업장’이라고 하여도 직접 다치지 않는 이상 직장을 떠날 수 없었다.
사업장 변경은 근로 기간 동안 세 번만 가능했다. 스리랑카에서 온 카말은 회사 도산, 고용주의 폭행, 월급 밀림 등 사유에 따라 세 번 직장을 옮겼다. 그러나 네 번째로 일하게 된 공장에서 또 폭행을 당했다. 카말처럼 사업장 변경 횟수를 모두 사용했다면, 아무리 힘들고 열악한 환경이더라도 절대로 일자리를 바꿀 수 없다. 회사에 일이 없어 강제로 무급으로 대기해야 하는 상태였는데도 법에 규정된 사유가 아니라서 사업장을 변경하지 않고 몇 달을 참은 사례도 있다. 그 노동자는 결국 일방적으로 해고되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기된 고용허가제의 또 다른 문제는 고용과 해고가 모두 사업주에 달려있기에 노동권 침해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2019년 10월 20일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전국이주노동자대회에서 네팔 출신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은 “고용부터 퇴직까지 이주노동자에 대한 모든 권한이 사장한테 있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주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라며 “지시를 어기면 부당 징계, 임금 안주기, 사업장에서 왕따시키기, 본국 송환 협박 등을 당한다”라고 호소했다. 실제로 이주노동자 대상 실태조사에서 사업주가 재고용 계약을 빌미로 협박하면서 무리한 잔업, 특근, 산재보험 미적용, 임금 삭감, 기숙사비 부과 등을 강제한 사례가 빈번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의하면 이주노동자가 받지 못한 임금은 2020년 기준 1,500억 원을 넘겼다.
절대적인 을의 위치에 있는 이주노동자가 사업주에게 당당하게 권리를 요구하기란 어렵다. 말을 꺼내 봐도, 사업주는 불만이 있는 사람을 자르고 새 사람을 고용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임금교섭권도 이들에게 꿈 같은 이야기이다. 파키스탄에서 온 아밀은 오랜 근무 후 동료들과 함께 기본급 인상을 사업주에게 요청했지만 “너희 나라로 가든지, 다른 공장으로 가라.”라는 싸늘한 답변만 돌아왔다. 그와 동료들은 모두 곧바로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아도 사장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일자리가 위태하다. 스리랑카에서 온 프레얀타 말알은 어느 날 절도죄 혐의로 체포되었다. 공장에서 생산하고 남은 불량품이 기숙사에서 발견되었다는 혐의였다. 발견된 물건은 원래 회사 공장장과 이사에게서 허락을 받고 고향으로 보내기 위해 기숙사에 따로 챙겨둔 것이었다. 추석 연휴에 한국인처럼 일주일을 쉬지 말고 3일만 쉬다가 일하라고 지시했는데 프레얀타 말알 등이 따르지 않자 사장은 “스리랑카 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별렀다. 순식간에 절도범으로 몰린 프레얀타 말알은 재판을 받았다.
네팔에서 온 한 노동자는 기계 오작동으로 다쳐 왼팔에 장애가 생겼다. 하지만 그는 “사장님 진짜 마음이 좋아요”라고 말했다. 고장 난 기계를 고쳐달라고 몇 차례 말했는데도 무시하고, 위험할 게 뻔히 보이는 기계 앞으로 그를 내몬 이가 사업주인데도 그렇게 말했다. 사업주가 산업재해 신청을 해주었다는 이유에서다. 모든 노동자라면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산업재해에 따른 치료이지만 이들에게는 사업주가 규정대로만 해주어도 ‘고마운 일’이다.
“산재 신청도 해주고 치료받게 해줬어요. 네팔 친구들 일하는 다른 공장, 산재 신청 안 해줘요….”
애초에 위험한 사업장을 피해서 계약을 맺으면 안 되는 걸까. 한국으로 오기 위한 그들끼리의 경쟁은 본국을 떠나기 전부터 무척 치열하다. 최초 노동 신청부터 입국하기까지는 평균적으로 1년 이상 걸린다. 한국어 시험 점수를 따고 송출 비용을 마련하는 등 상당한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이주노동을 준비한다.
고용허가제에 따르면 사업주가 노동자를 선택해서 계약해야만 한국에 들어올 수 있다. 사업장 배치에만 8개월이 걸릴 정도로 한국에 이주노동을 하러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마음에 드는 계약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고용계약서를 꼼꼼히 따져보고 일자리를 고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장이 자신을 뽑았을 때 바로 계약을 맺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다. “아무 회사라도 빨리 한국에 입국하고 싶어서” 첫 회사를 선택했다는 이주노동자가 많다.
이들이 마주한 한국의 현실은 주지하듯 폭언, 폭행, 임금체불, 협박, 열악하고 위험한 근무환경이다. 특히 네팔처럼 한국 이주노동 경쟁률이 높은 나라일수록 한국에 입국한 후 겪는 심리적인 어려움이 크다. 2010년부터 2017년까지 자살을 택한 네팔 이주노동자는 무려 40명에 달한다.
“우린 일하다 죽고 싶지 않다”...노동력은 취하고 싶고, 이주는 막고 싶고
고용허가제 외에 다른 제도적 미비점이 이주노동자를 위험으로 내몬다. 많은 이주노동자가 제조업 등 기계를 사용하는 공장과 계약하여 일하는데도 제대로 된 안전교육을 받지 못한다. 고용허가제로 입국하는 이주노동자는 출국 전 45시간, 출국 후 16시간 취업 교육을 받는다. 안전교육에 배정된 시간은 모두 합해 4시간 30분밖에 되지 않는다. 이 형식적인 교육이 정부 차원에서 모든 이주노동자에게 실시하는 안전교육의 거의 전부이며, 사업장에서 교육은 사업주의 재량에 달려있다.
사업주조차 제대로 된 안전교육을 받지 않았거나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출입국관리법 등 이주노동자의 근무 환경과 직결된 법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많다. 규정에 따르면 외국인 취업 교육기관은 사업주에게 근로자를 인도하면서 이러한 필수적인 법 내용을 ‘알려야’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정해져 있지 않다. 말 그대로 한번 알리기만 하면 규정에 저촉되지 않는 것이다. 그마저도 서비스업, 50인 미만 어업, 5인 미만 사업장은 아예 산업안전보건법 제 31조(안전보건교육)의 적용에서 제외되어 있다.
앞서 살펴본 2019년 경북 영덕 사례에서 오징어 가공업체 사업주는 유독가스가 나오는 밀폐된 공간에서 작업 시의 질식 위험성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판단기준은 산업 안전보건 규정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었다. 자신이 몇 차례 탱크에 들어갔을 때 괜찮았다는 것이다. 2020년 양주 가죽공장 폭발 사고에서는 사업주가 안전 관리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도 전문인력을 채용하지 않았다.
처벌은 미미하다.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이주노동자 고용 사업장 중 법을 위반한 사업장은 2019년에 1,672곳이나 되고, 위반 건수는 6,895건이다. 이 중 사법처리가 된 것은 1건, 과태료 부과는 181건밖에 없었다. 법을 지키는 게 오히려 신기한 상황이다.
사업주를 조금이나마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이주노동자 인력 배정에 영향을 주는 사업장 ‘점수’이다. 점수 규정에서 산업재해로 인한 부상은 아무런 감점 사항이 되지 않는다.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에만 점수를 깎는 것이다. 한 플라스틱 제조업체는 5년 동안 8명의 부상자가 나왔는데 아무런 감점이 없었다. 오히려 이주노동자가 필수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귀국 비용 보험과 상해보험을 전원 가입 완료시켰다는 이유로 가점 1점을 받았다.
”사실 우리가 비자는 없지만 열심히 일했잖아요. 한국 사람들 싫어하는 일, 우리가 다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를 짐승보다도 못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2003년 불법체류자 단속 반대 농성에 참여한 한 이주노동자의 말은 계속되는 이주노동자 정책의 모순을 정확하게 짚었다. 사실 한국이 계속해서 이주노동자 인력을 들여온 이유는 그만큼 그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고용허가제 규정에서 지정하는 고용허용 업종 또한 제조업, 건설업, 어업, 서비스업 등 3D 분야에 속하는 업종이다.
“냄새나고, 덥고, 시끄럽고 밤에도 일해야 하는데 누구 하겠어요. 요즘은 다 대학 나오고 그러는데, (한국인) 사무직 1명 뽑으면 30명 오고, 현장직 30명 뽑으면 3명 옵니다. (…) 외국인 아니면 단가 맞추기도 힘듭니다.”
어느 공장 관리자의 말처럼 이주노동자가 채우는 빈자리는 한국인이 기피하는 일자리이다. 가구공단에 있는 한 관리자는 “페인트와 화학물질에 온몸이 노출되고, 안전, 위생, 통풍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 조건을 저임금으로 참고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는 적다”고 말한다. 공공ㆍ민간 조사에서 사업주들은 대부분 더 오래, 더 많이 이주노동자를 고용하고 싶어했다. 이들은 합법적 체류자격을 갖춘 노동자가 아니라 작업환경과 임금 조건 개선 없이 일할 노동력을 구했다. 그래서 한국어가 능숙하고 업무에 숙달된 장기 미등록 노동자를 선호한다. 이렇게 이주노동자의 유입으로 생겨난 경제적 효과는 2018년 기준으로 86조7,000억원 원으로 추정됐다.
이주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해 이익을 얻으면서도 한국은 이들이 자국에 오래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국제법상 5년 이상 한 국가에 거주하면 영주권이나 귀화권을 주어야 하는데, 고용허가제에서 허락하는 연속적 체류 기간이 최대 4년 10개월인 것은 이주노동자의 정주화 방지를 위해서다. 구조적 문제의 해결 대신 강력한 단속 정책으로 조금 줄어들었던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2016년을 기점으로 다시 계속 늘어나기 시작하여 2018년 말에는 35만여 명에 이르렀다. 고용허가제 대신 단기비자로 입국해 잠시 일하고 떠나는 불법적인 노동자도 늘고 있다.
슈퍼 기계의 한탄
“당신 기계의 족쇄를 차고 / 슈퍼 기계가 되어 움직이고 있어요 /(…)/ 이제 내 땀을 무시하지 마세요 / 이제 내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마세요 / 왜냐하면 나도 그렇잖아요 / 이 지구상에서 / 당신처럼 감각을 가진 사람이잖아요.” (니르거라즈 라이, ‘슈퍼 기계의 한탄’)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함께 발간한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에 수록된 시다. 화자를 비롯한 이주노동자는 자신들을 동등한 사람이자 노동자로, 인권과 노동권을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사람으로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2020년 12월 20일 경기도 포천에서 31세의 이주노동자 누언 속헹이 사망했다. 영하 18.6도까지 내려가 한파 경보가 울린 날 그는 난방 시설이 고장 난 비닐하우스 기숙사에서 잠을 청했다. 경기도에서만 이주노동자가 숙식하는 이런 비닐하우스 기숙사가 거의 700곳에 육박한다. 농축산어업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 열 명 중 여섯 명은 이런 불법 임시주거시설이나 작업장 부속 공간에 기숙사비를 내며 산다. 지금에야 잠깐 언론의 주목을 받을 뿐이다.
2021년 2월 2일 또 다른 이주노동자 한 명이 경기도 여주의 채소농장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속헹의 죽음 이후 경기도가 이주노동자 숙소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공표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글
송휘수ㆍ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3학년. 어렵고 머리 아프지만 글을 쓰고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안치용ㆍ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ㆍ문학ㆍ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년의죽음역사의눈물’을 함께 진행한다.
노수빈ㆍ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있다.
박서윤ㆍ이화여자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부 3학년. 연극과 뮤지컬에 빠져 살았지만, 코로나 덕분에 새로운 취미를 찾아 나서고 있다. 지나치게 감성적인 탓에 이성적인 사람을 동경하지만, 정작 팍팍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이도 저도 못하는 중.
<참고문헌>
단행본
김달성, 『파랑 검정 빨강』, 밥북, 2020
뻐라짓 뽀무 외,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삶창, 2020
샬롬의집, 『우린 잘 있어요, 마석』, 클, 2013
윤인진, 『한국인의 이주노동자와 다문화사회에 대한 인식』, 이담Books, 2010
이란주, 『아빠, 제발 잡히지마』, 삶이 보이는 창, 2009
이세기, 『이주, 그 먼 길』, 후마니타스, 2012
허창수, 『외국인 노동자: 환영받지 못한 손님』, 분도, 1998
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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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우,「이주노동자 탄압과 무권리로 얼룩진 고용허가제 10년」,『노동사회』 제178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14, 74-81
윤자호,「한국 이주노동자 실태와 고용허가제의 현황」,『이슈페이퍼』 제 142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21
이규용,「외국인 비합법 체류 및 고용실태」,『노동리뷰』4월호, 한국노동연구원, 2020, 3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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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혜정, "출국 전 '30분 안전 동영상' 보고 한국땅 밟는 이주노동자들", <매일노동뉴스>, 201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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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서, "“물 말아서라도 밥 꾸역꾸역 드세요”…‘바다 건너온 김용균’ 아버지 위로한 김미숙씨", <한겨레>, 2019.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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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원, 전현진, "국가가 묵인한 ‘비닐하우스 기숙사’에서 죽어갔다", <경향신문>, 202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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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진, 전민성 "'실패한 이주노동 정책', 단속 추방으로 해결될까", <오마이뉴스>,2004.02.25
지윤수, "이주노동자 또 사망…"정부가 전면 조사해야", <MBC>, 2021.02.10
4. 웹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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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 "2020년 이민자체류실태및고용조사 결과", 2020.12.21
한국산업인력공단,"외국인근로자를 위한 고용허가제 안내", https://eps.hrdkorea.or.kr/e9/user/employment/employment.do?method=employGuidLabor
한국민족문화대박과사전, “외국인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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