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에게 품위와 존경을 선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그것은 다름 아닌 ‘돈’이다. 막강한 사회적 힘을 지닌 돈을 맹렬히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여러분에게 재능과 힘이 있으면, 어쨌든 명성을 얻고 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고, 우리의 시대도 그런 것이다.”
에밀 졸라는 그의 소설 『돈(L'Argent)』에서 주인공 사카르의 입을 통해 돈이 얼마나 소중한지 강조한다.(1) 130년 전의 상황이지만, 사카라의 독백은 ‘돈’에 열광하는 현재의 우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졸라는 앞서 1871년 출간된 자신의 『루공마카르 총서』 초안에서도 ‘돈에 대한 예의’를 피력했다.
“돈을 공격하지도 옹호하지도 말 것, 돈의 세기라고 불리는 우리의 시대와 명예의 세기라고 불리는 이전 시대를 대립시키지 말 것, 만인에게 돈이 품격 있는 삶을 선사함을 보여줄 것. 돈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돈은 곧 위생이고 청결이며, 건강이고 지성이기 때문이다.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를 대립시키지 말 것. 세상을 들어 올리는 지렛대는 오직 사랑과 돈뿐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 가상화폐에 올인하는 수많은 청년들의 모습을 접하며, “돈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돈은 곧 위생이고 청결이며, 건강이고 지성”이라고 강조한 졸라의 글을 새삼 떠올려본다. ‘건강과 지성의 상징’인 대학생과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들이 현실 속의 돈이 아닌, ‘유령의 증표’ 같은 가상화폐에 몰리는 기이한 현상을 필자 같은 ‘꼰대충’의 시선으로 이해하기란 버겁다. 졸라가 부활하면, 가상화폐 역시 건강이고 지성이라고 말할까? 드레퓌스 사건때 왜곡된 프랑스 여론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 『나는 고발한다』(1898)를 쓴 작가답게, 에밀 졸라는 사회적 정의의 수호자로서 어쩌면 가상화폐에 몰두하는 청년들을 옹호할지 모를 일이다.
따지고 보면 가상화폐야말로, 청년들이 가장 공정한 게임의 룰로 쟁취할 수 있는 부의 유형일 것이다. 연령, 성별, 학벌, 지역, 부모 찬스의 벽이 없이 누구나 쌈짓돈이건 목돈이건 돈만 있으면 경쟁의 장에 뛰어들 수 있으니, 얼마나 자유롭고 공정한 게임인가? 아파트만 해도 수억의 목돈 없이, 다시 말해 부모의 지원 없이 감히 구입할 상상이나 할 수 있는 품목인가? 영혼까지 팔아 돈을 끌어모은다는 속칭 ‘영끌’ 투자도 최소한의 여유를 갖춘 청년들 사이에 떠도는 애교 섞인 투자용어일 뿐, 대부분의 청년들은 이미 ‘영끌’을 위해 팔아야 할 영혼이 바닥난 상태다. 아파트 투자의 광풍이 몇 차례 휩쓸고 간 뒤 신용대출과 마이너스 대출, 담보대출을 통한 주식 ‘빚투’가 돈을 갈망하는 청년들에게 깊이 파고 들었지만, 어쩌면 주식만큼 난해하고 불공정한 투자가 있을까? 내부거래, 작전거래, 헛소문, 고급정보….
부동산이나 주식에 비해, 가상화폐를 사고파는 원칙은 단순명료하다. 회사의 현재가치, 미래가치, 매출 및 수익성, 각종 소문과 정보를 고려해야 하는 주식이나, 재개발 여부 또는 역세권, 학세권 등을 따지는 아파트처럼 복잡하지 않다. 필요한 건 딱 하나, ‘기다림’이다. 무작정 기다리면 된다. 아직 가상화폐는 현실세계에서 잘 쓰이지 않고 실체가 없으나,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오나니’ 하며 꿋꿋하게 기다린 자에게는 대박의 그날이 온다(라고 청년들은 믿고 있다). 기껏 수십만 원으로 수억 원 내지 수백억 원의 대박을 친 청년들의 경험담은 이 ‘기다림의 미학’을 한껏 끌어올린다.
얼마나 솔직하고, 또 얼마나 진솔한가? 여기에 어떤 반칙과 차별, 불공정이 들어갈 여지가 있겠는가. 적어도 그 어느 세대보다도 ‘공정’과 ‘능력’을 중시하는 청년들에게 가상화폐는 단순히 ‘가상의 돈’이 아니다. 비록 당장에 통용되지 않지만, 가상화폐는 현실세계에 만연한 부조리와 부당함, 불의를 단번에 떨쳐버리며, 불확실한 미래의 장막을 걷어내고 화사한 꽃길로 이끄는 ‘마법의 코인’인 셈이다. ‘MZ세대’라 불리는 청년들은 돈의 세기에 돈의 정치적·사회적 위력을 온몸으로 절감해왔다. 권력자들은 재임 중의 오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수년째 옥살이를 하지만, 재력가들은 아무리 흠결이 있어도 법망을 유유히 빠져나오거나, 구속되더라도 온갖 인간들이 석방탄원을 올리지 않던가?
정부 고위관료나 대학교수 같은 전문가들이 아무리 가상통화의 허위성과 도박성을 지적하더라도, 청년들의 귀에 들어오기까지는 역부족이다. 오히려 디지털 감수성에 둔감하고, 젊은 세대의 성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꼰대충’으로 간주될 뿐이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국회 정무위에서 가상화폐 관련 질의 중 “(청년들이) 잘 모르면 어른이 알려줘야 한다”라고 말했다가, 청와대 청원을 통해 사퇴까지 요구받았다.(2) 졸지에 SNS에서는 “코인을 하는 자=젊고 디지털 기술을 아는 자”, “코인을 반대하는 자=나이 들고 디지털 기술을 모르는 꼰대”라는 등식이 퍼졌고, 여당에서는 “미래 투자를 막지 말라. 신기술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야당에서는 “민주당은 청년을 가르치려 드는 기득권 정당”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은 위원장의 발언은 집값 폭등, 치솟는 청년 실업 등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진 청년들에게 “청년=철없는 자”로 오해될 소지가 다분하지만, 실제로는 철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금융을 배운 적도, 주식이 뭔지도 모르는 일부 사회 초년병들에게 투기의 위험을 경고하고 싶었으리라 생각한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가상화폐를 만드는 것은 신기술이 아니며, 숙련된 프로그래머는 몇 시간이면 되고, 심지어 프로그램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며칠만 교육받으면 만들 수 있다.
이병욱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는 저술과 언론활동을 통해 가상화폐의 위험을 경고한다.
“한국은 전문 시세조종꾼의 천국이다. 처벌 조항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신규상장하는 자가 몇 푼 내면 10~20배는 기본이고, 운 좋으면 몇백 배도 부풀려 준다. 전 세계 알트코인 개발자에게는 한국이 천국이다. 한국에 상장해서 한탕하고 튀면 끝이다. 아무런 법적 책임이 없다. 이름만 바꿔 또 상장하고 다시 한탕하기를 무한반복한다.”
가상화폐의 가격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들썩거린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의 한마디에 비트코인이 19% 반등한 것을 비롯, 여타의 가상화폐들이 급등세를 보이면서(2021년 5월 25일), 청년들의 얼굴에 모처럼 미소가 지어진다. 꼰대충 일각에서는 MZ세대의 ‘돈’ 사랑이 유별나다고 꼬집지만, 어쩌면 돈은 인류의 가장 뜨거운 사랑의 대상일지 모른다. “나는 고발한다”라는 발언을 통해 언론자유의 표상으로 알려진 졸라는, 사실 평생 가난과 채무에 시달렸다. 그가 돈을 버는 유일한 길은 엄청난 양의 글을 쓰는 것밖에 없었다. 돈은 그에게 있어 삶, 즉 생존 그 자체이며, 더 나아가 작품의 원천이었던 셈이다.(3) 하지만 졸라는 자신의 소설『 돈』에서, 돈을 벌기 위해 배경을 동원하는 방식을 경멸한다.
“사카르는 형 외젠 루공의 도움으로 도로 담당관으로 임명되자, 잘 드는 큰 식칼처럼 손을 들어 활짝 편 채 파리를 4등분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프랑스에서나 한국에서나,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돈을 벌려면 인맥이 좋아야 하고, 도시계획에 밝아야 하며, 대담해야 한다. 졸라는 작가의 권한으로 사카르를 파멸시켰지만, 현실 속 ‘사카르’들은 무사한 경우가 많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과감한 돈벌이를 찬사하던 졸라는, 현실 속에서는 얼마 되지 않는 원고료를 벌기 위해 밤낮없이 글을 쓰는 글쟁이였다. 그런 그가 다시 태어난다면, 가상화폐에 피 같은 원고료를 투자했을까? 보잘것없는 노동의 대가를 꼬박꼬박 저축해도 평생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한 암담한 현실에서, 어쩌면 마지막 출구일지 모를 가상화폐에 그 역시 투자하지 않을까? 그가 123년 만에 쓸 『나는 고발한다』 후속편은 청년들이 꿈을 잃고 가상의 세계에서 방황토록 하는 정부 관료와 기득권층에 대한 고발이 되지 않을까 싶다.
“청년들이여 부당함에 분노하라. 그나마 가상화폐가 공정하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1) 에밀 졸라, 『돈(L'Argent)』(1891/2017, 문학동네)
(2) News1, '비트코인 투자자 뿔났다. 은성수 사퇴 국민청원 20만명 육박‘, 2021년 5월21일자.
(3) 서영민, ‘에밀 졸라의 유대인의 문제에 관한 고찰’, 『한국프랑스학논집』107권0호, 2019년 8월, pp2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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