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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정치학
진실의 정치학
  • 성일권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2.05.3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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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라는 미미한 표차로 가까스로 정권을 잡은 비정상 집단이 정상을 희화화하고 정의와 공정을 독점하며 진실의 심판관을 자칭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문득 미셸 푸코(1926~1984)의 글들이 떠오른다. 

80여 년 전에 그가 고민하며 분석했던 현상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유감스럽게도 한꺼번에 쏟아지다니, 시공을 초월한 푸코의 통찰력을 새삼 실감한다. 하나마나한 청문회장에서 국무위원 후보들의 추악한 행적이 드러났음에도, 정권의 수장이나 당사자들이나 모두 반성과 사과 대신 ‘하늘을 우러러 한치의 부끄러움이 없다’는 식의 태도로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광기의 역사』, 『지식의 고고학』 등을 통해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푸코는 권력관계를 분석하며 '정상'과 '비정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됐는지 탐구했다. 이에 대한 푸코의 철학적 개념을 간단히 풀이하면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권력의 입맛에 달렸다. 권력의 입맛에 맞으면 ‘정상’,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인 것이다. 따라서, 권력을 지향하거나 권력의 달콤한 맛에 길들여진 지식인들이 부역자로 참여해 권력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는 얘기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주인이라고? 개인은 권력이 유통되는 데 필요한 매개체일 뿐이지 권력을 행사하는 주인이 아니다! 과거 교육부의 한 고위공무원이 국민을 ‘개돼지’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는 경질됐었지만, 역시 국민을 ‘개돼지’로 인식하는 법관들에 의해 복귀하지 않았던가?  

권력이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는 것은, 푸코의 말마따나 권력지향형 지식인의 부역 탓이다. 근대 이후 권력은 칼과 총이 지닌 무력이 아니라 교묘한 언술력(言術力)으로 표출되면서 지식의 결합을 필요로 한다. 이제 “지식 없는 권력의 행사는 불가능”하다. (푸코의 『권력의 유희』 중에서). 어떤 지식이 ‘진리’로 인정받았다면, 그 자체가 가진 정교함이나 객관적 확실성 때문이 아니라 그 지식의 외부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특정한 권력과의 관계 때문이다. 

‘부역’ 지식인들의 논리적 도움을 받은 권력은 정권의 비이성적 행태를 정상으로 끌어올리고, 불의와 불공정을 정의와 공정으로 둔갑시키며, 더욱이 스스로 지성주의자가 돼 불의와 불공정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저항을 ‘반지성주의’로 매도한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제 ‘유일 진리’가 최고의 미덕으로 설 자리가 없다!  

‘부역’ 지식인들의 해괴한 논리로, 그간의 유일 진리가 거짓 진리와 다툼을 벌이며, 국어사전에서 수많은 생활언어의 의미가 사라지거나 새롭게 정의돼야 할 상황이다. 예컨대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①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②바른 의의(意義), ③ 개인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였지만, 앞으로는 ①권력의 입맛에 맞는 도리 ② 바르지 않은 의의(意義) ③ 개인간의 올바르지 않은 도리, 또는 사회를 지배하고 유지하는 권력의 지침이 될 것이다.

과거 정권에 발길에 차일 만큼 많았던, 그 말 많은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얼치기 지식인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로 국어사전이 혼탁해지며 그 의미가 뒤바뀌는 현실 속에서, 꽹과리를 쳐서라도 ‘꽁꽁 숨은’ 지식인들을 찾아내고 싶은 심정이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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