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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종교의 엑스터시에 맞닿은 B급 감성의 액션 질주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종교의 엑스터시에 맞닿은 B급 감성의 액션 질주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22.08.12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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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영화리뷰) 넷플릭스 <카터>

넷플릭스 영화 <카터>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게임과 만화의 폭력성과 박진감을 극대화하며 영화로 사이키델릭하게 합체한 B급 대중예술. 그러므로 작품의 이러한 특성상 호오가 엇갈리는 건 불가피해 보인다.

묻지도 따지고도 않고 무조건 액션이다. 영화 시작과 함께 긴장을 고조하는 용도로 배치된 도입부를 빼고는 거의 시종일관 치고받는다. 숨돌릴 틈 없이 이어지는 액션이, 게임에서 단계별 미션을 완수했을 때마다 난도가 올라가듯 극의 전개에 따라 고도화한다. 영화에서 떠올릴 법한 싸움박질의 유형이 대체로 망라되었다. 사실 현대 액션 영화에서 인간의 몸으로 하는 싸움의 유형은 이미 거의 다 제시된 상태이다. 레고쌓기처럼 얼마나 특이하게, 시쳇말로 얼마나 유기적으로 결합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가 갈린다. 싸움질에 관한 한 <카터>는 완벽한 B급 감성 아래 한 편의 압도적인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카터와 잠자

주인공은 영화 제목과 동일한 카터이다. 주원이 분한 이 카터는 싸움기계로 설정된다. 애초에 CIA 요원이었다가 북한에 귀순하고 결혼해 딸까지 낳은 북한의 인민 영웅이다. 카터가 누구인지는 극의 전개상 상당히 이른 시점에 제시된다. 그러나 처음에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낯선 방에서 깨어난다.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 살벌한 분위기의 무장 요원들에 둘러싸여 잠에서 깨어났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 상황만으로 기절할 노릇인데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면? 영화적 상상이니까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이 상상이 예술에서 말하는 형상화의 기본이다. 정병길 감독의 영화 <카터>에서는 근육질 남자가 팬티만 입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잠에서 깨어난 반면,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는 자기 몸이 벌레로 변한 채로 그렇지만 자신에 관한 정체성 의식은 지닌 채로 잠에서 깨어난다.

<카터>에서는 당최 생각이란 게 없다. 언제든지 방아쇠를 당길 태세로 보이는 총구가 자신을 겨누고 있고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인데, 갑자기 귓속에서 누군가가 말을 건네며 살길을 알려준다. 방으로 카터에게 전화가 걸려와 CIA 소속으로 밝혀지는 현장 요원에게 건네주면 전화기가 귀 바로 아래에서 폭발한다. 이어 살상 범위가 확대된다. 그 방 안에서 곧 더 센 폭발이 일어날 것이기에 빨리 방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지시가 긴박하게 전해지고 카터는 영문도 모르고 본능에만 의지해 다음 공간으로 탈출한다.

존재론에 기대자면 <카터>에서 코키토의 존재론은 맥을 못 춘다. 행동함으로, 자신에 대한 아무런 생각 혹은 성찰 없이 바로 행동함으로써 존재라는 게 가능해진다. 이러한 구조는 저 너머의 목소리를 소환하고 그 목소리에 복종함으로 활로를 여는 종교의 전형적인 모습과 닮았다. 외양상 전혀 별개일 것 같은 종교와 <카터>는 이렇게 만난다. 자신을 버린 채 저 너머를 믿고 뚫고 나가는 맹목성. 그리고 그 맹목성을 통해서만 가능한 구원의 길.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에게는, 이 불가해한 상황에서 갈 길을 일러주는 목소리가 귓속은 물론 어디에도 없다. 잠자는 스스로 자신에게 말을 걸 뿐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나 활로가 없고 해답이 없다. 행동하고 싶어도 마땅히 행동할 게 없을뿐더러 행동의 방향을 모른다. 무엇보다 혐오스러운 자신의 몸에는 어떠한 행동도 불허되고 나아가 영웅적인 격투는 꿈도 꾸지 못한다. 계시 없는 근대인의 삶은, 전면적 소외 말고는 대면할 것이 없는 현대인의 실존으로 연결된다.

카터는, 선택받아 불멸의 존재가 된 할리우드의 전형적 캐릭터이다. 격투의 두 번째 스테이지인 목욕탕에서 낫을 들고 시작한 격투는 오토바이·자동차·스카이다이빙·기차·헬기 등의 무대로 이동하며 화려하게 액션의 꽃을 피운다. 양적으로 차고 넘치는 격투를 한 치의 착오 없이 완벽하게 시전하면서 카터는 몸에 약간의 스크래치가 난 것 말고는 멀쩡하다. 카터가 죽거나 치명상을 입지 않으리라는 것을 관객은 안다. 관객이 안다는 사실을 감독도 안다. 이심전심이 카터 같은 캐릭터를 활개 치게 하는 암묵적 동력이다.

주인공과 관객은 격투를 통한 말하자면 몰입 또는 황홀 속으로 빠져든다. 엑스터시는 그리스어 엑스터시스(ekstasis)에서 유래한 것으로, ek(의 밖으로)histanai(놓다, 서다)의 복합어이다. 황홀경, 망아(忘我) 등의 의미인 엑스터시에는 본래 밖에 서다는 뜻이 담겼다. 영혼이 육체를 떠난 무당의 몰아지경과 흡사하다. <카터>의 카터는 망아에 가까운 상태에서 격투를 전개한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엑스터시에 빠져 있다. 방향이 반대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지 않고 육체가 영혼을 떠난 듯하다. 영혼을 잠시 제쳐놓은 순수 육체의 힘만으로 난국을 타개한다. 주인공의 엑스터시는 관객에게로 얼마간 전이되지 않았을까.

카터와 매버릭

낙하산 없이 폭파된 비행기에서 맨 몸으로 추락하다가 상대의 낙하산을 탈취하고 아이까지 구해내며 지상에 안전하게 착지하는 장면은 어쩐지 눈에 익은 구도이다. 전문 스카이다이버가 카메라를 들고 직접 촬영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는 화면의 완성도와 별개로 이 구도에서 다른 많은 영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카터>의 이 장면엔 주원이 있지만, 다른 영화의 다른 장면에 다른 배우, 예컨대 탐 크루즈 같은 배우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액션의 구도만 비슷할 뿐 주원과 탐 크루즈는 상반된 캐릭터를 연기한다.

넷플릭스 같은 OTT 플랫폼을 통한 공개의 유혹을 뿌리치고 기나긴 코로나19를 견딘 다음 극장에서 개봉한 <탑건 매버릭><카터>가 주원의 1인극이듯, 크루즈의 1인극이다. 매버릭 탐 크루즈는 주원과 달리 육체에다 영혼을 붙들어 매었다. 정체성이 확고하다. 삼자를 함께 논하면 잠자와 비슷하고 카터와 다르다. 매버릭은 미국 해군의 비행사로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국뽕적인 인물이다. 사소한 인정에 휩쓸리지 않고 대의를 중시한다. 다음의 극중 대사는 매버릭의 정체성 혹은 캐릭터를 분명히 한다.

“Naval Aviator Is Not What I Am. It's Who I Am.”

내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내가 누구이냐가 더 본질적이라는 뜻이다. 잠자가 그렇다. 다만 잠자는 실존의 좌초에서 비극으로 잦아들고 매버릭은 예정된 성취에서 영광으로 고양된다. 카터는 반대로 내가 누구이냐보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로 자신을 결정짓는다. 카터에게 누구는 큰 의미가 없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단지 그는 누군가의 아버지일 따름이고 대의가 아니라 오직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따라서 카터에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파적 요소가 약하게 부여된다. 실사를 고집한 <탑건 매버릭>CG를 섞은 <카터>보다 더 신파가 강한 것이 이해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탑건 매버릭>의 제작방침 자체가 모종의 신파에 닿아 있지 않을까.

액션 대표 감독의 야심작

한반도의 남북분단과 미국이라는 외세의 삼각구도 안에서 익숙한 바이러스로 뇌관을 터뜨린 다음 만화와 게임을 뒤섞은 액션 게임에 좀비 요소를 가미하여 빠르게 영화를 끌어간다. 김옥빈을 킬러 숙희로 내세운 액션 <악녀>(2017)로 한국 액션 영화의 대표 감독으로 우뚝 선 정병길은 <카터>에서도 독창적인 액션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정 감독은 제작보고회에서 카터의 액션은 거친 수묵화라며 어릴 때 화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카터에 투영했다고 말했다. 카터의 몸을 수놓은 문신 말고 영화에서 수묵화의 느낌을 받은 관객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면 그럴 듯도 하다.

시점에서 1인칭에 가까운, 또 게임 플레이어의 시선 같은 앵글을 종종 보여주었지만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기법이 더 강한 액션을 묘사하는 데 주효했다는 생각이다. 장면 대부분을 대역 없이 직접 소화한 것으로 알려진 주원의 연기가 B급 감성과 잘 어울렸다.

열린 결말이다. 속편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런 의도와 무관하게 할리우드적인 주인공을 당연히 죽이지 않고 그렇다고 해피엔딩을 제시하지 않은 채 생사불명으로 퇴로를 끊어버리는 엔딩이 나쁘지 않았다.

 

안치용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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