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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돌아오지 않을 사람 기다리기를 그만 두지 않는 어떤 기다림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돌아오지 않을 사람 기다리기를 그만 두지 않는 어떤 기다림
  • 안치용
  • 승인 2022.10.10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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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영화리뷰) <천야일야>

기다림은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모종의 행위이다. 기다림에서 대상은 필수적이다. 더러 기다림의 대상이 불분명할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기다림은 대상을 전제한다. 분명하게 인지되든 아니든 대상이 전제되어 있지만, 전제를 없애도 기다림은 성립한다. 모든 기다림이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기다림은 대상에 주체가 속박되어 있기에 대상이 소멸하면 기다림이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주체는 속박이 풀어져도, 대상이 주체와 연결된 밧줄을 내려놓아도 혼자서 그 밧줄로 자신을 칭칭 동여맨다. 왜 그러는지는 모른다. 그것은 특정한 주체의 특질이거나 편한 말로 운명이다. 영어 단어 ‘wait for’에서 ‘for’가 사라지면 ‘await’가 되어야 하는데, 그냥 ‘wait’로 남는 상황이다.

흔히 고도를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거나, 더 단순하게는 기다림을 기다린다고 말해야 한다.

 

30년을 기다리는 이유를 알기 위해 기다린다

섬의 어촌에 사는 토미코(다나카 유코)는 실종된 남편을 기다리는 초로에 막 돌입하려는 여자이다. 남편과 이어줄 생물학적 핑계인 자식이 없고, 근처에 홀로 된 친정어머니를 돌본다. 또래 어부의 일편단심 구애는 어촌의 공인된 또 응원받는 연담이다. 딱히 싫다기보다 귀찮은 구애이다.

토미코의 남편은 결혼 초기인 30년 전 산책하러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산책하러 나갔는지 무엇을 하러 나갔는지가 지금에서야 흐릿해졌다. 토미코는 호적을 정리하지 않은 채 실종된 남편의 아내의 신분으로 살아간다. 토미코 밖에 모르는 어부의 집요한 청혼을 뿌리치는 이유를 남편에 대한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으로 설명하기엔 만족스럽지가 않다.

구보타 나오 감독은 토미코의 기다림을 해명하기 위해 또 다른 여자를 등장시킨다. 2년 전 마찬가지로 남편이 실종된 나미(오노 마치코)이다. 나미의 남편 역시 애매한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혹은 못하는 남편에게 그럴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려 하고 그 과정에 토미코를 소개받는다. 특이한 상실의 경험을 공유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만남은 각자의 실종 사건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영화 속에서 나미는 토미코의 평행우주인 셈이다. 평행우주에서 동일 인물을 발견할 수 있지만 변형을 목격할 수 있듯, 나미는 토미코와 다른 삶의 경로를 선택한다. 나미에게 새로운 남자가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나미도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나미는 토미코와 달리 다른 남자의 구애를 받아들이고, 토미코의 개입 때문이긴 하지만 나중에 우연찮게도 남편마저 돌아온다. 두 가지 사건이 모두 일어나는 바람에 나미의 삶은 통속적인 것이 되고 동시에 살만한 것이 된다. 숨구멍을 뚫고자 하는 정도의 통속성이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반면 숨막힘을 토미코처럼 그저 견디는 사람도 있다.

토미코와 나미의 삶이 달라진 것은 30년과 2년이란 기다린 시간의 차이에서 비롯했을까. 반대로 토미코와 나미가 다른 사람이기에 기다림의 기간이 달라졌고, 한 사람은 끝내 기다림을 중단하지 못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기다림을 지속하지 못한 것일까.

나미가 자신의 선택을 부끄러워하며 토미코에게 자신이 토미코만큼 강하지 못하다고 말하자, 토미코는 자신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당연히 강하고 약함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는 주체가 문제집을 집어서 찾는 게 아니라 그저 주체 몰래 문제가 던져지는 방식으로 출제된다는 게 맞는 설명일 것 같다. 토미코가 극중에서 보여주는 가치관처럼.

 

토미코는 여전히 남편 실종의 이유를 궁금해한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죽었으면 어쩌다 죽었는지, 살았으면 제 발로 떠났는지 납치 같은 부득이한 사유에 의했는지, 제 발로 떠났으면 여자가 생겨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의문이 꼬리를 물며 30년을 반복한다. 여기서 납치는 동해에 면한 니가타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일로 북한에 의한 일본 민간인 납치 사건을 염두에 두었다.

남편과 자신의 목소리가 녹음된 30년 전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토미코는 묻고 또 묻는다. 그러는 사이에 스스로는 사건을 정리한 듯하다. 나미에게 토미코가 (자신의 남편이) 옛날에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느덧 돌아올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하는 대목이 그렇다. 지금 토미코는 그저 기다림을 기다릴 뿐이다. 기다림의 기다림을 그만둘 이유를 토미코는 기다린다.

 

평행우주의 반전

하나씩 토미코를 떠난다. 친정어머니가 죽고, 남편의 어머니가 죽는다. 시어머니 장례를 치른 니가타에서 토미코는 실종된 나미의 남편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에게 자신의 남편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나미를 대신하는 양 묻는다.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남자와 새로운 인생을 계획중인 나미의 집에 니가타에서 만난 나미의 남편을 데려간다.

토미코에겐 평행우주 식 남편의 귀향인 셈이다. 나미의 집에서 쫓겨난 나미의 남편이 비를 쫄딱 맞으며 토미코의 집을 찾으며 토미코에게 토미코 남편은 사실상 귀향한 셈이 된다. 떠난자와 남아서 기다린자 사이에 밤늦도록 눈물의 상봉과 살풀이 비슷한 해원이 이뤄진다. 나란한 평행우주가 중첩돼 특별한 효과를 일으킨 장면이다. 물론 돌아온 떠난자는 처음 떠날 때처럼 아침에 다시 떠나간다. 그때 토미코가 전과 달리 충분하게 아침잠을 자는 장면은 그에게 마침내 평화가 도래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나는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을 떠올렸는데, 두 작품 사이의 일치율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평행우주를 계속 늘려가다 보면 도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토미코는 남편귀향으로 어쨌든 기다림의 기다림을 중단할 이유를 마침내 찾아낸다. 첫 장면과 귀향장면은 말 그대로는 아니지만 아무튼 수미상관으로 실현된다. 결말은 상투적인지 모르지만 통속적이진 않다. 아름다운 바닷가를 슬픔의 느낌으로 잘 담아냈고, 조도를 감각적으로 활용해 몰입도를 높였다. 카메라워크는 까발리지 않고 암시와 여운을 깊게 가져가면서 캐릭터의 감정선에 따라 적절하게 또 기민하게 변화를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다나카 유코의 성숙하고 절제된 연기가 인상적이다. 화면의 유장함이 스토리와 잘 버무려졌다.

 

극중 토미코 또한 아버지를 떠나왔다. 참전 후 난폭하게 변한 아버지로부터 남편에게로 떠나왔지만 이번엔 남편이 자의든 타의든 떠나갔다. 그리고 토미코는 기다렸다. 기다림을 기다리는, 특별한 것 없는 삶을 선택했다. 삶이란 어쩌면 기다림과 떠남의 이진법으로 구성되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기다림과 떠남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지가 우리의 의지에 속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글 안치용 영화평론가, 사진 B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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