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end’는 ‘한없는’이란 뜻의 영어 숙어로 대충 매우 정도의 부사로 쓰인다고 받아들이면 된다. 영화 <노 엔드>에서 ‘노 엔드’라는 제목에 대해선 직관적 이해가 필요해 보이는데, ‘끝이 없는’ 무엇처럼 형용사나, 무엇까지 포함한 명사처럼 해석하는 게 더 타당하지 않나 싶다.
영화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막다른 골목’ 같은 느낌이다. 그냥 ‘엔드’? ‘노’가 붙어 있어서 막다른 골목에 몰리는 비극이 한 번에 끝나지 않고 끝없이 계속된다는 부정적 전망을 강화한다. 반면 비극이 분명함에도 긍정적 전망을 유추하는, 말 그대로 전망을 위한 전망의 방법이 없지는 않지 싶다.
행복을 위한 작은 꼼수가 불러온 재앙
27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이란 영화 <노 엔드>에는 뚜렷한 서사가 존재한다. 전형적인 수미상관(首尾相關)이면서, 미(尾)는 수(首)의 비참을 제고하여 의미화를 혹독하게 견인한다. 처음과 끝은 중첩되고 확장된다. 나데르 사에이바르 감독이 ‘중첩’이라는 예측가능한 방법을 쓴 이유는 거대하고 적대적인 세계 앞에서 하잘것없는 인간의 반복되고 처참한 운명을 명료하게 보여주려는 고육지책이다.
<노 엔드> 주인공은 이러한 구도하의 일반적 주인공 캐릭터와 사뭇 다르다. 나아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고결과 숭고가 배어 나오지 않음은 당연하겠다. 한없이 평범한, 어쩌면 비루하기까지 한 독재 치하 어느 소시민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근대 유럽의 시민극과는 결이 다른 현대 이란의 시민극이라 해야 할까.
주인공 아야즈는 이란에서 건축허가를 담당하는 공무원으로 아내와 함께 장모를 돌보며 사는 평범한 시민이다. 말단 공직에서 20년 넘게 열심히, 그리고 큰 과오 없이 일해서 마침내 처가살이를 끝내고 자기 집을 장만하려는 참이다. 착공이 지연되는 모습은 이란 사회의 비효율을 보여주는 주변 풍경이다. 어쨌든 대지가 확보되어 있으니 언젠가는 그곳에 번듯한 아파트가 올라갈 것이고 분양권 비슷한 것을 확보한 아야즈는 자신의 힘으로 마련한 집에 언젠가는 입주하게 될 것이다.
갑자기 문제가 생긴다. 아내가 어릴 때 독일로 도망친 반체제 인사인 손위처남이 30년 만에 귀국한다는 소식이다. 아야즈는 반체제 인사의 귀향이라는 기념할 만한 사건 앞에서 소시민답게 자신의 이익을 먼저 떠올린다. 현재 거주지가 처남이 독일에서 보내준 돈으로 구입한 집이어서, 처남이 귀국하면 그 집을 내어주고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휩싸인다. 입주할 아파트가 아직 첫 삽을 뜨지 않은 상태여서 아야즈는 처남의 귀국이 당장이 아니고 내심 2~3년 늦춰지거나 아예 성사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궁리 끝에 꼼수를 생각해 낸다. 비밀경찰 같은 정보기관이 집을 수색하고 돌아간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인 양 가족에게 거짓말을 한다. 꼼수가 통해 예상대로 신분에 위협을 느낀 처남의 귀국이 미뤄진다.
한숨을 돌린 것도 잠시, 아야즈에게 더 큰 문제가 찾아온다. 어느 기관이 그런 일을 했는지 파악하려고 장모가 전화를 돌린 바람에 실제로 비밀경찰이 알게 돼 아야즈를 찾아온다. 전말을 파악함으로써 아야즈의 약점을 잡은 비밀경찰은 그에게 정보원으로 일하게 강제한다.
당혹과 공포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밀고자로 변한 아야즈. 아야즈의 협조로 처남의 동료 두 사람이 연이어 잡혀가고 경찰은 그에게 나아가 처남까지 귀국하게 하라고 협박한다. 사소한 잘못이 더 큰 잘못으로 이어지며 과오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야즈는 더는 감당할 수 없는 국면에 도달한다.
귀국 결정을 미루고 있는 처남을 안심시켜 고국에 돌아오게 하여 그를 경찰에 넘겨주든지, 아니면 아야즈가 스스로 최종 책임을 지든지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처한다.
악하지 않은 사람이 행한 악행
서사를 끌어가는 화면은 고립, 압박, 공포, 왜소화 등 아야즈의 상황에 조응해 적절하게 변화한다. 독재의 하수인이 폭력을 사용하는 모습이 적나라하지 않고, 대신 물리적 폭력이 자제되고 우스꽝스럽게 그려짐으로써 더 생생해진다.
속성 자체가 악(惡)인 권력에 복무하는 평범한 사람이 얼마나 심드렁하게 악마가 될 수 있는지, 선인은 아니어도 적어도 악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얼마나 간단하게 악을 행할 수 있는지 영화는 해명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권력화한 악의 구조이다. 악인과 악은 전혀 다른 소재이다.
악마가 된 평범한 사람은 또 다른 평범한 시민을 악행으로 몰아간다. 그러한 사악한 행위가 극중에 흔한 일상처럼 펼쳐진다. (구조에 의해) 악마가 된 평범한 사람과 악행으로 몰린 또 다른 평범한 시민 사이의 차이는 전자가 자신이 악을 행한다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하고 오히려 선의 편에 서 있다고 믿고 행하는 반면 후자는 이기심에서 비롯하였든 또 다른 동기에서든 종국에 자신 행위에 깃든 악을 자각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악인은 인간으론 어쨌든 평범하지만 악은 언제나 비범하다.
아야즈의 아버지는 서사의 후경이다. 월세가 밀려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자 그는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런 아버지의 아들인 아야즈가 집에 강박적인 집착증을 보인 것은 납득할 만하다. 집을 장만하기가 힘들어 집 있는 여자하고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그 집이 그 여자 즉 아내의 오빠 집이었지만, 다행히 집주인이 반체제 인사여서 외국에 있는 바람에 자기 집인 양 장모를 모시며 편하게 살 때까지 아야즈는 아버지의 비참을 넘어선 듯했다.
그는 사소한 시험에 들어 실족한다. 여기서 핵심 풍경은 사소한 실족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엄혹한 현실이다. 결정적인 실수가 아니라면 여러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반대로 한 번의 사소한 실족에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건강하지 않은 사회다.
다시 일어서는 길이 없지는 않다. 추락한 김에 타락하면, 의미가 달라질지 모르지만 재기할 수 있다. 처남을 경찰에 팔아넘기기 직전까지 갔던 아야즈는 마지막에 처남 대신 자신을 희생하는 올바른 선택을 내린다. 비극적 결말임은 분명하다. 동시에 아야즈가 끝내 독재권력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목숨을 내어주며 저항했다는 측면에서 희망의 일단을 보여준다고도 말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의 사소한 실족과 추락, 타락 대신 재기불능을 수용한 비범이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귀국하면 현재 아야즈 부부와 장모가 사는 집을 팔아서 나란한 두 채로 만들어 같이 사는 것이 처남의 복안이었다. 불필요한 걱정임이 밝혀지긴 했지만 너무 많은 것을 그르친 뒤였다. 아야즈가 느낀 회한과 허망이 관객에게도 와닿았을 터이다. 그러나 감독이 하려는 이야기가 개인보다는 사회라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장면은 수미상관의 맥락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연결하여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반전이 없다고 특별히 아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끝날 자리였다.
나데르 사에이바르 감독은 1974년 이란 타브리즈 출생으로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다. 테헤란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이란의 여러 대학교와 기관에서 영화 분야 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자파르 파니히와 함께 각본을 쓴 <3개의 얼굴들>(2018년)로 칸영화제 최우수각본상을 수상했다. 첫 장편 연출작 <에일리언>(2020년)은 베를린영화제에서 상영됐다. <노 엔드>는 그의 두 번째 장편 영화이다.
글·안치용
사진·B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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