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간략한 블랙엑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변천사
1863년 1월 1일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했고 1909년에는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선언문과 기관 설립이 흑인의 인권 증진을 즉각적으로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흑인들은 정치, 스포츠, 문화 등의 분야에서 장벽철폐를 위해 노력했지만 그 성과는 미미했다. 영화도 예외일 수 없었다. 오늘날에는 인어공주 역할이나 블록버스터의 주인공도 흑인인 경우가 존재하지만 도널드 보글(Donald Bogle)*이 자신의 명저에서 예증하듯 흑인은 스크린에서 오랫동안 몇 가지 스테레오 타입을 연기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마음은 언제나 태양 To Sir, with Love>(1967)으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시드니 포이티어(Sidney Poitier)가 1964년에 <들백합 Lilies Of The Field>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처음으로 수상하면서 잠시 ‘세상을 바꾼’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로부터 50년 그리고 아카데미 출범 후 85년이 지난, 2014년에야 비로소, 루피타 뇽오(Lupita Nyong'o)가 <노예 12 12 Years a Slave>에서 선보인 인상적인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뇽오의 수상은 밀레니엄 이후 불어 닥친 ‘정치적 올바름(PC)’과 아카데미의 변화된 ‘보이지 않는 원칙’이 작용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흑인영화인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서 무엇을 했을까? 대답을 위해서는 주니우스 그리핀(Junius Griffin)이란 이름이 영화사에 등재되는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이름과 함께 흑인들의 영화적 게토가 형성되었던 ‘블랙엑스플로이테이션’ 영화가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exploit’이라는 단어가 ‘부당하게 이용하다.’ ‘착취하다.’라는 뜻이므로, 명사형 exploitation은 ‘착취’, ‘부당한 이용’ 등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파생한 exploitation film을 ‘착취 영화’, ‘무엇인가를 부당하게 이용하는 영화’라고 직역할 경우에 어감이 이상해질 뿐만 아니라 그 뜻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발음 그대로 엑스플로이테이션 영화라고 부른다. 이 장르의 역사는 꽤 길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1970년대라고 할 수 있다. 1950-60년대를 휩쓸던 드라이브인 영화관이 쇠퇴하면서 극장주들은 손님을 유치할 계획에 골몰했다. 수익에 민감한 제작자들의 행태가 언제나 그렇듯, 조건은 저예산이어야 하며, 자극적이어야 했다. 그래서 섹스, 자동차 경주, 나치 포로수용소, 강간당한 여성의 복수 이야기 등의 소재를 지나칠 만큼 이용하는(exploit, 단어 뜻 그대로) 영화들이 이 시기에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착취’ 영화가 처음 개화한 장르가 바로, 흑인들의 이야기를 과도하게 적용한 영화, 즉, blaxploitation(black+exploitation)이었다. 멜빈 반 피블스(Melvin Van Peebles)가 연출한, 번역하기도 곤혹스러운 <Sweet Sweetback‘s Baadasssss Song>(1971)를 보면서 ‘블랙엑스플로이테이션’ 장르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전한 사람이 바로 주니우스 그리핀이었다. 그리핀 자신도 <디트로이트 9000 Detroit 9000>(1973)이라는 블랙엑스플로이테이션 영화를 제작했지만, 이 장르는 곧 다양한 서브 장르, 이를테면, 서부극, 드라큘라, 코미디 등으로 분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작품에 어느 정도는 흑인의 인권에 대한 자각이 들어 있었다. 따라서 나쁜 백인 경찰, 편견으로 인해 교도소에 가거나 부당하게 취급받는 흑인들의 이야기가 이 장르의 주요 테마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흑인 영화인들의 ‘작은 반항’은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죠스 Jaws>(1975)로 몰고 온 블록버스터 열풍과 맞물려 이내 사그라졌다.
십 여 년 넘게 숨죽이던 흑인 게토 영화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뉴욕대 대학원 영화과 출신의 ‘혜택 받은’ 감독, 스파이크 리(Spike Lee)를 통해 다시 개화했다. 위에 언급한 이 장르의 시조격인 멜빈 반 피블스의 아들, 마리오 반 피블스(Mario Van Peebles)는 TV 드라마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감각적인 1990년대식 블랙엑스플로이테이션 영화, <뉴잭 시티 New Jack City>(1991)로 주목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존 싱글턴(John Singleton)은 무대를 LA로 옮겨 스파이크 리보다는 조금 부드러운 화법을 동원해 <보이스 앤 후드 Boyz n the Hood>(1991)를 선보이면서 블랙엑스플로이테이션의 재림을 선포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스파이크 리는 쇠퇴했고, 피블스와 싱글턴은 배우에 더 역점을 두면서 트로이카는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잠시 주춤하던 게토 영화는 밀레니엄에 들어서자, 구세대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은 조던 필(Jordan Peele)과 베리 젠킨스(Barry Jenkins)가 눈부신 성과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조던 필이 서스펜스를 이용한 공포물에 집중한다면, 젠킨스는 좀 더 예술지향적인 화법으로 시네필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새로운 블랙엑스플로이테이션 세계를 선보인 젠킨스의 디제시스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본격적으로 탐색해 보자.
ⅱ. 오마주와 자의식 과잉 사이에서의 시작
2008년에 릴리즈 된 젠킨스의 데뷔작, <멜랑콜리의 묘약 Medicine for Melancholy>은 관람하기 전에 제목이 주는 선입견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환상문학의 대가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의 동명 소설은 달빛이 자신을 치료해 주길 바라는 원인모를 불치병에 걸린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젠킨스의 작품은 무대가 18세기 런던이 아니며 불치병에 걸린 소녀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13,000불의 제작비, 2명의 등장인물, 흑백 포맷, 4군데 실내 로케이션 그리고 나머지 푸티지는 샌프란시스코와 그 옆 동네 오클랜드의 길가에서 대부분의 촬영이 이뤄진 극단적으로 미니멀한 작품이다. 파티가 끝난 새벽. 모두다 술에 취해 자고 있지만 두 남녀만 일찍 일어나 집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남자가 커피 한잔 하자고 제안한다. 이윽고 영화는 두 사람의 하루를 잔잔한 톤으로 그린다. 호감을 가진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남자를 밀어내려 한다. 택시 안에 두고 간 여자의 지갑을 돌려주기 위해 남자는 인터넷을 뒤져 여자의 정보를 캔다.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던 거주지와 이름은 모두 가짜. 지갑에 들어있던 운전면허증으로 이름과 주소를 알아낸 남자는 지금은 유명무실해졌지만 당시 우리의 싸이월드와 비슷한 기능을 갖고 있던 마이 스페이스(my space)를 통해 여자의 일상을 염탐하면서 호기심을 키운다. 마침내 남자는 결심한 듯 자전거를 타고 그녀에게 향한다.
이 시시한 이야기, 하지만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흔해 빠진 이야기의 결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결코 긴 디제시스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간해서는 하루를 넘기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우연히 만난 남녀는 차를 같이 탈 것이고, 대화를 시작할 것이며,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하루를 보낼 것이다. 그들은 이내 서로의 공통점을 찾을 것이고, 사랑, 성적욕구, 죽음, 세계에 대한 비전, 인간관계에 대한 가벼운 혹은 심오한 대화를 나눌 것이다. 마치 10년간 지속해야 가능할 것 같은 엄청난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 쉼 없이 오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시나브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우정과 애정 사이에서 잠시 번민하다가 아름다운 이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리차드 링클레이터(Richard Linklater)가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1995)를 통해 펼쳐 보인 클래식을 젠킨스는 어떻게 풀어나갈까? 우리는 그 동안 링클레이터 작품을 오마주한 수많은 영화를 경험했다. 그러므로 포맷을 빌려오는 행위는 이미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문제는 ‘반복’보다는 언제나 그렇듯이 ‘차이’일 것이다.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젠킨스가 선택한 방법은 생각보다 대담하다. 바로 ‘대화’를 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독자는 갑자기 궁금해질 것이다. 처음 만난 두 남녀 사이에 화학 작용을 일으키려면 대화 이외에 도대체 무엇이 필요할까? 아! 물론 방화(邦畫) <애인>(2005)처럼 미술관, 북 하우스 등 예술 공간이 산재한 파주, 헤이리를 배경으로 관객 안에 자리 잡은 낭만성을 극대화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런 종류의 영화는 장소성으로 인물의 감정을 고양시킨 후, 남녀 주인공의 은밀한 ‘몸의 대화’를 이끌어낸다. 대화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몸의 대화. 이 전략은 제대로 구사되지 않으면 오욕과 불명예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그저 그런 ‘원 나잇’ 영화는 대화와 몸의 대화를 바꿔치기한 전략이 통하지 않을 때, 매번 도착하는 상투적인 지점이다. 하지만 젠킨스는 몸의 대화를 최소 분량만 남겨두고 그 자리를 ‘미장센’으로 승부한다. 젠킨스의 카메라는 남자의 낙서, 벽에 걸린 그림, 티셔츠에 새겨진 타이포그래피, 전시장 혹은 박물관 한쪽 벽을 장식하는 ‘글귀’들을 프레이밍한다. 그런데 이 ‘미장센’들이 전하려는 의도는 참으로 애매하다. 그렇다면 젠킨스가 만든 ‘차이’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 작은 미술관에서 남자가 괴테의 명언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는 장면을 참고삼아 실타래를 풀어보자.
Whatever you can do or dream you can, begin it; Boldness has genius, power, and magic in it.
- 당신이 할 수 있는 것, 당신이 꿈꾸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시작하라. 그러한 대담함에 천재성, 힘, 마법이 깃든다. 그러니 지금 당장 시작하도록 하자.
아직까지 남자는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기 전이다. 이 인용문을 프레이밍한 의도는 관객의 바람, 즉 두 사람의 로맨스에 대한 염원을 괴테 인용문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남자에게 즉각적이면서 용감한 구애를 하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썸’을 타던 남녀는 점점 가까워진다. “우리가 보지 못한 편집된 쇼트에 남자가 적극적으로 구애를 한 것인가?”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둘 사이엔 어느새 벽이 많이 사라져 있다. 젠킨스의 등장인물들은 마치 샌프란시스코의 명소들을 관객에게 소개시켜주려는 듯, 시내 곳곳을 헤집고 다닌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 MoMA), 예르바 부에나 공원(Yerba Buena Park)을 지나더니, 어느 새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관(Martin Luther King Memorial)에 도착한다. 건물 벽에는 다음과 같은 킹 목사의 말이 새겨져 있다.
I believe the day will come when all God’s children from bass black to treble white will be significant on the constitution’s keyboard.
- 피아노의 모든 건반이 의미를 지니듯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헌법의 건반 위에 동등한 의미를 가질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퀀스를 보면서 젠킨스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함정일지 모른다. ‘I Have a Dream’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킹 목사 연설의 한 구절을 화면에 담는다는 것은 젠킨스를 스파이크 리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흑인의 정체성을 소리 높여 주장하는 감독으로 젠킨스를 규정하는 것 역시 무리는 아니다. 한번 시작된 우리의 '낙인찍기'는 이후 흑인의 삶에 대한 남자의 횡설수설로 가중된다. 링클레이터를 소환한 것도 모자라 고다르(Jean-Luc Godard)의 <네 멋대로 해라 À bout de souffle>(1960)의 몇 장면을 거의 의도적으로 오마주한 영화학교 출신, 풋내기는 갑자기 길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백인 인구비율이 흑인 인구의 그것보다 10배 이상 높은 이 도시를 살면서 느낀 감정을 남자가 토로하지만 그 다음 쇼트는 느닷없이 카페에 모여 거주(housing) 문제를 토론하는 사람들을 한참 동안 비춘다. 디제시스에서 급하게 이탈하는 탈맥락적인 이야기는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심지어 크레딧에서는 “샌프란시스코의 저렴한 주택을 위한 투쟁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원하시면, www.hrcsf.com의 주택 권리 위원회를 방문하세요.”라는 자막까지 삽입한다. 이쯤 되면 주인공들이 언뜻언뜻 내비치는 멜랑콜리한 표정은 외로움, 상실감,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에서 기원한 것이 아닌, 사회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의 직업이 티셔츠를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입고 있는 티셔츠의 레터링, ‘LODEN’에 대해서 아느냐고 묻는다. 이케아에서 파는 쇼파 브랜드 아니냐는 남자의 농담에 여자는 진지하게, 영화제작자 이름이라고 답한다. 이 대목은 바바라 로든(Barbara Loden), 배우이자 엘리아 카잔(Elia Kazan)의 두 번째 부인으로 알려진 이 사람이 실은 <완다 Wanda>(1970)라는 전설적인 페미니즘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주입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다.
영화과 출신의 풋내기 시네필 감독의 과잉된 자의식의 표출이라고 치부하기엔 젠킨스의 복화술이 너무 강렬하게 다가온다. 젠킨스는 데뷔작 곳곳에 이런 방식으로 ‘생각’을 아로새긴다. 선배, 스파이크 리는 인종 차별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듯 <말콤 엑스 Malcolm X>(1992)를 만들었지만, 젠킨스는 리와 달리 본격적인 대결보다는 여기저기에서 차용한 포맷과 미장센으로 멜로드라마를 전경에 배치하고 후경에는 정치·사회적 이슈를 포진시키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차이화 한다. 웬만한 영화의 랩파티 비용도 되지 않는 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 영화사에 처음 등장한, 학교에서 영화를 배운 1970년대 무비 브렛(movie brats) 세대의 과잉된 자의식이 그대로 재현된 영화, <멜랑콜리의 묘약>은 새로운 흑인 게토 영화에 목말랐던 사람들에게는 환호를, 신중한 시네필들은 ‘판단중지’를 선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젠킨스는 8년의 공백을 깨고 <문라이트 Moonlight>로 귀환했다.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던 데미안 셔젤(Damien Chazelle)의 <라라랜드 LALA Land>(2916)는 젠킨스의 복귀작에 밀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에 실패했다. 도대체 <문라이트>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ⅲ. 데뷔작의 전략을 한 번 더, 하지만 좀 더 우아하게
400만 불(순제작비+마케팅 비용)을 들여서 6천만 불 이상을 벌어들인 젠킨스의 출세작, <문라이트>는 마약상으로 성장한 외톨이 흑인 소년의 성장 서사를 3개의 표제(1. 리틀, 2. 샤이론, 3. 블랙)로 나눠 구성한다. 데뷔작으로부터 근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젠킨스의 방식에는 특별히 변화가 없다. 여전히 그는 선배들이 고안했던 장치를 인용하면서 흑인 이야기를 전경에 배치하는 전략을 고수한다. 링클레이터가 <보이후드 Boyhood>(2014)에서 같은 배우를 출연시켜 한 소년의 12년 동안의 삶을 보여준 것처럼, 젠킨스는 3명의 서로 다른 배우를 통해 흑인 소년의 성장기를 다룬다. 데뷔작이 동명의 소설을 연상시킴으로써 발생시킨 혼란을 경험한 관객은 또 다시 미심쩍어진다. 왜냐하면 “또 다시 링클레이터?”라는 의문과 함께 <문라이트>에 따라다니는 아카데미의 후광이 오히려 정직한 관람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전에 인지했더라도 이 정보를 머리에서 지울 필요가 있다.
영화의 순 제작비가 150만 불에 불과했기 때문에 젠킨스는 처음부터 복잡하거나 화려한 드라마투르기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는 ‘그저 담담히’ 자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영화로 옮긴다. 전사(前事)가 삭제되어 있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에게 ‘리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샤이론은 홀어머니 밑에서 살고 있다. 연약해 보이는 겉모습 때문에 그는 또래 아이들에게 따돌림과 괴롭힘을 자주 당한다. 한 무리의 흑인 소년들이 샤이론을 좇고 무리를 피하던 그는 동네를 주름잡는 마약상 후안이 마약 보관 창고로 사용하는 빈집으로 도망친다. 우연히 이곳에서 샤이론과 마주친 후안은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친절하게 대한다. 하지만 상처 가득한 샤이론은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후안의 인내와 배려로 인해 멘티·멘토의 관계로 발전한다.
이 영화의 원작은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라는 희곡이다. “달빛 아래 흑인 소년은 파란색으로 보인다.”라는 제목은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아포리아(aporia)이다. 이 제목은 또한 극 중 후안이 샤이론에게 수영을 가르쳐주면서 건네는 대사이기도 하다. “For the Black, By the Black, Of the Black”을 외친 스파이크 리는 30년 전에 투철한 전사처럼 굴었다. 2012년 2월, 10대 흑인 소년을 쏘아 사망에 이르게 한 백인 경찰관이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이듬해부터 소셜 미디어에 등장한 “Black Lives Matter”라는 문구는 리가 외친 구호의 후렴구처럼 보였다. 그러나 젠킨스는 전투적인 두 선언문보다 훨씬 은유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젠킨스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원작 희곡의 제목이자 후안의 대사를 다음과 같이 바꿀 필요가 있다.
“In Moonlight Everything Looks Blue - 달빛 아래 모든 것은 파란색으로 보인다.”
전작에서 멜로드라마의 외피에 흑인들의 삶과 사회문제를 끼워 넣었던 젠킨스는 <문라이트>에서는 대담하게도 평등을 이야기한다. <문라이트>에는 인종 차별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이 제시되지 않으며 대사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를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문라이트>에 인종 차별 문제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이 영화는 흑인 게토에서만 촬영했고 아주 잠시 등장하는 엑스트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흑인이기 때문”이라고 섣불리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노르웨이이 숲』의 주인공 와타나베와 미도리를 톰과 제니퍼로 바꾼다 해도 막상 별다른 이질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샤이론을 백인 소년으로 바꾼다 해도 내러티브를 진행시키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문라이트>는 단지 1970-80년대 마이애미의 흑인 게토를 ‘배경’으로 제작되었을 뿐이다. 이 새로운 스타일의 블랙엑스플로이테이션 영화는 ‘흑인 소년’이 아닌 ‘소년’의 삶을 관조한다.
<문라이트>가 소재로 삼은 마약, 동성애, 결손가정, 범죄, 따돌림 문제는 어느 세계에나 존재한다. 게다가 이 영화에는 기존 블랙엑스플로이테이션 영화에 등장하는 선언이나 구호가 삭제되어 있기 때문에 인종에 상관없이 향유할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보수적인 아카데미도 이점을 고려하여 젠킨스 작품에 손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물론 젠킨스는 파란색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군데군데 신경을 썼다. 하지만 파란색의 의미를 이미 선취한 대다수의 관객에게 이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리는 것은 “어떻게 동성애자가 되는가?”, “인간에게 엄마의 존재란 무엇인가?”, “우정은 어떻게 형성되는가?”와 같은 일상 속에서 누구나 제기할법한 질문들이다. 그러므로 젠킨스 영화가 이룬 성취는 흑인 게토를 배경으로 이제는 사라진 블랙엑스플로이테이션을 새롭게 복원한 것에 기인한 것이 아니며, 정치적 올바름을 과도하게 적용한 아카데미 위원회의 변화된 시선 때문도 아닌, 첨예한 위 질문들에 대해 누구나 탄복할 수 있는 설득적인 답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흑인이면 모두 스냅백 스타일로 모자를 쓰고, 흑인 영어라 불리는 에보닉스(Ebonics)를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흑인 감독들이 연출한 영화는 당연히, 멀게는 흑인 영가에서 기원한 블루스, 가깝게는 힙합 음악이 사운드 트랙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순간에 젠킨스의 영화적 아버지들, 이를테면 위에서 언급했던 링클에이터, 고다르 그리고 새롭게 언급될 왕가위(王家衛)를 기억해야 한다. 젠킨스는 왕가위처럼 슬로모션을 멋스럽게 사용하며, <해피 투게더 春光乍洩>(1997)나 <화양연화 花樣年華>(2000)에 등장하는 유명한 투 쇼트(Two Shot)들을 대놓고 모방하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그는 왕가위처럼 사운드트랙을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이야기에 감정을 덧입힌다. 젠킨스 스스로도 왕가위에게 영향 받았음을 공표한 적도 있다. 물론 젠킨스는 다른 흑인 감독들처럼 힙합 혹은 지나간 세대의 흑인 뮤지션들이 노래하는 곡들을 영화에 삽입한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클래식과 팝을 적절하게 믹스하기도 한다. 그에겐 기존의 흑인 감독들이 고수하던 선명한 ‘정체성’이 부재한다.
젠킨스는 2019년 선댄스에서 호평 받고 골든글러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안녕 The Farewell>을 연출한 중국계 감독, 루루 왕(Lulu Wang)과 연인관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젠킨스를 블랙엑스플로이테이션이라는 협소한 틀에 가둠으로써 그의 보편성과 평등주의를 놓치고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베리 젠킨스는 파란색, 흰색, 빨간색으로 자유, 평등, 박애를 논한 키에슬롭스키(Krzysztof Kieślowski)를 이미 극복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예술 인생에 존재하는 유일한 색은 ‘검은색’이 아닌 ‘파란색’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파란색 안에 녹였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샤이론에게 했던 후안의 대사를 살짝 비틀어 다시 떠올려보자.
“In Moonlight Everything Looks Blue - 달빛 아래 모든 것은 파란색으로 보인다.”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 Donald Bogle. “Toms, Coons, Mulattoes, Mammies and Bucks: An Interpretative History of Blacks in Films”, 1973, 꾸준히 업데이트 되어 2001년 기준 4판까지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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