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 지민, <나빌레라>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세르반테스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이 사회에서 이 시절에 꿈을 묻는다. 당신은 꿈을 꾸고 있나요? 그 꿈은 무엇인가요? 그 꿈은 당신이 진정으로 꿈꾸던 것이 맞나요? 진부한 이 질문은 사실 인생 그 자체다.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꿈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사람들은 희망보다 절망이 가깝다는 것을 안다. 자신에게만 잔인하게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포용과 사랑보다 비난과 조롱이 쉽다. 날카로운 사회는 오히려 사람들을 잔혹하게 내몬다. 청년이 처한 가난은 총체적인 것은 미래에 대한 전망과 희망마저 상실했기 때문(1)이라는 말은 몇 년사이 N포세대를 적확하게 드러낸다.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으로 인해 청년은 오히려 ‘청년성’(2)을 상실한다.
사회학적으로 이런 진단은 당연하다. 신자본주의 세대에서 청년 세대는 비참한 존재로 표현된다. 문화에서 끊임없이 종말론에 해당하는 소재들이 범람했던 것도 이때문이었다. 회복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남아야만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 것이다. 아포칼립스의 세계는 과연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생존의 시대에서 꿈이란 사치다. 진정으로 하루를 살아내기가 벅찬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
이런 사회에서 <나빌레라>는 현실에 지쳐있는 현대인들의 ‘꿈’을 자극하는 웹툰이다. <나빌레라>는 끊임없이 사람들 저변에 깔린 희망을 자극한다. 70대 노인인 덕출은 마음에 품고 있던 발레를 시작한다. 사실 발레는 시작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발레’는 운동이자 예술이고 특히 남성이 취미로 시작하기에는 방해물이 많다. 가족들의 반대, 사회의 시선, 발레단에서의 의문을 이겨내고 덕출은 발레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덕출과 반대로 재능있는 청년 채록은 발레를 계속해나가야 하는 상황에 의문을 지니게 된다. 방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발레가 꿈인 노인 덕출과 발레를 현실로만 받아들이게 되는 채록의 듀엣은 현실을 꿈으로 만드는 최상의 조합이다.
둘이 빚어내는 꿈을 찾아가는 과정,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꼰대’의 과정은 최소화된다. 꿈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폭력적 명제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자신의 방향을 찾아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지니는 것으로 우회한다. 한 프로그램에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묻냐는 진행자에게 초등학생은 아직 정확한 꿈이 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자꾸 꿈을 물어봐서 힘들다고 대답했다. 아직 어린 초등학생도 ‘꿈’의 무게감을 알고 있는 것이다. 꿈이 장래희망을 뜻하고 있으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충고가 함께한다는 것 또한.
나비처럼 나빌레라
70대 노인은 왜 그제서야 자신의 꿈을 말할 수 있었을까? 필연적으로 사회에서는 개인이 성장하면 자유와 결정권을 얻을 수 있는 대신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운다. 게다가 결혼과 출산, 육아가 개입된다면 개인의 삶은 제외된다. '나'보다 '가족'의 삶이 우선시되면서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사랑하고 원하는 것을 쉽게 발화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나이가 들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노라고 외칠 때다. 이미 너무 늦었는데 왜 굳이 지금 하냐고 묻는 수많은 질문들이 있다. 그러나 덕출은 이와 반대로 발레를 선택한다. 손녀딸에게 “해보고 싶은 건 해보고, 가보고 싶은 곳엔 꼭 가보거라. 망설이다 보면 작은 후회들이 모여 큰 미련으로 남게 되니까...”라는 말은 오히려 본인에게 하는 위로의 말이다.
발레를 통해 만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 평생의 꿈으로만 접했던 덕출, 누구보다 재능이 있지만 방황하고 있는 채록, 무용 전공자인 승아, 일본에서 단장님만 보고 온 키요시, 발레를 사랑해서 발레를 취미로 하고 있는 의대생. 이들 모두가 모인 이 발레단은 경쟁이 없다. 사랑하는 것을 치열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임이다. 다만 발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공간에서 덕출은 발레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작품을 올리기까지의 과정은 치열하다. 끊임없이 부상에 대한 위험을 감수해야하고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만 한다. 발톱이 빠지고 발이 다 망가지는 일들도 일쑤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위해서 수없는 고통의 연속이다.
<나빌레라>에서의 강점은 발레를 소재로 하면서 이를 아름답게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웹툰은 몸의 동작과 움직임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매체다. 스크롤을 내리며 발레의 동작은 단순히 그림이 아닌 행위로 구현된다. 이는 단행본에서보다 훨씬 더 강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스크롤과 함께 흐르는 작화는 당연히 속도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칸의 흐름과 변화의 포인트는 독자의 몫이 된다. 본인의 스크롤 속도를 통해 장면들은 생동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출과 채록의 공연에서 대사가 거의 생략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는 것처럼 채록과 덕출의 몸 동작을 연속적으로 배치하는 구성을 통해서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은 더욱 더 깊이를 지니게 된다.
이를 위해 작품은 발레 전공자들이 검수를 통해서 발레의 동작과 용어를 적확하게 표현한다. 이로인해 특히 채록의 몸 동작의 묘사는 역동적으로 이뤄진다. 강하고 부드러운 채록의 발레 동작들은 힘을 얻고 <나빌레라> 서사 자체에 힘을 보탠다.
나이듦의 철학
결국 모두는 죽는다. 어느 순간까지는 성장을 하고 이후의 모든 시간은 늙고 죽어가는 하나의 방향을 지닌다. 못하는 것을 잘하게 되는 시간이라기보다, 잘하는 것을 못하게 되는 시간들이다. 노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발전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다. 도전이라는 말은 청년들의 몫이라고 칭하며 권하고, 나이가 든 사람에게는 주책이라는 말로 만류한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물학적으로 노화를 겪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만큼 노련한 ‘삶의 자세’가 있다.
덕출 할아버지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존재다. 덕출의 많은 대사들이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은 웹툰 서사에서 드러나듯 자신이 말한대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낸 묵묵한 삶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한 ‘가장’의 헌신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지속적으로 말하는 ‘원하는 것을 하라’는 말은 본인에게는 적용할 수 없었다. 발레가 그가 그에게 처음 내리는 자율성이다. 노화되는 시간들을 성정하는 시간으로 바꾸는 덕출은 ‘나이듦’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모두 다 늙어간다. 이때 덕출은 표지로 삼을 수 있는 새로운 롤모델이 되는 것이다.
재미있은 것은 발레에 있어서는 사제 관계가 역전되는데 있다. 이 또한 세대간의 갈등의 요소를 걷어낸 흥미로운 설정이다. 나이가 아닌 경험자가 멘토가 되는 것이다. 이는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된다. 서로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해나가며 덕출은 발레 실력을 채록은 발레의 동력을 찾아낸다. 러시아 발레리노가 가장 이질적인 두 존재가 함께 있는 모습에 감탄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와 미래가 조우하는 것, 이 모습이야말로 진정으로 제대로 ‘나이듦’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몽테뉴의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의 글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삶에 대한 걱정으로 제대로 죽지 못한다. (...) 우리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죽음 자체에 대비하기 위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순간적이기 때문이다. 별다른 영향이나 손해 없이 끝나는 십오 분 동안의 고통을 위해 그렇게 특별한 가르침을 받을 필요는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을 위해 실컷 살아왔으니, 적어도 남은 생애 동안에는 자기를 위해 살아보자. 우리의 생각과 계획을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안락 쪽으로 다시 향하게 하자.
나의 분별력은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뒷걸음치기도 한다. 나는 두 번째나 세 번째에 생각하고 궁리한 것이라고 해서 첫 번째로 생각하고 궁리한 것보다 결코 덜 의심하지 않는다. 는 몽테뉴의 글들은 덕출 그 자체다.
반대로 채록은 방황하는 청춘이다. 이또한 나이듦의 한 과정으로 그려진다. 자신을 도울 사람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자신의 꿈을 고민해나간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견디다 보면 다 잘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마음도 먹을 수 없다. 사실 현실적으로는 이런 말 전부가 사치다. 그러나 덕출은 끊임없이 희망을 불어넣는다. ‘청춘 스스로 현실을 견디고 버텨내야한다’는 데서 벗어나서 관심을 갖고 상황을 개선시키려 노력한다.(3)
청춘의 방황은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심을 통해서 조금은 봉합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신기루라도 좋아
<나빌레라>는 ‘이쇼라스’라는 말로 현실을 긍정한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쇼라스 속에 있는 치열함을 응원한다. 어쩌면 이는 말뿐인 위로일 수 있다. 사실 현실은 <나빌레라>속 사회보다 훨씬 냉정하고 자비가 없으니까. 그러나 <나빌레라>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이런 사회이기 때문이다. 목적성을 잃고 헤매는 자들을 ‘어른’, 다 자라서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방황하는 청춘에게 따뜻한 말로, 자신의 행동으로 따라올 수 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두들 알고 있다.
사실 <나빌레라>는 작위적이고 신파의 요소가 가득하다.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웹툰 속 현실은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 아닌 이데아다. 첫째 아들이 발레를 반대하는 자세만이 오히려 현실적인 반응으로 보이고 나머지 가족들과 동료들의 반응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덕출의 행동이 유난으로 보일 수 있는 지점들이 있다. 그러나 <나빌레라>에서 덕출의 면모는 무조건적인 ‘현인’으로 비추며 ‘선’과 ‘도덕’ 표지로 작동한다. 잔혹한 현실에서 사람이 변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채록을 괴롭히던 성철의 변화는 작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또한 치매 현상이 진행되는 과정에 있어서 모든 가족들은 누구나 아버지를 모시려고 하는 등 매우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웹툰이 모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만 보여주는 것이 필요할까? 사회학적으로 분명하게 계층이 있기에 당신은 더 이상 가치가 없고, 꿈을 꿔봤자 현실을 변하는 것이 없다고만 발화해야 할까? 누군가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의 나침판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빌레라>는 그렇기에 지나치게 이상적인 현실을 그리고 있는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위로가 된다. 주어진 현실 조건을 강조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에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삶은 그저 막막함에 불과하다. 청년들이 청년성을 상실했다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은 결국 사회가 평가하는 나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초라하다는 내리는 평가는 사회의 평가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게 만든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것은 간절함 때문이다. <나빌레라>는 사실 오아시스다. 모두들 꿈꾸라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꿈을 꾸어야 할지 진정한 어른이 차근차근히 일러주고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관념적으로 꾸는 꿈이 아닌 현실에서의 치열한 삶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할 수 있는 거리감을 획득한다. 덕출 할아버지는 결국 신기루같은 존재다. 치매를 앓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잃어도 발끝을 세우는 그 모습에서 위안을 얻는 것은 결국 치열한 ‘꿈’의 현현이다.
사실 YOLO는 덕출이 발화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다. 의미가 퇴색되면서 탕진하는 삶으로 변모하였지만 후회없이 살기 위해서 치열하게 끝까지 한 번 더를 외칠 수 있는 열정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 스스로 자신의 안위를 묻고,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때의 ‘나’는 남들의 평가에 서있는 것이 아닌 나를 성찰하는 데서 있다. 따라서 한 번 더, 한 번 더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오롯이 나의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 때 삶은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채록은 덕출의 이런 자세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얻는다. 또한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이야기한다. 당신도 나비처럼 날아갈 수 있다고. 꿈을 이루는 과정은 “즐겁고 행복하지만 무섭고 긴장되고 실패하면 아쉽고 분하고 화나는 것”이지만 그래도 꿈처럼 나빌레라.
글 · 한유희
문화평론가. 제 15회<쿨투라> 웹툰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2021년 만화평론 공모전 우수상 수상. 경희대 K-컬처 스토리콘텐츠 연구원으로 웹툰과 팬덤을 연구하고 있다.
(1)전상진, 『세대 게임―‘세대 프레임’을 넘어서』, 문학과지성사, 2018, 64쪽 참조.
(2) 청년성은 “기백과 열정, 유연성과 기동성, 위험을 감수하고 임기응변적이며 실험적인 성향, 창의성과 변화에 대한 갈망, 상황적 삶과 현재 지향성, 최첨단의 노하우, 유행에 민감함, 그리고 아름다움과 같은 바람직한 것이다. ―전상진, 위의 책, 78쪽.
(3)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90926181756425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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