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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여, 와인 아비투스를 즐겨라
청년이여, 와인 아비투스를 즐겨라
  • 권은중 | 와인평론가
  • 승인 2024.05.14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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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와인, 권위·계급 아니라 즐거운 현재를 상징

글 권은중

와인 평론가. 중앙언론사에서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역사를 다룬 인문학적 칼럼을 써왔고, 와인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지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

와인은 술이 아니라 상징이다. 중세 때부터 ‘예수의 피’로 불리던 와인은 종교적 상징일 뿐만 아니라 높은 가격과 음용 시 요구되는 독특한 매너 탓에 세속적 상징으로도 존재해왔다.

산업자본주의가 시작된 20세기에 와인은 또 다른 얼굴을 갖는다. 미국에서 시작된 무한 복제 가능한 텔레비전과 영화라는 미디어의 등장으로 상징의 범위를 넓혔다. 와인의 이미지는 알코올과 음료로서의 사용 가치에 국한되지 않고 추상적인 기호로까지 자리매김했다. 매스미디어 탓에 산업혁명 이후 와인이 갖던 기호와 기표의 불일치를 ‘황당’이 아니라 ‘매력’으로 만들었다.

와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베이비붐과 맞물리면서 단순히 현대인이 일상에서 음용하는 알코올 음료가 아니라 서구적 부르주아의 삶을 환상케 하는 아이콘이 됐다. 한국도 미국과 일본을 거쳐 이런 이미지를 받아들였고 1987년 와인 수입 자유화 이후 이 서양 문화의 아이콘을 한국화하기 시작했다. 이뿐 아니다. 와인의 상징은 일차원이 아니라 다차원적이다. 와인을 제대로 즐기려면 많은 와인 지식과 반복된 훈련이 필요하다. 색깔을 보고 향을 맡고 잔을 흔들고 입천장과 혀 그리고 비강에 접촉시켜 맛과 향을 느끼고 전문적(정확하게는 과학적) 언어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제례의식처럼 보이는 이 행위는 와인이 다른 술과 달리 진입장벽이 있다고 느끼는 이유다.

그래서 와인이 가진 상징성은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가 창안한 아비투스의 개념으로 잘 설명된다. 아비투스(habitus)란 ‘가지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habere’에서 파생했다(영어의 have 동사에 해당한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란 세상을 사는 방식과 태도를 말한다. 그런데 아비투스는 자신이 결정하기보다는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 개인들에게 자연스럽게 입혀지는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랐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자세가 달라진다는 의미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아비투스가 사회적 불평등을 결정짓는 데 작용한다고 갈파했다.

 

신분을 구분짓던 과거의 와인

부르디외는 이런 사회적 불평등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경제자본, 사회자본. 문화자본 3가지를 꼽았다. 경제자본이란 소득과 소유권을, 사회자본은 인맥을, 문화자본은 교육, 학위, 교양 등을 뜻한다. 부르디외는 이 가운데 문화자본이야말로 자신의 아비투스를 잘 드러내는 자본이며 가장 획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설명했다. 문화자본을 비롯한 3가지 자본은 명예, 신용을 뜻하는 상징자본 획득의 밑거름이 된다.

부르디외는 그 예로 당시 사람들이 찍는 사진을 관찰했다. 1960년대 당시에는 필름 가격이 비쌌다. 그래서 하류층은 주로 인물, 가족의 추억 등을 찍었지만 상류층은 실험적 형식과 예기치 않은 모티브에 셔터를 눌렀다. 부르디외는 “상류층은 미학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개인의 선호가 아니라 사회적 계급이 이런 경향을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2023년 봄 북클럽 ‘트레바리’의 와인 공부모임 회원들과 함께

와인은 사진보다 아비투스의 구별짓기를 더 잘 드러낸다. 와인의 복잡한 맛과 향뿐 아니라 계급적인 상징성까지 가지고 있는 탓이다. 역사적으로 고대 로마의 귀족에서부터 중세 교황과 황제까지 달콤하고 진한 포도주를 즐겼다. 식초처럼 산화된 포도주를 전염병을 막기 위해 물에 섞어 마시는 평민층과 자신을 구분짓기 위해서다. 반면 메디치 가문은 왕들과 달리 레드 와인이 아닌 깔끔한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자기 가문의 고고함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토스카나 산지미냐노의 베르나차가 바로 그 와인이다. 와인은 이처럼 차별로 존재해왔다.

이런 상징문화로서 와인이 신분 과시의 최정점을 찍은 것은 산업혁명 이후 엄청난 자본축적을 이룬 영국인들에 의해서였다. 당시 영국인들은 백년전쟁 이전 자신의 식민지였던 보르도(Bordeaux) 와인을 마셨다. 보르도 와이너리는 영리하게도 노예무역과 방직업으로 부를 쌓은 영국인들을 위해 묽고 달던 와인을 농밀하고 드라이하게 만들었다. 또 최고 등급의 포도를 이용했다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샤또 오브리옹이 가장 먼저 시작한 보르도 와인의 마케팅 방식은 다른 양조업자들에게 퍼져나갔고 ‘그랑 크뤼(Grand Cru)’로 알려진 최초의 등급제로 이어졌다. 1855년 등장한 등급제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음식은 문화의 한가운데 있는 핵심적인 관습이자 규범이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가장 기본은 나와 같은 음식을 먹느냐의 여부라고 지적해왔는데 와인은 그런 구별짓기에 최적의 음식이었다.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보다, 철갑상어 알보다 더 비싼 음식은 와인밖에 없다. 와인은 먹는 것으로 권력을 보여주기에 최적화된 음식으로 존재해왔다.

 

로마네 꽁띠, 이제 꼰대용 와인 됐나?

하지만 대량생산·대량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비투스의 효용은 종말을 고하고 있다. 중세 금속활자 인쇄에 의해 세워진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마샬 맥루언의 대표적인 개념 중 하나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기가 인류 사고를 균일화, 획일화로 이끈 근대사회 병폐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주)가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종말을 맞았듯이 텔레비전을 전위대로 세웠던 현대자본주의의 은하계는 SNS와 인공지능으로 무장한 3기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최고급 소비재이자 문화적 상징의 정점에 있는 와인에 닥친 흔들림의 폭은 클 수밖에 없다.

SNS와 플랫폼 소비에 능한 MZ세대는 고가의 보르도 와인 대신 통신사 할인 등 다양한 할인이 가능한 편의점에서 1만 원짜리 와인을 휴대폰으로 주문한다. 부모 세대가 잘난 체하며 백화점에서 구매한 와인과 함께 스테이크를 먹는 대신, 삼각김밥과 불닭볶음면으로 편의점 OEM 와인을 마신다. 그렇다고 MZ세대의 취향이 저렴하다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단군이래 어느 세대보다 해외 생활 경험이 풍부한 이들은 아버지나 삼촌 세대와 다르게, 서구인들처럼 와인을 과시가 아니라 경험으로 즐길 줄 안다. 1인당 GDP가 3만 달러인 선진국 삶의 결이 뭔지 아는 이들은 가성비라는 짠돌이 소비는 물론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 플렉스(소비로 자신을 과시하는 행위) 소비의 계층적 장벽을 능수능란하게 넘는다. 자린고비는 자린고비대로, 파락호는 파락호대로 평생 동일한 패턴의 소비를 했던 부모 세대와는 확연한 차이다. 순대에 소주만 마시거나 로마네 꽁띠 혹은 보르도만을 고집하는 꼰대들의 획일적 삶은 이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구별짓기는 무너지고 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긴 걸까? 먼저, 과거처럼 와인의 중윗값을 내는 게 불가능해지고 있다. 평균 80점에 최대한 수렴하려는 2차 세계대전 후 중산층적 사고방식은 MZ세대(1980∼1994년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5∼2005년 출생한 Z세대를 아울러 이르는 말)에게 크게 매력적이지 않다. 코로나19에 따른 취업난에 의한 소득감소 탓만이 아니다. 이들에겐 다른 세대와는 다른 특이점이 있다.

Z세대는 X세대(1970년부터 1980년까지 출생한 세대)인 부모와 어느 세대 부모 자식 관계보다도 가깝다. 이들은 생활의 밀접성뿐 아니라 실외 및 문화 활동을 같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성장했다. Z세대는 아버지 세대와 달리 와인보다 건강기능성 식품을 더 찾고 운동에 몰두한다. 아예 술을 마시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나 20~30대 청년층에서 가장 많이 늘어나고 있는 층은 ‘마시지 않는다’고 응답하거나 가벼운 맥주 소비자다. 이 때문에 프랑스나 미국도 와인 판매량이 해마다 줄고 있어 생산된 와인을 매년 폐기할 정도다. 와인을 모르면 뭔가 불이익을 당하는 듯해 전전긍긍하던 부모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와인이 부르주아 문화를 상징해왔던 전형성이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세분해서 보면 M세대(1980∼1994년 출생자)보다 Z세대(1995∼2005년 출생)가 좀 더 특이하긴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20%를 차지하는 M세대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Z세대와 비슷한 성향으로 분류된다.

블라인드로 와인을 마시고 생산 국가와 품종을 맞추는 게임
블라인드로 와인을 마시고 생산 국가와 품종을 맞추는 게임

실제 우리나라 MZ세대의 술 구매 방법도 기성세대와 많이 다르다. 이들의 50% 이상은 술을 편의점에서 구매하고 있다. 와인도 예외는 아니다. 편의점에서 고르는 와인은 부르디외가 갈파했던 특정한 행위자들의 관계의 총체인 장(field)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5천 원쯤 하는 편의점 와인의 위상은 네 깡통에 1만 원 하는 맥주와 비슷하다. 부르디외 이론에서 ‘장’이란 자신의 경제자본이나 문화자본을 가지고 상징자본(신뢰나 명예 등)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공간이다. 심지어 가끔 이 상징자본은 치킨게임처럼 어리석은 힘겨루기처럼 보여야 한다. 아버지 세대에서 잘 가던 와인바 이름이 ‘로마네 꽁띠’였던 이유도, 와인바 내부 장식으로 로마네 꽁띠나 보르도 5대 샤또의 빈 병이 벽을 가득 채웠던 이유도 여기 있다. 부르디외는 장에서 얻으려는 상징적 가치를 ‘환상(일루지오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그러진 와인의 환상, MZ가 바로잡나

그러나 플랫폼 경제 시대에는 일루지오네는 바뀌고 있다. 이 시대에 와인은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여러 음료 중 하나일 뿐인 선택의 대상이다. 특히 위스키는 물론이고 무알코올과도 경쟁해야 하는 원 오브 뎀(one of them)이다. 유튜브를 보면, 편의점에서 고르는 와인 콘텐츠가 부르고뉴나 보르도의 고가 와인 콘텐츠보다 더 많다. MZ에게 와인은 재미있는 놀이의 하나쯤인 것처럼 보인다. 삼각김밥이나 불닭볶음면과 함께 와인을 마시며 낄낄대는 B급 정서에 소비자들은 더 환호한다. 6,000원짜리 편의점 출시 OEM 와인이 1년 만에 50만 병씩 팔리는 시대가 도래했다.

와인의 장에 대한 변화는 더 큰 범주인 취향의 변화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요즘 시대의 교양있는 엘리트들은 과거의 사회적 지위나 부가 자신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택이 취향을 창조한다고 생각한다. 즉, 강남 아파트에 살고 외제차를 모는 졸부적 과시는 더 이상 고상한 취향으로 통하지 않는다. 외제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채식을 하는 것이 더 세련됐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모피를 입는 것보다 자연친화적인 대나무 섬유로 만든 생분해 옷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돈 자랑보다 개념과 철학을 내세워서 SNS에서 ‘좋아요’를 얻는 시대가 온 것이다. 부르디외가 살던 산업 사회와는 확연히 다른 아비투스다. 이런 아비투스 역시 과거처럼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 이런 개념은 돈이나 계급으로 얻어지는 것도 역시 아니다. 재벌 3세나 연예인들의 SNS가 무개념으로 대중의 질타를 받는 일이 빈번한 까닭이다. SNS 덕에 정말 흥미로운 아비투스의 장이 열린 것이다. 이 말은 과거와 달리 계급이나 세습이 아니라도 누구나 자신의 멋진 아비투스를 개척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와 장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가장 상징적인 음식인 와인으로 이 변화는 잘 설명된다. 과거 부르디외는 취향 가운데 대중적 취향을 가장 낮은 곳에 놓았다. 그리고 위로 오르려 애쓰는 사람의 허세 취향을 중간에 두었다. 그리고 미적 감각을 추구하고 이를 삶으로 체화하려는 정통 취향을 맨 위에 놓았다. 그러나 대량생산시대의 취향의 범주는 21세기 현재 자본주의시대의 취향을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 부르디외의 취향의 분류를 좀 더 보충하고 확장할 필요가 있다.

 

전문형 와인 취향의 소비자를 잡아라

프랑스에서 활동한 언어학자인 알기르다스 그레마스(Algirdas Greimas)의 의미생성 모델인 ‘기호 사각형’은 부르디외의 취향 이론을 좀 더 생생하게 만들어준다. 그레마스는 “우리가 하양과 검정이라는 색상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그 색상이 선험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색상이라는 공통의 축과 함께 관계성에서 차이를 인식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레마스는 이런 의미생성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이항대립에 따른 기호학적 사각형을 만들었다. 이 기호학적 사각형은 의미생성의 기본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도구로 언어와 예술, 사회학 등에서 사용되어왔다.

부르디외의 3가지 범주의 취향 분석을 와인 취향에 대응해 기호 사각형을 만들어봤다(위 그림 참고). 우선 와인을 가성비로 접근하는 취향은 부르디외가 말한 ‘대중적 취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취향과 이항대립(반대)되는, 즉 비용과 상관없이 최고급 프랑스 와인을 즐기는 것은 ‘전통형 취향’이다.

한편, 전통형과 모순되는 이항대립이 아니다. 허세형 취향은 부르디외가 말한 ‘전통층을 쫓는 허세 취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허세형 취향은 전통형이 가진 상징성을 추종하지만 고가격·고품격의 와인을 마시지는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렇지만 허세형 취향은 대중적 취향이 즐기는 낮은 가격의 와인도 마시지 않는다. 부르디외는 이 허세형의 대립항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다만 그레마스의 이항대립 원칙에 입각해 ‘허세형 취향’의 이항대립항을 ‘전문형 취향’이라고 설정할 수 있다. 전문형은 저가격, 저품격 와인을 마시는 대중적 취향과는 차이(모순적 관계)가 있다. 이들은 로마네 꽁띠같은 고가 와인을 마시지 않지만 대신 로마네 꽁띠 주변의 밭에서 나온 와인이나 한 단계 낮은 와인을 마신다. 이들은 과학자나 교수, 의사처럼 전문 직종에 종사하면서 와인을 좀더 체계적이고 분석적으로 접근하려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문화자본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준 전통형 대중이지만 사업가·자산가인 전통형 대중과는 경제력에서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전문형은 와인 시장에서 가장 관심을 가질만한 인플루언서이자 헤비 유저다.

와인과 이야기에 취한 모임 회원들

 

취향은 세습이 아니라 창조된다

부르디외는 그의 저서 『구별짓기』에서 취향은 세습되는 것이라 이동이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SNS와 AI 등을 통해 와인 정보는 물론 와인 관련 감성까지도 습득할 수 있는 세상에서 대부분의 와인 소비자는 이 4가지 계층에 어느 정도 다중적으로 걸쳐 있다. 첩첩산중 산골에 있는 편의점에서 150만 원짜리 보르도산 그랑 크뤼 와인이 팔렸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게 현실이다. 이제 스마트폰만 있다면 누구나 동네 편의점에서도 보르도의 최고급 와인을 구매할 수 있다. 여러 명이 십시일반해서 최고급 와인을 마시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대중형이나 허세형이 전문형(확률은 낮겠지만 혹은 전통형)으로 성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또 부르디외의 이론과 달리 현재 와인의 장에서는 전통형·전문형·허세형이 대중형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양조술과 유통망의 발달 덕이다. 2만 원짜리 와인을 수십만 원짜리 와인과 맛으로 얼마든지 견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요즘의 양조술이다. 또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을 이용해 친환경으로 만든 5만 원짜리 내추럴 와인은 과거 산업화 시대에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던 신박한 와인이다. 3만 원짜리 무알코올 스파클링은 오히려 건강을 최우선으로 치는 전통형이 더 즐긴다. 이 역시 부르디외가 주창한 이론과는 전혀 다른 위치의 이동이다.

필자는 이탈리아 ICIF(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에 유학을 다녀온 이후 와인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레스토랑 개업 대신 와인 관련 강연과 기고를 해왔다. 특히 2023년 1월부터 지금까지도 직장인 독서 커뮤니티인 ‘트레바리’에서 이탈리아 와인 관련 클럽 ‘맘마미아 이탈리아 비노’를 운영해왔다. 이 모임은 특이하게 책을 읽고 와인 시음을 한다.시음은 정규 모임뿐 하나라 한 달에 1~2회 정도 시내 유명 레스토랑 등에서 별도의 모임으로도 진행된다.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마시고 싶은 와인을 가져와 서로 의견을 교환한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와인이라는 특정한 목적의 장이 형성된 것이다. 마시고 난 뒤에 복수로 선호도 투표를 한다. 나름 장의 환상을 놓고 경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 기수에 18~20명을 8번 모집해 클럽을 운영해왔으니 많은 경쟁의 결과를 데이터로 가지고 있다.

 

2년 동안 MZ 와인 소비자를 만나보니

처음에 멤버들은 가벼운 마트 와인을 가져왔다. 하지만 만남이 많아질수록 마트에서 전문점으로 구매처가 차츰 바뀌었다. 부르디외가 말한 취향의 상승욕구를 보여준다. 레드와 카버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시라(Syrah) 중심이던 선택의 폭도 화이트와 멀롯(Merlot), 피노 누아(Pinot Noir) 같이 다양한 와인으로 확대되는 뚜렷한 경향을 보였다. 와인 서적을 통한 지식 축적과 서로의 경험 교류가 마중물 역할을 했다. 이런 교류는 회원들이 가진 “와인을 스테이크와 페어링 해야한다”는 환상도 벗어나게 해준다. 어떤 와인은 스테이크보다 치토스나 순대와 더 어울린다는 경험이 제공되기 때문이다. 문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던 와인의 중첩되고 왜곡된 상징성을 집단지성으로 깨뜨린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충실한 MZ세대인 만큼, 와인을 권위나 가격으로 마시지 않는다. 필자는 매회 10여 종의 와인을 마신 뒤 선호도를 복수로 투표한다. 투표 결과는 늘 예상을 벗어난다. 프랑스 샴페인처럼 맛으로 천하무적인 것처럼 보이는 와인도 이탈리아의 대중적 와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수십만 원짜리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나 보르도 와인보다 2만 원짜리 베네토(Veneto)나 풀리아(Puglia) 와인이 1위를 차지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MZ세대에게 와인은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경험의 대상일 뿐 과시나 계급의 표상이 아니다.

물론 이들 중에서는 와인 아카데미 상급자 과정을 다니는 사람들도 한 기수(20명)에 1~2명 정도 있다. 전문형으로 정점을 찍으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기수에 1~2명 정도는 와이너리 투어를 가본 경험이 있다. 또 와이너리 투어를 위해 이탈리아나 프랑스를 방문할 의향이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은 대부분 미술관이나 오페라와 함께 투어 일정을 짠다. 사업가이거나 의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도 있지만 일반적인 회사원들도 있다. 이들은 기호 사각형의 전문형과 전통형의 중간쯤 혹은 전문형과 허세형(전문가를 따르려는 추종형이란 표현이 좀 더 맞는 거 같다) 중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와인을 마시는 이유는 권력이나 계급과는 관련이 없다. 이들은 와인의 가장 큰 장점은 여럿이 둘러앉아 즐겁게 마시게 되는 축제성에 있다고 말한다. 또 코르크를 딴 뒤에도 와인이 맛과 향이 차츰 농염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고 한다. 와인의 진입장벽마저 이들은 즐거움으로 여긴다.

또한 와인은 찰나적인 즐거움에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와인 한 병을 딸 때마다 거기에 얽힌 역사와 지리 그리고 예술처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이야기들이 씨줄 날줄을 이루며 나온다”며 “이 포인트가 와인의 진짜 매력”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MZ세대들은 와인이라는 장에서 부르디외의 말처럼 일그러진 환상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지성을 발휘해 오래된 환상을 교정하고 있다. 와인 시장은 소비자의 큰손인 이들의 말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 해당 기사는 나라 셀라의 협찬으로 편집ㆍ제작되는 와인 매거진 6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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