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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만물은 서로 돕는다
[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만물은 서로 돕는다
  • 한성안 | 경제학자
  • 승인 2024.09.3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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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적’(!) 진보가 읽어야 할 책

르몽드디플로마티크 6월 호에 『다시, 케인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공저, 김성아 옮김, 2024, 포레스트 북스)​에 관한 서평을 쓴 적이 있다. 어떤 페친이 이 서평을 두고 반박의 댓글을 올렸다.  “회사를 운영하면 전혀 도움이 안 되며” “대한민국을 멍들게 만들고” “신입 아이들을 반병신”되게 만든 “케인스, 사회, 마르크스” 등 이젠 사라져야 할 것들을 내가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토론을 이어가다 보니,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곧 존재론에 관한 질문으로 귀착되었다. 경제학은 철학이라는 나의 주장이 다시 입증된 것이다. 나는 인간은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역설했다. 하지만 그는 ‘개인’이 모든 활동과 사유의 출발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 세상이 제대로 된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세상은 개인에서 시작되었는가? 과연 개인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은 개인적 존재인가? 개인적 존재론은 주류경제학의 존재론적 철학이다. 이 존재론으로부터 경제학 모델이 구축되는데, 이를 ‘방법론적 개인주의’(methodological individualism)라고 부른다.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공언했듯이, 이 방법론에 따르면 “사회는 없다!”

 

인간은 외로운 늑대인가?

『만물은 서로 돕는다』(표토르 크로포트킨, 2015, 김훈 옮김, 여름언덕)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개인적 존재론, 사회는 없고 개인만 존재한다는 보수정치인들의 믿음을 반박하는 중요한 책이다. 이 책에서 크로포트킨은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토머스 홉스의 방식처럼 그저 질러 보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더욱이 하나의 전제로부터 명제를 추론해 내는 논증방식을 택하지도 않는다. 크로포트킨은 철저한 조사연구, 곧 실증연구방식으로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사회 속에서 서로 도우며 협력하는 존재임을 보여 주고자 한다. 곧, 과학연구와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인간의 사회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더 이상 말로만 하지 말자!

토머스 홉스의 존재론이 인류문화사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그는 이른바 ‘자연상태’에서 출발한다. 그가 상상한 자연상태는 “외롭고, 누추하고, 역겹고, 거칠고, 궁핍하다.” 또,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모두 ‘개별자’이자 “외로운 늑대”다. 즉 서로는 어떤 인적, 문화적, 사회적 관계에도 엮어있지 않으며, 철저히 독립적이다. 이 야만인들은 우연히 한데 모여 끊임없는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들은 결코 스스로 ‘사회’를 이루어낼 수 없다. 사회적 역량을 갖춘 사회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 존재임을 믿고 있는, 적지 않은 진보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존재론이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표토르 크로포트킨, 2015, 김훈 옮김, 여름언덕)
『만물은 서로 돕는다』(표토르 크로포트킨, 2015, 김훈 옮김, 여름언덕)

 

사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

그러나 크로포트킨의 조사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개인으로 존재했다는 주장은 그 어떤 곳에서도 입증되지 않는다. 인간은 처음부터 ‘집단’으로 존재했다. 가령, 인류 최초의 자취는 빙하기나 후빙기 초기에 발견되는데, 그 당시에도 인간은 집단을 이루어 생활했다. 구석기시대에서도 석기가 분산되어 따로 발견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어디선가 석기가 발견되면, 대부분의 경우 다른 석기들도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개인으로 생활하지 않고 집단을 이루며 살았기 때문이다.

“위에서 개략적으로 훑어본 사례들만으로도 원시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그리 빈약하지 않다고 여겨지며, 지금까지 축적된 지식은 홉스의 이론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반박하는 것으로 보인다.”(p.106) 곧,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부터 이미 사회적 존재였다는 말이다. 인류의 진화사에서 인간이 ‘외로운 늑대’, 곧 개인인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이 본성과 역량은 ‘역사시대’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크로포트킨은 역사 속에서 이런 사례들을 수없이 발굴해 내었다. 2천 년 전 로마인들이 부당하게 ‘야만인’으로 조롱한 고대와 중세 초기의 민족들은 원시사회 우리 종의 사회적 본성과 도덕적 본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생활 속에 구현하였다. 예컨대, 원시사회를 지탱했던 씨족이 해체되자 ‘야만인’들은 혈족을 초월하는 ‘마을공동체’를 형성했다.

야만인들의 사회적 본성은 도덕적 본성으로 이어졌다. 선사시대로 넘어가자, 사유재산제도가 형성되었다. 그 때문에 마을공동체에 빈자와 부자가 공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령 커바일 족의 구성원들은 가난을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재난으로 여겼다. 따라서 가난한 이가 도움을 청하면 부자는 그 밭에서 일해주고, 다음에는 가난한 이가 부잣집에서 일해주는 것으로 갚는다. 더욱이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구성원들을 위해 일정 규모의 밭을 따로 마련해 두며, 이 밭은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경작한다. 또, 수소나 양을 잡을 때는 거리에 그 소식을 널리 알려 아픈 사람이나 임산부가 원하는 만큼 고기를 받아 갈 수 있었다.

커바일 족의 생활에는 이처럼 상호부족의 정신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협력, 연대, 우애의 정신만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다른 지역을 여행하는 동안 곤경에 처한 다른 커바일 사람을 만나면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그를 도와줘야 한다.”(p.167) 성서의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미담이 이 야만인 부족에 전파됐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그들은 성경을 읽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야만인은 전혀 야만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인보다 훨씬 문명적이었다!

현존하는 미개인 중 가장 오래된 부시먼을 보자. 실제로 함께 생활하면서 관찰한 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부시먼 부족은 가끔 서로 연합했고, 공동으로 사냥했고, 전리품을 두고 서로 다투는 일 없이 사이좋게 나눠 가졌으며, 강한 동료애를 드러내었다. 한 연구자는 한 부시먼이 물에 빠져 익사하기 직전에 동료들로부터 구출된 감동적인 얘기를 전해주었다. 동료들은 자기네 털옷을 벗어 그의 몸을 감싸준 뒤 자기네는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은 불을 피워 그의 몸을 말려주고 몸을 문질러 주면서 결국 그를 되살려 놓았다.(p.111) 이는 이기주의나 탐욕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현대의 도덕론이 찬양하는 이타주의와 희생정신의 전범을 보는 듯하다. 우리의 도덕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부시먼보다 약간 발전된 호텐토트 족의 도덕성 역시 놀랍다. 호텐토트 사람에게 뭔가를 주면 그는 이내 그것을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과 나누었다. 우리의 이 조상들은 뭐든지 혼자 먹는 법이 없으며 제아무리 배고파도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서 함께 먹는다. 그러나 그것은 호텐토트족만의 습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개인’ 모두가 지닌 일반적 습성이었다(p.112) 한 인류학자(P. Kolben)의 체험담은 우리 조상의 고매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의 말은 성스럽다. 그들은 유럽의 부도덕함과 사악함,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술책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 이웃과 좀처럼 다투지 않는다. 서로에게 한없이 친절하고 따뜻하다. ... 호텐토트인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되는 것의 하나는 서로를 보살펴 주고 호의를 베푸는 것임이 분명하다. 호텐토트인의 고결함, 정의를 시행할 때의 엄격함과 신속함, 순결함은 전 세계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p.113) 크로포트킨은 도덕적 문화가 전 세계 야만인 사회의 보편적 원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크로포트킨 이후 1백여 년 이상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였고, 수많은 실증연구가 축적되었다. 이에 따르면 부시먼과 호텐토트족의 고결한 태도는 그들만의 예외가 아니었다. 그것은 원시사회를 지탱하는 보편적 원리였으며, 이것이 없었더라면 집단은 붕괴되어 결국 멸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공정, 평등, 정의, 연대, 희생, 공익, 공동선으로 개념화되어 있는 ‘도덕’은 아득한 옛날 수십만 년 전 우리 조상에 의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것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노예들이 내면화한 ‘노예도덕’이 아니었다. 공공의 이익과 공동선, 더욱이 즐거움 속에서 자발적으로 행한 ‘주인’의 도덕이었다.

 

역사시대에서도 강화되는 사회성

우리 종의 사회적 본성과 도덕적 본성은 중세를 지나면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중세로 들어서면서 지배자와 약탈자가 등장하였다. 서양에서는 귀족과 영주가 그 부류에 속한다. 이들은 원시시대부터 형성되어 온 마을공동체를 자신의 지배 아래 두고자 온갖 술책과 압력을 동원했다. 하지만 호모사피엔스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일부는 기존의 마을공동체를 지켜냈지만, 다른 이들은 그들만의 ‘사회’를 새롭게 건설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중세도시’가 그런 대안적 사회에 해당한다. 동시에 그들은 그 속에서 길드 곧, 동업조합을 구성해 공익과 공동선을 도모하였다. 길드는 상호부조와 상호지원의 원리로 뭉쳤다. 따라서 중세도시는 마을공동체와 길드의 연합체다.

길드와 자유민으로 조직된 중세도시의 경제는 어떤 성격을 지녔을까? 수공업자의 작업은 ‘정확하고’ 온당해야 했으며, 장인이 사용하는 재료는 ‘정품’이어야 했고, 빵은 ‘제대로’ 구워야 했다. 장인은 모르는 사람에게 물건을 팔지 않았고, 서로를 잘 알고, 그 직종의 기술을 잘 알고 있는 조합원을 위해서 생산했다. 이런 체제에서 장인이 품은 고귀한 열망은 품질이 좋지 못한 제품을 내놓지 않는 것이었다. 경제생활은 이렇게 도덕적 원칙 아래서 이루어졌다. 도시민 스스로가 도덕의 입법자인 동시에 실행자였던 것이다.

개인적 존재와 비도덕적 존재를 입증할 사례는 많고, 뉴스를 통해 우리는 그 존재들의 악행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하지만 『만물은 서로 돕는다』에서 크로포트킨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것처럼 사회적 본성과 도덕적 본성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그보다 훨씬 많을 뿐 아니라 차고 넘친다. 더욱이 최근에 크게 발전한 인류학과 자연과학은 그러한 성품이 오히려 우리 종의 고유성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역사는 이러한 고유성을 지켜내기 위한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

 

마키아벨리적진보가 읽어야 할 책

나의 사회적 존재론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난 그 페친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답했다. “교수님의 가르침 감사합니다. 저는 개인이 중심이고 관점이고 모든 역사와 사관의 중심관점입니다. 이것이 인간 자유 경제철학의 기본으로 생각합니다. 교수심의 사회 관점의 시각도 존재할 수는 있다고 생각을 하나, 받아들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의 정성어린 설명과 가르침은 고맙고 감사합니다.” 비록 내가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말았지만, 나는 결코 불편하지 않았다. 시종일관 문명화된 토론방식을 견지해 주셨기 때문이다.

혹여, 다시 나를 찾을 계기가 생긴다면, 크로포트킨의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물론, 진보라 자칭하면서도 마키아벨리와 홉스에 굴복한 나머지, 인간의 사회성과 도덕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진보적 독자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다.

경제학자이니, 경제학과 관련되는 이 책의 의미도 지적하고 서평을 마치는 게, 올바른 수순일 것 같다. 지난 250년 간 주류경제학은 경제학 모델로부터 ‘사회’와 ‘도덕’을 추방하는데 진력해 왔다. 하지만 그것들을 추방한 주류경제학의 모델은 우리 종의 고유성은 물론 그 실제 삶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짐승이 우글거리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나 날카로운 절삭기계와 미끌미끌한 윤활유로 연결된 공장 시스템의 설계도일 뿐이다. 그 설계도로부터 이끌어 낸 경제정책이 제대로 실행될 리 없으며, 그 결과가 우리 종의 좋은 삶에 기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이 보여주듯이, 우리 종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사회적이고 도덕적이다.

 


글·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 역임. 중앙대 대학원 객원교수.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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