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3일 오후 6시쯤 ‘워마드’(1)에 낙태한 핏덩어리 태아의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에는 자신이 밴 남자아이를 (스스로?) 낙태했다는 설명이 붙었고,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노 바깥에 놔두면 유기견들이 처먹을라나 모르겟노 깔깔”이라는 ‘감상’이 이어졌다. 이 게시물엔 게시자의 행위와 ‘감상’에 찬동하는 댓글이 줄지어 달렸다.
이 사건은 노컷뉴스의 보도(2) 이후 ‘패륜’ ‘충격’ 등의 반응을 유발하며 한동안 공론의 장을 달궜다. 조작된 사진으로 밝혀졌지만 워마드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명한 사람 가운데 ‘낙태 사진’을 옹호한 이를 찾기는 어려웠다. 작가 공지영은 SNS를 통해 “오늘 너무 많은 곳에서 워마드 태아 훼손을 봤다. 그만하고 그냥 바로 수사 들어갔으면 좋겠다. 강아지, 고양이 사체도 그러면 안 돼!! 안 돼!!”라며 수사를 촉구했다.
노컷뉴스의 첫 보도에 이미 제목으로 ‘천인공노’가 포함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이 사건 자체가 옹호 받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 이견은 없어 보인다. 다만 이 사건 자체만 볼 게 아니라 사건의 맥락을 봐야 한다는 의견이 일부 개진됐다. 중앙일보는 “워마드 일부 게시물이 보는 이들에게 충격적이고 역겨움이나 불쾌감을 주는 지점이 있지만 워마드에서 논의되는 ‘비혼·비출산 여성으로 살아가는 법’ 등 여성의 독립성을 담은 콘텐츠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자극적인 소재만 대중에 과잉 대표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윤김지영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 교수의 의견을 소개했다.(3)
헤럴드경제는 공론화 과정과 언론의 부정적 역할에 초점을 맞춘 기사(4)를 내보냈는데, “‘워마드 낙태’ 오보가 포털메인에 떴다”는 제목에서 의중이 한눈에 드러난다. 한 마디로 “언론이 워마드를 악마화하는 데 일조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 사건을 정리한 나무위키 ‘워마드 남아 낙태인증 사건’에선 거꾸로 헤럴드경제의 기사를 “워마드의 악행에 물타기를 했다”고 규정했다.
‘낙태 사진’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는 가운데 원고를 쓰기 위해 기사를 검색하던 중 이 사건의 전반적 맥락을 짐작할 수 있는, 어쩌면 전반적 맥락과 무관하다고 해도 무방한, 혹은 논란 자체를 김빠지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을 다룬 어느 생소한 인터넷매체에서 기사와 함께 기사 한복판에 떡 하고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는데, 일군(一群)의 젊은 여성들이 연달아 수영복 심사를 받는 모습이었다. 기사 오른쪽엔, 노출이 많은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 사진이 조금 더 선명한 화질로 제공돼 있었다. 기사 하단의 맨 위는 “발기부전 옛말, ‘한 알’이면 밤새 3번 이상 ‘불끈!’”이란 제목의 기사처럼 꾸며진 광고물이 자리했다.
일상적인 여성의 성 상품화, 혹은 일반의 기준에 비춰 조금 과격하게 표현해 여성혐오가 만연한 가운데 워마드의 ‘악행’을 비판한 기사가 떠 있는 풍경은 카프카 소설 속 장면처럼 기이했다. 이렇게 기이한 풍경은 정도의 차이일 뿐, 대부분의 매체 사이트에서 목격된다. 기이하게도 이런 기이한 풍경은 일상적으로 전개돼 아무도 기이함을 기이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국정치에서 ‘진보-보수’를 논할 때 오랫동안 기울어진 운동장을 이야기했다. 기이함의 카프카적 무력화에서 보듯 기울어진 정도로는, ‘여성-남성’이 비교를 불허한다. 개인적으로 ‘낙태 사진’ 사건에 큰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일각에서 주장하듯 이 사건의 맥락을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탈역사성-탈주체의 여성이 역사성을 자각한 주체로 스스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최근 들어 확연해진 어떤 흐름에서 발견되지 않을까. 인식방법론의 타당성 여부는 다른 곳에서 더 가열차게 논쟁을 벌이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인식 자체에만 주목하기로 한다.
여성의 역사는 남성의 역사에 비해 한 없이 짧다
1949년에 출간된 시몬 드 보부와르의 <2의 성>은 서구 페미니즘의 성서로 불린다. ‘페미니즘의 자본론’이라 불러도 크게 과장은 아니다. <제2의 성>의 유명한 진단, 즉 “여성은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는 문장은 여성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으로 만들어진다고 풀어 쓸 수 있다. ‘만들어진다’의 의미는 여성이 자신을 스스로 여성으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식하든 못하든 타의에 의해 여성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자연스럽게 타자로 귀결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타자라는 말은 간단히 주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누가 주체인가. “남자는 ‘주체’이고, ‘절대’이다.”
실제로 그런지와 무관하게 근대의 인간은 평등한 인간으로서, 즉 주체로서 설정된다. 생물학적 주체이기도 하고 정치적인 주체이기도 하다. 근대성이 디자인한 인간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재삼 강조하거니와, 특정 개인이 개별적 삶에서 실제로 주체의 삶을 사는지는 불확실하고, 이 논의에서 중요하지도 않다. 굳이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아마도 대체로 불가피하게 또한 노골적으로 거의 모든 근대의 인간에게 타자화한 삶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인간은, 전(前) 근대의 인간과 달리, 최소한 명목이라도 타자가 아닌 주체다. 단, 타자가 아닌 주체로 설정된 근대의 인간에서 여성은 제외된다. 시몬 드 보부와르가 <제2의 성>에서 지적한 대로다.
나는 근대 이후의 여성이 타자라는 시몬 드 보부와르의 분석에 십분 동의하지만, 용어에 있어서는 ‘타자’보다는 ‘탈(脫)주체’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근대 이후의 여성이 타자로 확고하게 정립됐다기보다는, 형식논리상 주체의 일원으로 간주됐지만 실제로는 주체에서 배제된 채 그저 주체인 양 주체의 외양을 살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근대성의 여성 설계는 근대 이후의 여성을 타자로 규정할 만큼 솔직하지 못했고, 오히려 탈주체로 묶어둘 만큼 교활했다. 여성은 끊임없이 타자화하는 존재이지만 ‘타자에 이르지 못하는’ 탈주체로 성립한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년)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타자화하는 탈주체의 전형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따라붙는 평을 종합하면, 미국 남북전쟁 시기(1861~1865)의 남부 조지아주를 배경으로 스칼렛이란 ‘주체적인’ 여성의 삶과 사랑을 그린 소설 정도일 것이다. 소설은 “스칼렛 오하라는 미인이 아니었지만, 탈턴 쌍둥이 형제처럼 그녀의 매력에 사로잡힌 남자들은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로 시작해 그 유명한 “Tomorrow is another day”로 끝난다.(5)
미국이 자랑하는 이 소설은 유장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서사와 스칼렛에서 한눈에 드러나듯 빼어난 인물창조 등 여러모로 뛰어난 작품이다. 동시에 그 유명세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는데, 크게 흑인혐오와 여성문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이 소설 속에선 늘 두 개의 세계가 대립한다. 남과 여, 남과 북, 자유무역 대 보호무역, 흑과 백 등. 당대의 편견에 맞서 싸우면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스칼렛 오하라는 분명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활력 있게 그려진 온갖 생의 역동에도 불구하고 스칼렛은 한 번도 주체로 서지 못한다. 압축적으로 설명해 그녀는 크게 보면 (남자에 의해) 사랑받고 버림받는 피동적 존재이며, 동시에 계몽의 대상으로 표현된다.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그녀를 계몽하는 이들은 레트 버틀러나 애슐리 윌크스 등 그녀가 사랑한, 그녀를 사랑한 남자들이다. 그녀는 한 마디로 타자화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스칼렛에 대칭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멜라니 해밀튼 역시 결이 다를 뿐 타자화한 주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스칼렛과 멜라니는 분명 주체적으로 곤경을 헤쳐 나가지만, 그들에겐 강인한 삶의 의지와 여성적인 연대, 그리고 (남자를 향한 또한 남자로부터) 사랑만이 주어질 뿐 시대를 뚫어보는 역사성과 통찰력이 결여돼 있다. 결여된 능력을 보충하는 역할은 버틀러나 애슐리 같은 남자들이 맡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요 등장인물 4명을 4분면 상에 배치하면 스칼렛과 멜라니의 타자화한 탈주체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로축을 ‘역사인식’, 세로축을 ‘시대구분’으로 하면 어울리는 두 쌍이 자연스럽게 추출된다. 새 시대에 속한 버틀러와 스칼렛은 원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스칼렛은 대각선에 위치해 잘 연결되지 않는 애슐리를 연모했으나 종국에서야 자신의 진정한 짝이 버틀러임을 깨닫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소설의 등장인물 스칼렛과 멜라니가 사분면의 아래쪽에 위치한다는 사실이다. 두 여인은 그들의 시대가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두 남자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짐작할 뿐이다.
이런 소설 속 여성상은 작가 마가렛 미첼의 여성관이 반영됐다고 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의 관점을 배제하고 되도록 과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한 작가의 (부작의(不作意)의) 리얼리즘 정신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그밖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과 멜라니는 근대 이후 여성의 전형, 즉 타자화한 탈주체를 생생하게 구현한다.
남성은 자본주의가 도래한 이후에도 온존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끊임없이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주체화를 모색한다. 남성의 대응물로서 자발적이고 순응적인 타자화를 걷는 여성의 모습은 앞서 인용한 이 소설의 첫 문장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첫 문장의 사실들을 정리하면 ▲스칼렛 오하라는 미인이 아니다(6) ▲그럼에도 어떤 남자들은 그녀의 매력에 사로잡힌다 ▲그 남자들은 그 사실, 즉 스칼렛 오하라가 미인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당시 조지아 주에서 잘 나가는 저널리스트였던 미첼의 필생의 역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 소설의 첫 문장이 고작 주인공 여성의 용모를 지적한 것이라니 허망하기도 하고 절묘하기도 하다. ‘미인’이란 규정은 남성에 대한 성적인 매력임을 명시하고 있으며, 그녀가 미인이 아닌데도 남자들이 매료당한, 다소 억울한 상황을 모종의 부당함으로 그려내기까지 한다. 요즘의 페미니스트였다면 좀처럼 쓰기 힘들 법한 첫 문장이다.
‘스칼렛’은 미국 남북전쟁 시기 최남단 플로리다 주와 면한 보수적인 남부 조지아주의 여성을 대표하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 소설 속 과거의 여성이라고 치부하긴 힘들다. 근대 이후의 여성에서 나는 여전한 ‘스칼렛’을 목격한다. 주체적이었지만 한 번도 주체인 적이 없었던 ‘스칼렛’은 이런 탈(脫)주체의 처지로 인해 결코 자신의 역사를 쓸 수 없었다.
근대 이전과 구분해서 근대 이후 인간의 역사는 뚜렷하게 기록되고 있으며, 그것은 근대 이전과 확고하게 차이나는 인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 인간의 역사가 거창한 표명과 달리 남성의 역사였기에 그동안 여성의 역사는 백지로 남아 있다. 좋게 보면 서장이 열리는 참이다. 서장에서는 “스칼렛 오하라는 미인이 아니었지만”과 같은 기술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점이 분명해 보인다.
역사 앞에 서기
자신의 역사를 쓰려면 역사성을 인식해야 한다. 역사성을 인식하는 존재는 주체로 정립돼야 한다. 물론 노예의 역사가 기술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모세 이야기처럼 노예라 해도 주체로서 자신의 역사를 인식할 때만 자신의 역사이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의 남의 역사의 배경일 따름이다.
일본 소설 <방랑기>(1928~1930)가 그렇다. 최하층 빈민생활을 전전한 작가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일기를 정리한 이 책에는 작가가 투영된 여성의 삶이 민초의 삶과 중첩돼 표현된다. 최하층 빈민 여성으로 살아가기에, 주인공이자 작가에게는 빈민과 여성의 두 가지 고통이 포개진다. 주장하는 방식이 아닌 보여주는 방식으로 여성의 고통과 열악한 지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방랑기>는 본질적으로 문학이다. 섬세한 (여성의) 심리묘사 또한 읽을거리다.
이 소설의 성취는 사실 그것으로도 충분하지만, 현재의 논의와 관련해서 따지고 들자면 상당한 아쉬움을 남긴다. <방랑기>의 주인공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과 동일하게 탈역사성의 탈주체로 그려진다. <방랑기>의 주인공이 보이는 가부장제의 폭력에 순응하고 수용하는 태도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이 보이는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태도와 비교되지만 이 차이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스칼렛이 남북전쟁의 배경과 향배에 무지했듯이 후미코 또한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음에도 계급과 이념 문제에 무관심하다. 스칼렛과 후미코는 동일하게 여성을 즉자적 존재로 받아들인다. 주장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의도하지 않게 드러내는 부작의의 리얼리즘이 성취라면 성취겠다. 그러나 그 리얼리즘은 역사 앞에서 초라해진다.
반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1985년, 2002년 ‘1985년’ 판의 검열된 내용 복구해 재출간)는 부작의의 현실을 작의의 리얼리즘으로 끌어올려 여성의 역사를 작성한 선구적인 사례에 속한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약 200명의 참전여성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기술한 이 책은 다큐멘터리 문학이다. 제3자의 관점을 취하기에 작가와 주인공이 동일시된 <방랑기>와 애초에 구상이 다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등장인물들은 <방랑기>와 마찬가지로 중첩된 고통으로 괴로워한다. 여성으로서 받는 고통은 두 책에서 공통적이고, 최하층 빈민의 고통이 국민국가에서의 국민의 고통으로 바뀐다.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의 국민으로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성(性)을 초월한 애국심은 처음에는 영광의 중첩으로 보인다. 남녀를 불문한 국민으로서 애국심에, 여성임에도 기꺼이 전장에 나서는 추가적인 애국심은 국민국가에서 찬양받을 만한 행위이다.
그러나 남자들의 전장에서 여자들의 영광은 곧 망각된다. 참전한 여성들은 남성에 최적화한 군대 시스템에 물리적으로 고통받고, 남자들의 전쟁에 끼어들어 남성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 명시적이지 않은 이유로 심리적인 고통을 당하며, 여성 그 자체로서 적군뿐 아니라 아군에게서도 성적(性的)으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참전여성이 당한 이 모든 고통은 국민국가와 국민국가 군대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기에 공개적으로 거론되지 말아야 하며 가능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돼야 한다. 여성군인이 받은 고통은 국가에 더 큰 모욕이 되기에 그 고통은 없는 것이 돼야 하며, 그러다 보면 전장에서 그들의 존재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하는 편이 여러모로 편리하다. 실제로 알렉시예비치 취재에 따르면 참전한 많은 여성군인들이 참전 사실 자체를 숨기고 싶어 했다.
영광이 사라지자 국민국가의 국민인 참전여성은 국가로부터 총체적으로 고통을 받았다. 전장에선 군대의 내부자로서 고통의 동지이자 같은 국민인 남성군인이 (참전여성에게) 고통의 가해자가 되는 광경을 목격한다. 같은 국민인 참전하지 않은 여성은 참전여성의 고통을 동감하거나 동정하기는커녕, 외부자로서 참전여성들에게 추가적인 고통을 가한다. 남편을 전쟁에 보내놓고 자신들이 홀로 힘겹게 생존을 다투고 있을 때 전장의 참전여성들이 자신들의 남편들과 놀아났다는 비난이다. 과거 고려역사에서 몽골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고려의 여인들을 “화냥년”이라고 욕한 사례와 다르지 않다.
소비에트 공화국의 참전 여성들은 여성으로서 역사를 인식했고 주체로서 자신을 설정했지만, 이후의 역사에서 보듯 그들은 역사에서 추방당하고 망각 당한다. 그저 그런 인간의 역사도 아니고, 아주 첨예한 남자의 역사인 전쟁에 여자들이 끼어든 것은 불경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이 책을 저술하기 위한 알렉시예비치의 작업 또한 당국으로부터 공화국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사곤 했다.
그러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여성의 역사는 회복된다. 여성의 역사가 말살됐다는 추가적인 역사까지 포함한다. 여성이 자신을 역사성을 인식한 주체로서 설정한 명백한 과거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장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1929년에 이후 페미니즘 도서목록의 상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자기만의 방>을 발표했다. 이 책의 요지는 단순하다.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을 ‘여성이 역사성을 인식하는 주체로서 스스로를 설정하고자 한다면’으로 바꿔도 크게 오독은 아닐 것이다. 울프는 영국의 대표적인 여류작가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를 거론하며 그들이 거실의 한구석에서 채 30분도 제 마음대로 보내지 못하며 글을 썼을 것이라고 전한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오스틴과 브론테가 기념비적 작품을 남기긴 했지만, 더 많은 오스틴과 브론테의 탄생을 위해선 자기만의 방과 경제적 안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신분상의 독립과 경제력은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작가로 성공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설명이다. 그런 측면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방랑기>에서 결여된 내용을 <자기만의 방>이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세 작품의 발표시기는 엇비슷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방랑기>가 탈주체성의탈주체를 (의도가 무엇이든, 혹은 의도와 무관한 결과가 무엇이든) 문학으로 형상화했다면, <자기만의 방>은 에세이 형식을 빌려 직접 ‘탈(脫)’을 떼어버릴 것을 주문한다. 여성이 글쓰기에서 ‘탈(脫)’을 떼어버리는 방법으로 울프는 모더니즘을 제안한다. 리얼리즘(사실주의)이 세계를 반영하는 보편적인 방식으로서 가부장적 글쓰기 형식을 대표한다면, 내면의 프리즘을 통한 세계의 재구성이란 가능성 하에서 울프는 모더니즘을 여성적 글쓰기의 형식으로 봤다.
그러나 울프는 약간은 혼란된 모습을 보이는데, 아마도 그가 페미니즘을 본격 천착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예컨대 울프는 “위대한 마음은 양성적”이란 콜리지의 견해에 찬동하며 짐작건대 결국은 여성의 발견을 통해 양성의 조화로 가야 한다고 믿은 듯하다.
물론 여성이든 남성이든 결국은 인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휘황찬란한 수사는 인간의 해방과 평등을 말한 근대성의 사기였기에 여성이 결국 인간이 되려면 아직은, 또는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시몬 드 보부와르는 <제2의 성>에서 “우리가 누구든 간에 남자든 여자든 다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어떤 페미니스트의 주장에 대해 “이 주장은 해방을 뜻하지 않고 도피를 뜻한다”고 반박했다.(7) 이 주장이 도피를 뜻하지 않고 해방을 뜻하려면 “여성이 나 자신을 규정하려면 우선 ‘나는 여자다’라고 선언해야 하는 반면 남자는 결코 어떤 성에 속하는 개인으로 자신을 규정하며 시작하지 않는” 상황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여기서 ‘나는 여자다’는 선언은 ‘나는 인간이 아니다’와 등가이며 ‘나의 존재는 탈역사성의 탈주체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하기에 ‘모두의 방’ 혹은 뭉뚱그린 ‘인간론’은 여전히 여성을 탈역사성의 탈주체에 묶어놓기 위한 음모에 불과하다. 양성적인 위대한 마음을 도모하려면 먼저 대등하고 확고한 양 주체가 성립돼야 한다. 따라서 지금으로선 역설적으로 ‘나는 여자다’라고 선언하고 자기만의 방을 확보할 수 있을 때 여성이 자신의 역사를 쓸 수 있을 것이며, 그때야 인간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인간의 역사를 마주대하게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한국CSR연구소장이며,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1) ‘워마드’는 여성(Woman)과 유목민(Nomad)을 합성한 용어. (극단적) 페미니즘 커뮤니티라는 주장부터 남성혐오 사이트란 주장까지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다르게 이해한다. 이 글에선 ‘그냥’ 워마드로 표기했다.
(2) ‘이번엔 태아에 가위질, 천인공노할 워마드 만행’, <노컷뉴스>, 2018년 7월 16일.
(3) ‘워마드, 이번엔 '낙태 인증' 논란…자극적 소재 부각하지 말아야’, <중앙일보>, 2018년 7월 17일.
(4) ‘[TAPAS] ‘워마드 낙태’ 오보가 포털 메인에 떴다’, <헤럴드경제>, 2018년 7월 17일.
(5) “Tomorrow is another day”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로 의역돼 한국 번역사의 유명한 창의적 오역 문장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본래 영어 의미에 충실한 얌전한 번역으로 돌아가 있다.
(6)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은 비비안 리가 맡았다. 영화만 본 사람들은, 혹은 소설을 스쳐 읽은 사람들은 스칼렛이 미인이 아니라는 첫 문장을 대체로 모른다.
(7) 시몬느 드 보부와르, <제2의 성 1>, 16쪽, 동서문화사,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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