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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크루즈와 키아누 리브스를 넘어 만나게 될 우리 원숭이들
톰 크루즈와 키아누 리브스를 넘어 만나게 될 우리 원숭이들
  • 안치용 l 한국 CSR 연구소장
  • 승인 2020.12.3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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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와 4차산업혁명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 담임목사는 사적인 대화에서 “코로나로 대형교회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말했다. 가톨릭, 불교와 달리 개신교에는 작은 교회가 많고 말하자면 자영업처럼 독자적으로 생존해야 하는 구조이다 보니 그런 작은 교회에게 주일성수는 교회의 사활과 직결된다. 몇 주 헌금을 못 거두면 문을 닫아야 할 교회가 적지 않다고 한다면,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여기서 발견된다. 

재정적인 이유에서든 신앙관의 이유에서든 ‘예배=대면’이라는 등식을 고집하기가 더는 어려워졌고, 코로나가 지나간 뒤에도 ‘비대면’이란 흐름을 되돌릴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기독교가 탄생한 이래 2,000년 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직접 대하지 않고 예배하고 친교하는, 전혀 새로운 시대가 전격적으로 열렸다. 100년 전인 스페인독감 때에는 아예 꿈꾸지 못한 장면이다. 2020년 2학기에 신학대학에서 동영상 제작 프로그램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언택트는 개신교의 예배에 국한하지 않고 수업 등 다양한 형태로 (상대적으로 젊은층 중심이긴 하지만) 전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예고 없이 또 전면적으로 들이닥친 언택트 트렌드. 코로나가 강제적인 시대 전환의 방아쇠를 당긴 셈으로 이미 발사한 총알을 총구 안으로 복귀시킬 수 없듯이 시대 전환도 거스를 수 없을 전망이다. 그리하여 벌써 ‘언택트 디바이드’라는 걱정까지 나온다. 언택트 시대에 잘 적응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생길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격차를 뜻한다. ‘디지털 디바이드’ 현상이 엄연하고 전혀 해소되지 않았는데 ‘언택트 디바이드’라니. 사회는 이중의 ‘디바이드’라는 전례없는 급변을 초래하는 중이다. 

많은 소상공인·자영업자와 함께 영세 교회가 ‘코로나 불황’에 직격탄을 맞은 데 이어 개신교 교회 전체가 4차산업혁명의 급류에 휘말린 모습은 아이러니이다. 다른 종교라고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 특성상 개신교가 가장 먼저 강한 물살을 받아내고 난 뒤에야 가톨릭과 불교는 물에 들어갈 준비를 해도 되지 싶다.

앞으로 신학대학과 불교대학에서는 비대면 설교·강론·설법의 요령을 추가로 가르쳐야 할지도 모르겠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성직자는 이제 신도가 아니라 카메라를 보며, 또 집합적 신도의 열기를 느끼는 대신 분할화면 속에서 제대로 식별되지 않는 냉랭한 얼굴을 보며 말하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발화자의 입장이 그렇다면 시청자의 입장은 어떨까. IT기기의 성능이 계속해서 좋아지는 추세여서 싼 가격에 좋은 제품을 살 수 있는 시청자는, 언택트 예배가 ‘노멀’이 되면 조금 더 발화자에게 집중하는 풍경을 그려볼 수 있다. 거실에 앉아서 일요일(주일) 예배나 미사, 법회에 참가한 신자는 대형화면을 통해 그날 ‘발화자’가 코털을 제대로 깎고 그 자리에 섰는지 아닌지 사소한 것까지 저절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종교집회뿐 아니라 수업, 회의 등의 양상도 비슷해질 것이다. 소통구조는 ‘1 대 다’(대면)에서 ‘1 대 1’(비대면)로 바뀐다. 새로운 소통의 공간에서 누군가 말하는 순간 화자 ‘1’은 ‘다’의 숫자만큼 복제돼 ‘다’를 구성하는 ‘1’들에게 각각의 ‘1’로 제공된다.

청중심리와 집단정서가 사라지면서, 즉 ‘아멘’ 소리가 옆에서 들리지 않게 되면서 시청자는 더 냉정하게 발화자의 ‘말씀’을 분석할 기회를 갖게 된다. 혹은 아예 집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카메라 저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신도의 반응을 짐작하지 못하면서 발화자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전개할 수밖에 없게 된다. 

 

AI목사는 얼마나 은혜로울까

코로나 전인 2018년 5월 24일 서울 신촌성결교회에서 ‘오라! 미래여’라는 주제로 열린 제38회 신촌포럼에서 호남신대 신재식 교수는 ‘AI가 설교한다면 우리는?’이란 제목의 주제발표를 했다. 신 교수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제기될 수 있는 질문으로 △AI나 기계는 구원의 대상인가 △자의식을 가진 AI에도 구원/영혼이 있는가 △자의식을 가진 AI는 도덕, 신앙, 사회적 주체일 수 있는가 △AI나 기계가 영적인 것을 담보하고 전달할 수 있는가 △트랜스휴머니즘 시대에 하나님의 형상은 과연 무엇인가 △트랜스휴머니즘은 죽음의 종말을 초래하는가 등을 꼽았다. 

그는 “AI는 수준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약한 AI는 시키는 대로 하는 정도이고, 강한 AI는 (알파고처럼) 바둑이나 체스를 두는 등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현재의 것이고, 초지능 AI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라며 “약한 AI는 현재 큰 교회 목회자들이 설교를 여럿이 함께 준비하는 것처럼 인간 목회자에게 조력자가 될 수 있지만, 강한 AI는 목회자들에게 경쟁자가 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신 교수가 언급한 세 가지 AI는 흔히 말하는 ANI(Artificial Narrow Intelligence)ㆍ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ㆍASI(Artificial Super Intelligence)를 뜻한다. 

“AI설교자가 가능하냐”는 질문에 신 교수는 “안 될 이유가 없다”고 답변했다. 적어도 전달 방식이 인간보다 더 효율적일 것이라고 전제하며 “강한 AI가 설교한다면, 인간처럼 가만히 서서 하지 않을 것이다. 성도들의 안면을 인식해 감정상태를 파악하고 본문을 맞춰 선택하며 방식도 조정할 것 같다. 4D 영화관처럼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실 때 청중석이 흔들리면서 그곳의 냄새까지 그대로 재현해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특히 비대면 예배에서 AI목사의 경쟁력이 인간목사를 압도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AI라면 비대면 예배의 ‘시청자’뿐 아니라 ‘설교자’까지 실제로 ‘1 대 1’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의 효율’ 너머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AI목사가 하는 설교에 영성이 담겼냐는 질문에 대해 신 교수는 앞서 내가 설명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시청자의 관점에서 답변했다. “지금의 젊은 세대와 다음 세대는 모니터와 스크린 등 ‘디스플레이’에 익숙해져 있어 사람의 인격성에 별 관심이 없다”며 “목회자의 영적 상태와 관계없이 교인들은 메시지를 자기식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할 것이다. 다음 세대라면 인간 설교자와 AI 설교자 사이에 질적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 교수가 언급하지 못한 또 다른 문제, 혹은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인간 설교자에게서 영성이 발견되는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이겠다. 인간 설교자가 AI 설교자에 확실한 우위에 서려면 확실히 영성 말고는 방법이 없는데, AI의 설교효율을 상쇄하고 남을 정도의 영성을 지닌 인간 설교자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인간 성직자의 영성과 AI의 설교의 효율이 맞붙는다면 내 생각에 AI가 압승할 것 같아서 걱정스럽다. 

신 교수는 “죽음과 고통과 질병에는 불확실성이 내재하고, 종교는 그에 대한 해답을 주면서 기능과 존재감을 발현해 왔다. 그러나 트랜스휴먼 시대가 되면 젊은 신체에 우리 의식을 이식시키거나 컴퓨터에 의식을 다운로드해 영생불사하는 등 질병과 고통이 사라지고 쾌락만 작동할 수 있다”라고 진단했다. 지금과 같은 고통과 죽음의 질문 자체가 사라지거나 문제가 모두 해소된다면, 만일 죽음을 앞두고 뇌를 리노베이션할 수 있다면 “부자들은 그때 교회에 올 것인가 병원으로 갈 것인가”라는 신 교수의 질문은 종교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4차산업혁명과 포스트휴머니즘이 한꺼번에 도래할 다음 시대에 관한 근원적 질문이었다. 

 

<디스코 비스킷 그룹의 ‘플래닛 앤섬’ 앨범>, 2009 - 스톰 스튜디오

AI와 포스트휴머니즘의 급류

2020년 4월 15일 코로나의 한복판에서 치러진 21대 국회의원 선거는 정치적 의미 외에도 ‘코로나 선거’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코로나19바이러스감염증(이하 코로나19)으로 세계 40개국 이상이 선거를 연기한 마당에 한국이 코로나19 대규모 발병국 중 처음으로 전국 단위 선거를 치러내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21대 총선에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송파을에 출마한 최재성 후보는 선거과정에서 최 의원의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이른바 ‘AI 송파고’를 활용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AI 송파고’는 일종의 ‘디지털 휴먼’이다.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AI 송파고’는 최재성 후보의 목소리 데이터를 ‘심층 신경망’(DNN)을 기반으로 학습(딥러닝)하여 실제와 매우 유사한 목소리를 구현했다. 대화에 필요한 정보는 기존 의정활동 자료와 선거 공약, 그리고 유권자가 궁금해할 선거 관련 정보 등을 지식베이스로 구축하고 자연어 이해(NLU) 기술 등을 활용하여 ‘AI 송파고’가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AI 송파고’는 그 용도를 감안할 때 자연스러움, 즉 최재성 의원과의 일치율을 적정 수준 이하로 유지하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유권자에게 AI가 공동선대위원장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게 하면서 가능한 최대한 비슷하게 보이는 게 중요하다. 최대한 닮게 보이면서 확실하게 구별되는 게 핵심일 텐데, ‘AI 송파고’ 수준에선 아직 너무 똑같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디지털 휴먼’(기술)이 영화에 등장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 자연스러움은 실사인지 아닌지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가 돼야 한다. 여기서는 적정이 아니라 극대화가 목표다. ​21대 총선이 끝나고 며칠 뒤인 4월 22일 개봉한 영화 <이누야시키 : 히어로 VS 빌런>에는 ‘디지털 휴먼’ 기술이 대거 사용됐다. 영화에서 ‘디지털 휴먼’과 ‘디지털 휴먼’ 기술은 점차 사용범위를 넓혀가는 추세다. 최근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고인이 된 스타나 극중 스타의 젊은 시절을 CG로 표현하는 데에 주로 ‘디지털 휴먼’ 기술을 이용한다.

<이누야시키 : 히어로 VS 빌런>은 ‘디지털 휴먼’ 기술 중에서도 첨단의 영역을 도입한 사례이다. 사토 신스케 감독은 “주인공인 이누야시키와 시시가미는 전신이 기계로 돼 있어서 ‘디지털 휴먼’에 의지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장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누야시키: 히어로 VS 빌런>은 일본의 유명 만화가 오쿠 히로야의 만화 <이누야시키>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선과 악을 대표하며 싸우는 두 주인공 모두 일종의 ‘기계인간’이다. 

이 기계인간을 딱히 어떤 유형의 존재라고 규정하기 힘든 것이, 그들은 만화에서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이어서 지구상의 어떤 생명종과도 일치하지 않으며, 기존 생명의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기계와 생명체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초인 혹은 괴물이다. 이때 괴물의 의식은 인간의 의식이다. 기계장치로 인간을 보완하는 수준을 넘어선, 기계와 인간을 합체한 하이브리드 인간은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에서도 좀 깊숙한, 또는 아직 황당한 내용이라고 봐야 한다. 

영화가 인기를 끌어 널리 알려진 까닭일 텐데 대중에게 익숙한 ‘디지털 휴먼’의 모델로는 영화 <그녀(Her)>(2013년)의 ‘사만다’를 들 수 있다. 남성 주인공과 여성의 목소리로 대화하는 AI비서 사만다는, 사용자와 소통하고 교감하며 정서적 유대를 쌓을 수 있도록 설계된 컴퓨터 프로그램 또는 운영체계(OS)이다. <그녀>는 인간과 컴퓨터가 사랑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기존 기술에 CG 기술을 결부한, 조금 더 생생한 ‘디지털 휴먼’은 바로 2018년에 선보인 ‘사이렌’이다. 하지만 영화 <그녀>의 사만다처럼 사용자와 정서적으로 소통하는 일은 사이렌에게 역부족이다. 중국 국영 신화통신사에서 2019년 3월 디지털 여성 앵커를 선보이며 1분가량 뉴스를 전하게 한 적이 있어 대본을 읽으며 방송을 진행하는 TV 뉴스 아나운서, 기상캐스터 등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디지털 휴먼’으로 대체될 수 있을 전망이다. 사만다 수준의 ‘인간성’ 구현은 더 많은 연구를 요할 테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사만다를 만나는 시점이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닐 것이다.

사만다에 CG를 입히면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대상 혹은 주체가 된다. 코로나로 인한 언택트 트렌드가 이미 인간 사이의 소통을 줌 등을 통한 그래픽 구현으로 점차 바꾸어가고 있기에 화상을 통해서는 실제 인간과 사만다를 구분하기 어려운 날이 조만간 올 것이다. 사만다의 ‘의식’ 또는 ‘정신’을 인조인체에 넣으면 인조인간(안드로이드)이 되고, 로봇에 넣으면 인간형 로봇이 된다. 전자는 유명한 <블레이드 러너>의 ‘레이첼’, 후자는 <채피>의 ‘채피’가 대표적이다.

<채피>(2015년)는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의 많은 주제를 포괄한 흥미로운 영화다. 인간의 모습과 질감을 취한 인조인간은 <블레이드 러너>(1982년)에서 이미 여러 모델로 제시되었다. 한데 <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 묘사에 너무 인간적인 관점이 채택된 듯도 하다. 섹스용 안드로이드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전투로봇까지 단백질 피부를 씌운 안드로이드로 만들어야 했는지는 현실적인 감각에선 상당히 의문이다. 극중 경찰로봇을 인간처럼 만들지 않은 <채피>에서는 경찰로봇을 티타늄 ‘피부’의 전형적인 로봇으로 설정했는데 이것이 아마 현실적인 발상이지 싶다.

‘채피’는 전형적인 로봇의 외양을 한 금속 몸체 안에 0과 1의 축적형태로 자의식과 학습능력을 형성한, 의식 면에서는 사실상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다. <채피>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AI의 의식을 디지털 파일로 구축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도 디지털 정보로 변환할 수 있다고 봤고, 영화에서 실제로 그렇게 한다. 아날로그 음성신호를 디지털 음성신호로 변환한 것과 흡사하겠거니 생각하고 일단 대충 넘어가자. 의식이 디지털 정보로 변경될 수 있기에 USB에 보관될 수 있고, 심지어 (인체의?) 사후에도 의식은 디지털 정보인 파일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기에, 인간 의식은 USB 등에 파일로 존재하다가 적당한 로봇의 몸체를 찾아 로봇 안으로 파일 전송하듯 주입된다. 인간은 인간의 몸을 완전히 벗어나며 인간의식은 티타늄 몸체 안에서 영생을 누린다. AI와 인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이어 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모호해지다가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된다고 할 때 이 영화는 포스트 휴머니즘의 핵심 주제를 다룬 셈이다. 인간이 인간 육신에서 해탈하여 영생의 존재로 승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종교의 주제이기도 하다.

 

사유와 연장 너머 

‘n번방’ 사건을 비롯하여 온라인상의 사이버성폭력이 확산되면서 ‘딥페이크(Deep Fake)’가 함께 주목받았다. 딥페이크는 AI를 활용하여 특정 인물의 가짜 영상을 제작하는 행위나 기술, 그 결과물을 의미한다. 딥페이크에 대해 대한민국 법무부가 부여한 공식명칭은 ‘AI기반 첨단조작기술’이다. 딥페이크는 AI와 관련된 딥러닝(Deep Learning) 기술과 페이크(Fake)의 합성어다. ‘안면 매핑(facial mapping)’, ‘안면 스와핑(face-swapping)’, ‘생성적 적대 신경망(GAN)’ 등 AI와 관련된 기술이 속속 개발되면서 사진 한 장만으로도 말하는 동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다. 더 큰 문제는 이 시대가 인간의 눈에 의지해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게 불가능한 시대로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위조화폐, 모조품, 위작, 가게무샤(影武者)까지, 인간세상에 만연한 욕망이자 본원적 현상이라고 할 ‘가짜’는 그러하기에 일종의 필요악이었는지도 모른다. 단 그때의 페이크는 인간 사이에서 생성된 페이크였다는 사실을 명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위조화폐를 만들고 화폐위조범을 잡는 대치가 위조화폐라는 매개물(媒介物) 거쳤음에도 근본적으로 ‘인간 대 인간’의 문제였지만, 점차 대치 전선이 모호해지고 있다. 물론 ‘현재’로서는 ‘인간 대 인간’을 최종적으로 식별해 낼 가능성이 식별하지 못할 가능성보다 더 높다고 판단되기는 한다.

더 정교하고 더 위협적이며 더 사악한 페이크가 나타날 가능성은 100%다. 개인의 사생활 침해, 여론 조작을 넘어서 국가안보나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페이크가 나타나지 말란 법이 없다. 향후 딥페이크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면 그 전사(戰士)는 인간이 아니라 AI가 될 것이다. 페이크를 AI가 만들고 그것을 적발하여 진짜를 복원하는 일도 AI가 한다면, 인간은 영원히 어느 것이 원래 진짜였고 원래 페이크였는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코로나가 앞당기고 있는 4차산업혁명 시대는 인류 진화의 최종 단계이다. 데카르트는 사유와 연장을 구분한 이원론으로 근대를 열었고, 뿌리 깊은 서양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데카르트적 근대는, 사유가 연장을 확대하고 확대된 연장이 사유를 촉진하는 되먹임을 반복하며 인간 주체와 이성의 시대를 꽃피웠다. 

현재 논의되는 4차산업혁명과 AI전환은 아직은 사유와 연장 프레임 안에 머물러 있지만 언제든지 그 밖으로 뛰쳐나갈 기세다. 현실의 사유와 연장은, 데카르트 이후 철학의 사유와 연장 또한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명료하게 이분(二分)되지는 않고 서로 엉켜 든다. ‘호모 파베르’는 사유와 연장의 엉김을 포착한 원형적 표현이다. 연장(extention, 延長)으로서 도구는 사유로서 인간과 정확히 구분되며 근대 세계를 개척했지만, 지금에서는 연장이 사유가 되고 사유가 연장이 되는 융합이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다.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2014년)에서 두 명의 주인공 톰 크루즈(빌 케이지 역)와 에밀리 블런트(리타 브라타스키 역)의 대화 한 대목만으로 사유와 연장에 관한 지금의 논의는 간단히 정리된다. 극중에서 크루즈가 “나는 군인이 아니야.(I am not a soldier)”라고 말하자 블런트는 “맞아. 너는 무기야.(Of course you are not. You are a weapon)”라고 대답하는 장면이다.  

형태 면에서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사유와 연장의 엉김’은 포스트휴머니즘의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극중 병사이자 무기인 톰 크루즈는 인간의 팔과 다리를 첨단장비로 증강한 전사로 설정된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기 몸을 움직여야만 세계에 맞설 수 있고, 비록 극중에서 두 주인공이 끊임없이 되살아나기는 하지만 맞섰다가 패배하면 죽어야 한다.

영화 <채피>에서 악당을 연기한 휴 잭맨(빈센트 역)은 AI로봇 채피에 맞서 두뇌감응으로 원격 조정하는 거대 로봇을 가동한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전투장비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차이는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는 장비가 손과 팔·다리 같은 인간 몸의 직접적 움직임에 반응하고, <채피>에선 인간 뇌와 손동작에 원격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채피>의 예에서는 로봇 혹은 전투장비가 파괴돼도 인간은 다치지 않는다. 전투무기의 형태로는 아니겠지만 두 가지 모두 곧 길거리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단계의 포스트휴먼은 영화 <써로게이트(Surrogates)>(2009년)에서 볼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인체 크기의 캡슐 안에서 뇌파로 자신의 분신을 조정한다. 여기서 ‘조정한다’는 말은 부정확하고 분신으로 ‘생활한다’가 맞는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분신에게 사실상 삶을 위임한다. 조정한다는 말은 영화 <아바타>(2009년)에서나 사용됨직하다. <써로게이트>에 이르러 사유와 연장은 묵시록적 혼합을 맞이한다. 만일 이런 세상이 현실에서 열린다면, 인류 진화의 최종 단계에서 맞이하는 치명적 몰락의 풍경으로 불러야 하리라.

더 나가면 설명이 필요 없는 영화 <매트릭스>(1999년)의 세계다. 그 세계에서 사유와 연장은 완벽하게 도치된다. 사유가 연장이 되고 연장이 사유가 되며, 인간이 물질이고 물질이 인간이 되는 세계를 <매트릭스>가 묘사한다.

코로나 시대는 인류가 근대 이래 공통으로 처음 체험하는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곤경이다. 코로나19라는 감염병 자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근대로 발전하면서 쌓인 모든 역량과 모순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그리하여 하던 대로는 미래가 없다는 통렬한 각성이 생겼지만 각성을 실현할 활로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 곤경의 핵심이다. 

여기에다 그렇지 않아도 무섭게 달려오던 4차산업혁명과 AIㆍ포스트휴머니즘이란 미증유의 패러다임이 코로나라는 촉매를 거치면서 접근 속도를 급격히 높이고 있다. 기후위기와도 맞물려 있는 이 새로운 시대가, 별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쿠팡, 넷플릭스, 줌 같은 몇 개의 단어로 요약되고 말 수도 있겠다. 반면 다가오는 노도(怒濤)를 예민하게 지각하는 사람은 비유컨대 영화 <매트릭스> 안에 끌려 들어가는 심정을 방불케 할 무엇인가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사회모순이 중첩되어 코로나를 계기로 터져나온 ‘코로나 디바이드’에다 오래된 ‘디지털 디바이드’와 새로운 ‘언택트 디바이드’ 등 각종 ‘디바이드’가 난무하는 가운데 ‘인식의 디바이드’ 또한 완연하다. ‘인식의 디바이드’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것이기에 특별한 현상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인류 진화 최종단계라고 할 결정적 국면의 극심한 ‘인식의 디바이드’는 인간이 다른 심각한 ‘디바이드’에 적절히 대처하는 데에 큰 지장을 주게 된다. 

어떻게 대처하든 모종의 결말을 보겠지만 지금 단계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우리가 전혀 새로운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사실인정(事實認定, fact finding)이 언제나 모든 일의 시작이다.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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